인도의 구도자 오쇼 라즈니쉬의 가르침. 기적을 찾아서.

뭔가 겉도는 기분이었습니다.
앞으로 발걸음을 옮기지만, 뫼비우스 띠를 따라 맴도는 듯했어요.
그때 이 책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가졌던 의문 중 몇이 해소되었거든요.
불교, 기독교, 힌두교, 이슬람교 등에선 정파처럼 가르친다면,
오쇼 라즈니쉬는 정사지간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파의 시각으로도 한번 바라보고 싶은데 아직까진 기회가 없었네요.
뭐 언젠가 인연이 닿는다면 마주치겠죠.
이 책에는 오쇼 라즈니쉬의 흥미로운 관점이 잘 담겼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그것을 덥석 믿진 않아요.
그것을 직접 겪는다면 사실이 될 테니 믿음이 필요치 않고,
경험하지 못한 것이라면 믿는다고 해도 달라질 게 없으니까요.
무지개를 한 번도 못 본 사람이 그게 하늘에 뜬다고 믿어 봤자 뭐합니까?
그것을 본 사람은 말합니다.
“비가 그치면 뜬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동쪽 하늘에 뜬다.”
“아니다. 서쪽 하늘이다!”
동쪽과 서쪽은 정 반대의 방향이지만, 무지개는 어디서고 상황만 맞으면 뜹니다.
이렇게 무지개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면 우리는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좀 헤매면 결국 무지개를 보게 되죠.
“오! 무지개는 비가 내린 뒤에 태양을 등지고 서야 보이는군.”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은 단지 남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바투 동굴-'기적을 찾아서'

오쇼 라즈니쉬의 관점과 명상 철학

얼마나 많이 달렸느냐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가 원주에 있는 한 중심과의 거리는 항상 똑같다.

불행이 시간을 길게 연장하는 반면 행복은 시간을 짧게 단축시킨다.

위험이 없는 곳으로 가지 말라. 절대 그런 곳으로는 가지 말라. 거기에는 죽음 외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생각을 통제할 수 없다면 그들은 미친 사람들이다. 그리고 주인의 입장에서 자신을 다룰 수 있는 사람들만이 건강한 정상인이다.

폭력적인 사람이 비폭력주의자가 되려고 애쓴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이 유순해 지려고 애쓴다. 거친 사람이 상냥해지려고 노력한다. 도둑이 관대해지려 하고, 사악한 사람이 성자처럼 되려고 애쓴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우리 모습을 부정하고 항상 그 위에 무엇인가 부과하려고 애쓴다.

사하자 요가는 말한다.
“있는 그대로의 그대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려고 하지 말라. 그대가 어떤 존재 인지를 알고 그에 충실하게 살아라. 그대가 도둑이라면, 그대가 도둑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에 충실하게 살아라.”
“만약 그대가 도둑이라면 그 사실을 분명히 알아라. 도둑질을 하더라도 그 사실을 알고 하라. 내일은 도둑이 아닐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도둑질을 하지 말라.”

영적인 삶의 길에 퇴보는 없다. 다만 진보나 정체가 있을 뿐이다.

자신이 처한 단계에서 주어지는 가르침을 신뢰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돌아서 가는 길이 더 쉽고 지름길이 가장 험난하다는 것은 수없이 증명된 바 있다.

자기 자신을 알고 깨닫는 것은 분명히 기쁜 일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잃어 버리는 것이야 말로 궁극적인 지복이다.

가정을 꾸려 나가면서 쓰이는 에너지를 다른 일을 위해 보존하자는 것이 출가의 이유였다.
우리가 활용하는 에너지가 매우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에너지를 다른 목적, 더 높은 목적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그 취지였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 소비하는 에너지는 아주 소량이다. 보존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그리고 이 에너지를 보존하기 위해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해야 할 것이다. 에너지를 보존하기 위해서도 에너지를 소모해야 한다.
이런 종류의 산야스는 자신이 가진 빈약한 에너지를 보존하려는 인색한 사람들의 길이다. 이렇게 인색하고 옹졸한 접근 방식은 아무 소용이 없다. 여기저기에서 조금의 에너지를 저축하는데 급급해서는 안된다. 그보다도 우리 안에 잠 자는 에너지, 그 풍부하고 무한한 에너지를 일깨워야 한다.

명상가(sadhak)와 헌신자(bhakta)라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헌신자의 신은 하늘 위에 있다. 그러므로 헌신자는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면서 기다린다. 반면, 명상가의 신은 그의 내면 깊은 곳에 잠 들어있다. 따라서 명상가는 신을 깨우려고 노력한다.

수피는 수면이라는 자연현상에 정면 공격을 가함으로써 매우 생소하고 이상한 상황을 창조한다.

날숨과 들숨의 중간 지점에 호흡이 멈춰 버린 이 순간, 완벽한 균형이 이루어진 이 순간에 삼매가 온다. 이 순간에 그대는 생명(life)이 아니라 존재(existence)를 안다.

사드구루(sadguru), 완벽한 스승에 대한 정의는 ‘구루가 되지 않는 사람’이다. 이 말은 스스로 구루라고 지칭하는 사람들은 구루가 될 자격이 없음을 뜻한다.

이해의 차원에 도달한 사람들은 인간이 꿈꾸는 두 가지 목표에 대해 말한다.
섹스와 해탈이 그것이다. 부와 종교라는 다른 두 가지 목적은 단지 수단에 불과하다. 부는 섹스를 위한 수단이다. 그러므로 성적인 시대일수록 부를 지향하며, 해탈을 구하는 시대일수록 종교를 지향한다. 부가 수단이듯이 종교 또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어제로 돌아가기를 원한다면 그대는 눈을 감고 어제를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상태가 얼마나 가겠는가? 눈을 뜨는 순간 그대는 현재에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일시적인 행복은 동물적인 차원에서도 가능하지만 영원한 행복은 신과 하나가 되었을 때 만 가능하다.

타인이라는 현상 자체가 환상이다. 일단 이것을 깨달으면 삶이 아주 단순해진다. 타인을 지향하는 모든 행동이 중단된다. 이 때는 타인을 위해 어떤 일을 하건, 그대 자신을 위해 어떤 일을 하건 오직 그대만 남는다. 그대는 타인을 도와 줄 때도 그를 타인으로 간주하지 않으며, 타인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때도 그를 타인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사실 착취(exploitation)와 실용화(utilization)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내가 나의 에고를 위해 무엇인가 이용한다면 그것은 착취다. 그러나 재가 온 세상을 위해, 모든 사람을 위해 어떤 것을 이용한다면 거기에 착취의 문제는 없다.

구루를 찾는다면 그대는 그 자리에 정체될 것이다. 이정표 위에 멈춰 서지 말라.

실제로, 마음은 어디로 갈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마음은 천국으로 가야 행복할지 지옥으로 가야 행복할지 결정하지 못한다. 항상 두려워한다. 이렇게 두 발을 각기 다른 배에 올려놓으면 아무데로도 가지 못한다. 그대는 물에 빠져 죽고 말 것이다.

쿤달리니가 각성된 후에는 폭력적인 성향이 완벽하게 사라진다. 폭력을 행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면의 폭력성도 사라진다. 폭력을 행사하고 싶은 충동, 남에게 해를 입히고 싶은 충동은 쿤달리니가 잠자고 있는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쿤달리니가 깨어나는 순간 타인은 더 이상 타인이 아니다. 그러므로 타인에게 해를 입히려는 충동은 불가능하다. 이 때는 폭력적인 충동을 억누를 필요가 없다. 그런 충동 자체가 없으므로 폭력적으로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만일 폭력적인 충동을 억눌러야 한다면 쿤달리니가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알면 된다. 눈을 뜬 다음에도 여전히 지팡이가 필요하다면 그대의 눈은 아직 사물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의 일곱가지 신체

객관적 평가 가능한 영역

  • 첫 번째 - 물질적 육체 - 육체만이 형성
  • 두 번째 - 에텔체(etheric body) - 감정의 성장
  • 세 번째 - 아스트랄체(astral body) - 이성과 사유, 지성

주관적인 영역

  • 네 번째 - 멘탈체 (metal body) 또는 심령체(physic body)
  • 다섯 번째 - 영체(spiritual body)
  • 여섯 번째 - 코스믹체 (cosmic body)
  • 일곱 번째 - 니르바나 사리르 (nirvana sharir), 열반체 (nirvanic body), 무체의 체(bodiless body)

다섯번째 신체에서 모크샤(moksha)가 경험된다. 그 전에 있는 네가지 신체의 한계가 무너지고 영혼이 완전히 자유롭게 된다. 그러므로 해탈은 다섯 번째 신체의 경험이다. 천국과 지옥은 네 번째 신체의 차원에 속한다. 이 차원에 정체된 사람은 천국과 지옥을 경험할 것이다. 첫 번째나 두 번째, 또는 세 번째 신체에 머무는 사람들에게는 탄생과 죽음 사이의 삶이 전부다 그들에게는 죽음 너머의 삶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남자는 내부에 여성체를 갖고 있으며, 모든 여자는 내부에 남성체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우연히 어떤 여자가 자신의 남성체와 일치하는 남자를 배우자로 얻거나, 어떤 남자가 자신이 여성체와 일치하는 여자를 배우자로 얻는다면 그야말로 성공적인 결혼이다.

구도자는 안전을 경계해야 한다. 구도자에게는 안전에 대한 욕망이 가장 큰 집착이다. 한순간이라도 안전을 추구한다면 그는 이미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구도자는 항상 ‘나는 안전을 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그대는 안전이 아니라 진리를 구하는 것이다.

속박이 있는 곳에 관계는 없다. 그리고 관계가 있는 곳에서 속박은 불가능하다.

눈먼 사람은 등잔이나 전깃불을 만나도, 밝은 태양 아래에 나서도 결코 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

탐구(seek)하는 것과 요구(ask)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실제로, 탐구를 원하지 않는 사람만이 요구한다.

에고와 ‘나의 존재성’이 어떻게 다른지 이해해야 한다. 에고, 즉 ‘나(I)’라는 느낌은 죽겠지만 ‘존재(am)’라는 느낌은 죽지 않을 것이다. ‘I am’ 안에는 두 가지가 있다. ‘I’는 에고고 ‘am’은 아스미타(asmita), 존재의 느낌이다.

전세계에 만연한 남녀간의 불평등은 남자가 자신을 ‘주는 자’로 생각하고 여성은 자신을 ‘받는 자’로 생각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받는 쪽은 왜 반드시 열등해야 하는가? 누가 그렇게 말하던가? 받는 자가 없다면 주는 자가 무슨 소용인가? 그 반대의 경우도 성립된다. 주는 자가 없다면 받는 자가 무슨 소용인가? 이것은 열등함과 우월함의 문제가 아니다. 둘이 서로 보완적인 위치에 있다.

우리는 항상 값을 치를 준비를 해야 한다. 실제로 값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을수록 우리는 더 가치 있는 것을 얻는다.

동물에게는 내일이 없다. 그들에게는 오늘이 전부다. 어떤 면에서는 오늘조차 없다. 내일이 없는 그들에게 오늘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행복은 지겨움을 낳는다. 행복만큼 권태를 불러 오는 것은 없다. 불행은 지겹지 않다. 불행한 마음은 결코 권태롭지 않다.

성교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단순히 음식을 먹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음식을 소화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성교는 음식을 먹고 토하는 행위에 불과 하다. 아무것도 소화되지 않는다. 무엇인가 소화되면 그 만족감은 훨씬 더 깊어지고 오래간다. 그러나 소화 흡수 작용은 에너지의 순환이 형성되었을 때만 가능하다.

가정을 가진 사람에게는 섹스가 많은 문제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나 전통적인 산야신에게는 섹스가 유일한 고민거리다.

사념(thought)과 사유(thinking)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다. 사념은 자동적인 현상이다. 사념은 항상 이방인처럼 왔다가 떠난다. 사념은 항상 이방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은 표현이다. 그러나 사유는 우리의 것이다. 이 사유는 다섯 번째 신체에서 시작될 것이다. 이 때 그대는 단순히 다른 사람들의 사념을 수집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 스스로 사유하게 될 것이다.

하나의 차원 안에서 삼매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가짜 삼매다. 진짜 삼매는 차원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하나의 문일 뿐이지, 방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방밖에 있어야 한다. 다음 방과 연결되는 지점에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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