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면 행동에 관한 에세이. 상호작용의례.
우리가 삶에서 상투적으로 겪는 상호작용 과정을 사전처럼 또박또박 정의한 책이다.
처음엔 뭐 이런 걸 책으로 다 썼나 싶었지만 읽을수록 흥미로운 내용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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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사회적 가치가 드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자기가 지켜오던 노선에 통합되지 못하는 사람을 일러 체면이 망가진(be in wrong face) 사람이라 한다. 상황에 적절한 노선을 갖추지 못한 채 사람들과 만나는 자리에 나타나는 사람을 가리켜 체면 없는(be out of face) 사람이라 한다. 다른 참여자들이 장난조로 당사자에게 눈치를 주기도 한다. 물론 당사자가 스스로 상황 파악을 못했음을 알아차리는 심각한 상황도 있다.
회피절차(avoidance process) 체면에 위협이 될 상황을 막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위협을 될 법한 접촉을 피하는 것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서로를 피하는 관계, 중재자가 중간에서 새심하게 역할을 해야 하는 관계까 있음을 목격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사회 성원들도 체면 유지에 위협이 될 만한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우아하게 한발 물러서는 게 좋다는 사실을 안다.
체면 손상의 위험을 감지하여 취하는 일련의 언행과 의례 균형의 복원 과정을 나는 주고받기(Interchange)라고 부르기로 한다. 행위자가 행동 수순으로서 상대에게 전하는 모든 것을 메시지 또는 조치라고 정의하면 주고받기는 두 사람 이상, 두 가지 이상의 조치로 이루어진다. "실례합니다(Excuse me)"라는 말에 "그러세요(Certainly)"라 대답하기, 선물이나 방문 주고받기가 아마도 미국 사회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명백한 보기일 것이다.
네 가지 고전적 형태의 주고받기
- 도전(challenge) : 도전은 그릇된 행실에 주의를 일깨우려 참여자들이 책임을 떠맡는 조치다.
- 제안(offering) : 물의를 일으킨 당사자에게 무례를 만회하고 표현적 질서를 복원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 수용 : 제안을 받은 이들이 표현적 질서와 그 질서로 지탱되는 체면을 살리는 만족스러운 수단으로 제안을 수용하는 것이다.
- 감사 : 용서받은 자가 자기를 너그럽게 용서해준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는 신호를 보냄으로써 끝이 난다.
회피의례는 말 그대로 행위자가 존대를 받는 이와 알맞은 거리를 지켜 짐멜(Simmel)이 '이상적인 영역'이라 부른 선을 넘지 않도록 조심하는 존대 형태다.
인류학과 사회학에서 가장 흔히 드는 예가 다른 사람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 거리존중 의례다.
영국에서는 중간 계급이 사는 도심 지역에서 하위 계급이 사는 농촌 지역으로 갈수록 좌석 사이의 간격이 좁아진다. 변방의 섬 셰틀랜드에서는 식사자리에서나 그 비슷한 사교모임에서 서로 몸이 닿더라도 침범으로 여기지 않으며 사과를 할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참여자들의 서열과 상관없이 행위자는 상대가 당연히 불가침을 보장받으려는 기대를 하고 있음을 느낀다.
행위자가 상대의 일상 영역에 예사롭게 드나들고 사생활을 침범할까봐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사이라면 친숙한 관계라고 말한다. 행위자가 상대에게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모습을 보면 어색한 관계 또는 정중한 관계라고 말한다. 두 개인 사이의 품행을 규정하는 규칙은 친숙한 관계인지 정중한 관계인지에 따라 대칭적일 수도 있고 비대칭적일 수도 있다.
연출의례라고 이름 붙인 두 번째 유형은 존대를 하는 쪽에서 상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앞으로 닥칠 상호작용에서 상대를 어떻게 대우할지 상대에게 입증해 보이는 행동을 모두 포함한다. 연출의례에서는 의례관행과 관련된 규칙이 금지가 아니라 처방의 성격을 띤다. 회피의례는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규정하는 반면 연출의례는 해야 할 바를 규정한다.
처신은 남들이 보는 자리에서 개인이 품행, 옷차림, 태도를 통해 자신이 바람직한 자질을 지닌 사람인지 아닌지를 나타내주는 의례적 행동의 요소를 가리킨다. 미국 사회에서 '좋은'또는 '올바른' 처신이란 결단력과 진정성, 겸손함, 스포츠맨 정신, 말과 행동의 단호함, 자기의 감정·입맛·욕망에 대한 자제력, 압박감에 시달리면서도 침착성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 따위를 가리킨다.
개인이 자신이 지닌 특정한 부분만을 치장하여 자아상을 완성하려면 남들에게 의존해야 한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하다. 각자 자신의 이미지는 처신으로, 타인의 이미지는 존대로 표현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래서 사람됨이 완전히 드러나려면 각자가 서로 존대와 처신을 주고 받는 의례 사슬에서 손을 잡고 있어야 한다. 개인에게 고유한 자아가 있음은 사실이겠지만 그 고유한 자아라는 것도 순전히 의례적 협동작업의 결과다. 처신을 통해 표현한 부분이 그를 대하는 남들의 존대 행동으로 표현된 부분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은 것이다.
사람은 극심한 제약을 받으면 반사적으로 정상 영역을 벗어날 수밖에 없다. 관습적 의례를 행할 때 쓰이는 기호나 물리적 수단을 이용할 수 없는 탓이다. 남들이 혹 그에게 의례적 존중을 보여준다 해도 그는 답례를 할 수도 없고 존중받을 만한 사람다운 언행을 할 수도 없다. 가능한 것은 의례적으로 부적절한 말뿐이다.
보통 일상의 중요한 상황에서 당황하는 경우는 서로 다른 맥락에서 투사된 자아들이 충돌할 때 생긴다. 다른 상황맥락에서는 타당한 자아가 당장의 상황맥락에서 투사된 자아와는 어긋나 일관된 자아를 유지할 수 없는 경우가 그렇다. 따라서 당혹감은 우리를 '역할 분리(role segregation)'로 유도한다. 누구에게나 여러 역할이 있지만 대게는 '청중 분리(audience segregation)' 덕분에 역할 딜레마에서 벗어난다. 보통 어떤 한 역할을 할 때의 청중은 다른 역할을 할 때의 청중이 아니라서 개인은 그 어느 쪽도 해치지 않은 채 역할마다 각기 다른 사람이 되어 자신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화제에 자연스럽게 상호몰입 하는 상태를 기준으로 삼으면, 우리는 화제로부터 소외되는 경우가 참으로 흔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상호 몰입은 일반적인 기준에서 보면 결함도 많고 부패하기도 쉬운 허약한 상태, 언제라도 개인을 소외시킬 수 있는 위태롭고 불안정한 상태다. 여기서는 의무적인 몰임을 다루고 있는 만큼 소외는 '몰입불량(misinvolvement)'이라 할 수 있는 부정행위에 속한다. 몰입불량에서 비롯된 몇 가지 전형적인 소외 형태를 살펴보자.
1. 딴생각(External Preoccupation) : 개인은 정해진 관심의 초점에 집중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나누는 이야기나 다른 참여자들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일에 사로잡힐 수 있다.
2. 자의식(Self-consciousness) : 정해진 관심의 초점에 집중하는 대신 개인이 자기가 잘하고 있는지 잘 못하고 있는지, 남들에게서 바람직한 반응을 얻는지 그렇지 않은지, 지나칠 만큼 자기 자신에게 신경을 쓸 때가 있다. 개인적 자의식은 우연히 자기가 소재가 된 대화의 내용에 몰입한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대화의 내용에 스스럼없이 몰입해야 할 순간에 상호작용자로서의 자기 모습에 주의를 기울인 결과다.
3. 상호작용에 대한 의식(Interaction-consciousness) : 대화 참여자는 공식 대화 내용에 자연스럽게 몰입하지 못하고 상호작용의 진행이 미진하다는 점에 신경이 쓰일 수 있다. 자의식의 경우만큼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므로 그런 상태가 어디에서 비롯하는지 그 몇 가지 원천의 실례를 들어보자.
상호 작용을 의식하게 되는 흔한 경우 중 하나는 개인의 남다른 책임감에서 비롯한다. 상호 작용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도록,'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적절하게 몰입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감이다.
4. 타인에 대한 의식(Other-consciousness) : 상호작용 중에 다른 참여자에게 신경이 쓰여 산만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개인은 자의식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대화에 집중하지 못한다.
타인에 대한 의식을 유발하는 한 가지 흥미로운 원천은 '과잉몰입'이다. 어떤 대화에서든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 개인이 대화에 얼마나 심취해도 좋은지, 적정 몰입 수준을 규정하는 기준이 설정된다. 자기에게 허용된 정도 이상으로 감정에 휩쓸리거나 행동의 자제력을 잃지는 말아야 한다. 물론 사회적으로 인정된 그 자리의 중요성과 개인이 맡은 역할에 따라 달라지긴 하지만 개인은 어느 정도 몰입을 유보할 감정적 여유가 있어야 한다. 개인이 화제에 지나치게 몰입해서 자기의 감정이나 행동을 스스로 절제하지 못한다는 인상을 다른 이들에게 주게 되면, 다시 말해 그 사람이 그 순간의 상호작용 세계를 너무 현실적으로 받아들이면, 다른 이들은 나누던 화제에 몰입하지 못하고 그 사람 자체에 주목하기 십상이다. 한 사람의 지나친 열정은 다른 이들을 소외시킨다. 어떤 경우든 개인이 지나치게 몰입하면 일시적으로 상호작용자로서의 기능을 상실한다.
소규모 분석으로 정평이 나 있는 프로이트학파는 이제 증상이라고 불리는 특정한 위반 행동을 위반자의 의사소통 체계와 방어기제, 특히 어린아이 단계로의 퇴행으로 읽고 해석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심리학적·전문적 관점의 승리에는 사회적으로 부적절한 행동이 심리학적으로 정상이며(건강하지 못한 결혼관계를 끝낼 수 있을 만큼 강해졌음을 보여주는 사람의 경우처럼) 사회적으로 적절한 행동이 사실은 병적일 수 있다(일부 실험연구자들이 발견한 강박증과 성욕감퇴 증상 따위)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 다. 한마디로 말해, 드러난 증상이란 정신과 의사에게 탐색을 시작해도 좋다는 허가증 같은 것이다.
대면 상황의 품행규칙은 특정 공동체에서 서로 융화되는 모습을 연출하여 일종의 제왕의 평화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참여자들은 관행적 상투어로 서로에 대한 존중을 표현하고, 각자 분수를 지키며, 서로가 관계에 성실하고 말과 몸의 교류를 허용하되 남용하지는 말아야 하고, 사교 자리를 존중해야 한다. 이런 규칙들의 위반이 상황적 부적합성이다. 위반은 대개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의 권리를 훼손하고 또 공개적인 사실로 알려진다. 위반의 동기가 그 자리에 있는 어떤 인물이나 또는 그 자리에 없는 사람과의 특별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부적합성은 일차적으로 대인 의사소통에 사용하는 언어 형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적 품행에 있다. 품행의 결함이 정보 전달이나 관계 맺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면 상황에서 지켜야 할 예의나 처신에 있다는 뜻이다.
"줄 위에 오르는 것이 삶이다. 그 나머지는 기다리는 시간일 뿐이다." - 탤컷 파슨스(Talcott Parsons)
동전 던지기의 결정적 특성은 그 단계적 성격에 있다. 내기를 하는 소년들은 동전 던지기의 조건에 합의해야 한다. 몸을 나란히 하고 서서, 한 번에 동전을 몇 개나 걸지 또 누가 동전의 어떤 면을 택할지 결정해야 한다. 내기에 자신을 던질 자세와 몸짓을 갖추어서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넘어서야 한다. 이것이 내기를 거는 단계 또는 겨룸을 준비하는 단계(squaring off phase)다. 다음은 인과적 힘이 실제로 작용하여 결과를 생산하는 결정 단계(determination phase)다. 이어서 결과가 드러나는 노출단계(disclosive phase)가 뒤따른다. 이 단계의 지속시간은 내기 참여자들이 선 자리와 결정 도구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대개 아주 짧고, 특별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마지막은 청산단계(settlement phase)로, 결과가 드러난 후 진 사람이 내기에 건 돈을 내놓고 이긴 사람은 돈을 거둬들인다.
준비, 결정, 노출, 청산의 네 단계를 거치는 내기가 한 판(span)이고, 한 판과 다음 판 사이에는 휴식시간을 갖는다. 내기 한 판에 걸리는 시간과 한자리에서 몇 판을 할지를 결정하여 내기를 계속하는 동안을 가리키는 내기지속시간(session)은 구별해야 한다. 정해진 단위시간 동안 완료된 내기의 수가 내기의 비율이다. 평균 내기지속시간에 따라 내기 비율의 상한선이 정해진다.
게임과 시합의 특성은 일단 내기에 들어가면 결과의 결정과 청산의 짧은 시간 안에 모두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내기 한 판이 벌어지는 동안 단일한 인식의 초점에 대한 집중력이 최고조로 유지된다.
동전 던지기는 동전 앞면과 뒷면이 나올 확률을 50 대 50으로 셈할 선험적·경험적 근거가 있다. 누가 동전을 던지는가는 따질 필요가 없다. 그 점이 동전 던지기의 좋은 점이다. 그러나 일상에서는 발생할 결과를 완벽하게 규정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할 때가 많다(예컨대, 두 소년이 여러 갈래로 길이 나 있는 깊은 동굴 앞에 서서 무슨 일이 생기나 보려고 동굴 속을 탐험해볼지 말지 결정해야 하는 경우가 그렇다). 모든 가능한 결과를 알고 있다 하더라도 각 결과에 결부된 운수란 실제 체험했을 때 느낄 법한 막연한 매력을 근거로 대충 추정하는 것일 뿐이다. 게다가 결과를 추정하는 사람도 자기 판단이 얼마나 엉성한지는 잘 모른다. 대부분 삶의 상황에서 우리는 주관적 활률, 기껏해야 매우 느슨한 전반적 추정치인 주관적 기대 효용성을 가늠할 뿐이다.
죽은 시간은 사후영향이 없다. 토막 나고 단절된 시간이다. 나머지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달리 말하면, 개인 삶의 경로는 그런 죽은 순간들에 좌우되지 않는다. 개인 삶은 그처럼 죽은 시간들에 휘둘리지 않도록 구성된다.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 하는 활동은 개인을 구속하거나 발목을 잡지 않는다.
시간 죽이기에 들어간 사람은 흔히 문젯거리(problematic - 아직 결정 나지 않았지만 곧 결정될 무엇. 즉, 미리 계획되거나 결정된 것이 아니라 상황에서 즉각 선택하고 결정하는 문제를 뜻한다.)활동을 하게 된다. 잡지나 TV를 보겠다는 결정은 자리에 앉은 후에 한다. 사후영향이 없는 문젯거리 활동이다(흥미롭게도 이는 동전 던지기 사례와 똑같다. 우리의 어린 도박꾼들은 동전 던지기 내기의 승리에 주관적으로 큰 가치를 두겠지만 사후영향은 있을 리 없다).
운명을 구성하는 기본 토대
- 우발적 또는 문학적 의미의 운명이 있다. 평소에 잘 관리하고 주의하지 않은 일이 뒤늦게 운명적 순간이었던 것으로 드러날 때가 있다.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 사건이 뒤이어 벌어진 사건과 얽히면서 원인으로 작용했음이 드러나는 경우다.
- 사후영향이 없는 단절된 순간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사후영향이 있는 임무를 아무리 안전하게 잘 관리한다 하더라도 개인이 그 순간을 자신의 소유로 온전히 누리려면 반드시 그 자리에 몸으로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몸은 그간 받았던 온갖 상처와 더불어 살아야 하고 가는 곳마다 지니고 다녀야 하는 자아와 일체를 이루는 몸이다. 아무리 조심스럽게 행동하더라도 몸은 얼마쯤은 늘 위험에 처하기 마련이다.
- 인간 조건은 타인이 함께 있음(co-presence)을 의식해야 한다는 점이다. 사회적 상황은 두 사람 이상이 신체적으로 함께 있는 동안 상호 감시가 가능한 환경으로 (일차적으로) 정의할 수 있고 상호 감시가 이루어질 수 있는 영역 전체를 포괄한다. 개인의 활동은 말 그대로 사회적 상황에서 또는 혼자일 때 하는 것이다.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순간은 사후영향을 미치는 문젯거리가 없는 순간이라 규정했다. 그런 순간은 무미건조하다.(그런 순간에 불안을 느낀다면 그것은 나중에 사건이 벌어질까봐 불안한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위험과 기회-흔히 위험을 무릅써야만 생기는 기회-를 동반하는 실용적 도박을 자진해서 포기하고 무미건조한 상태에서 편안함을 느끼려 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 하나는 안전성이다.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상황에서는 행동궤도를 확실히 관리할 수 있고 목표를 점진적으로 그리고 예상대로 실현할 수 있다. 그렇게 자기관리를 잘하는 사람이라야 다른 사람들의 기획에도 무리 없이 효과적으로 통합될 수 있다. 삶의 불확실성이 적은 사람일수록 사회는 그를 더 잘 활용할 수 있다. 그러니 개인은 운명적 사건 발성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현실주의적 노력을 기울이며 격려도 받는다. 위험에 대처하는(coping) 것이다.
위험에 대처하는 기본기 중 하나는 몸조심이다. 개인은 행여 부상당할 위험성이 있을까 조심한다.
진지한 업무를 할 때와 마찬가지로 빈둥거릴 때도 몸조심은 의무에 속한다. 약간의 몸조심은 언제나 해야 하는, 인간존재의 항구적 조건이다. 그래서 어느 사회에서나 부모가 자식을 염려하여 당부하는 말은 '몸조심'하라는 것과 피할 수 있는 운명적인 사건에 쓸데없이 끼어
사건 발생을 통제하는 또 다른 수단이자 몸조심만큼이나 많이 강조되는 것은 준비성이다. 이는 장기적 결과를 이루기 위해 아주 조금씩 쌓아가는 행동으로 나타나는 장기목표 지향성이다.
중요한 것은 어느 하루 노력을 생략해도 전체 결과에는 영향이 없다는 점이다. 여기에 삶에 대한 칼뱅(Cal-vin)식 해결책 있다. 일단 하루 일과를 아무런 소득도 없는 일과 조금씩이라도 결과에 보탬이 될 일로 분리해두면 정말로 잘못될 일은 없다는 것.
은명적인 사건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또 하나의 모범적 수단은 다양한 형태의 보험이다. 곤경이 닥칠 경우 치러야 할 비용을 삶의 경로 전체에 골고루 분산시켜 '큰 손실을 작은 고정비용으로 바꾸는 것'이다.
예의범절 체계 역시 원치 않은 운명적 사건, 이를테면, 본의 아니게 상대를 모욕하는 무례를 저질렀을 때를 대비한 보험의 형태로 볼 수 있다. 예의범절 체계는 특히 대면 상호작용을 안전하게 관리할 수 있는 통제수단이다.
위험을 줄일 수단이 있고 그 수단에 의지하면 불안을 야기하는 새로운 조건, 새로운 근거가 생긴다는 점에 주목하자. 별 탈 없으리라 여기고 있는데 뜻밖의 사건이 일어나고 사건의 여파가 그 순간을 넘어서서 이후 개인의 삶을 훼손하게 되면 개인은 이중으로 손실을 입는다. 문제가 된 최초의 손실에다 자기 스스로에게나 남들 눈에나 자신이 위험을 최소화하고 후회할 일은 피하는 이성적 통제력, 즉 '조심성'이 없는 사람으로 비쳐 손실을 보태는 셈이다.
항시 운명적 상황과 마주치는 사람, 예를 들어 전문 도박사나 최전방의 병사가 삶에 적응하는 방식을 세밀하게 관찰해보면 특이하게도 그들은 결과에 대한 경각심이 아주 무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도박을 거는 세상도 결국은 하나의 세상이며, 운을 거는 사람은 그 세상을 어떻게 해쳐 나갈지를 배운다. 도박자는 자기가 이전에 세상과 맺은 관계는 평가절하하고 남들이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세상을 운이 걸린 관계로 받아들임으로써 부침을 거듭하는 자신의 처지에 적응한다. 관점은 상황을 정상화하는 경향이 있다. 상황조건을 완전히 받아들이면 삶이 그런 조건들로 구성될 수 있다. 또 밑에서 위를 올려다보면 추락이 아니라 상승이 일시적인 것으로 보일 것이다.
마이클 발린트(Michael Balint)는 이 같은 안전한 공포감이 주는 짜릿한 흥분을 명쾌하게 묘사한 바 있다.
이런 종류의 재미와 즐거움에서 볼 수 있는 세 가지 특징적인 태도는 (a) 약간의 두려움 또는 최소한 실재하는 외적 위험에 대한 인식, (b) 위험과 두려움에 자발적·의도적으로 자신을 던지기, (c) 위험을 참아내고 정복할 수 있으리라, 위험은 지나갈 것이고 다치지 않은 채 무사히 돌아올 수 있으리라 하는 희망 섞인 자신감이다. 외적 위험에 맞닥뜨릴 때 느끼는 두려움, 재미, 희망 섞인 자신감의 혼합물이 바로 짜릿한 흥분을 구성하는 근본 요소다.
직접 참여를 유도하는 상업화된 행동의 마지막 유형은 내가 '환상의 제조(fancy milling)'라고 부르는 것이다. 미국 사회의 성인들은 고급 제품을 소비함으로써, 돈이 많이 들고 유행하는 오락을 즐김으로써, 화려한 장소에서 시간을 보내고 명사들과 어울림으로써 사회적 신분 이동을 맛볼 수 있다. 이 모두를 동시에 또 보는 사람이 많을 때 하면 신분 이동의 감각을 한층 더 즐길 수 있다. 이런 것이 소비를 과시하는 행동이다. 또한 자기과시적인 사람들이 꽉 들어찬 대규모 모임 자리는 단지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군중이 자아내는 흥분을 확산시킨다. 그뿐만 아니라 다음에는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게 하는 불확실성을 초래한다. 진정한 관계로 이어질 연애놀이도 가능하고 군중 가운데 진짜배기 행동을 실행하는 누군가에게 떠밀리는 생기에 넘치는 경험을 할 수도 있다.
운명적인 사건의 처리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성격 형태
- 우선, 다양한 형태의 용기(courage)가 있다. 곧 닥칠 위험을 내다보면서도 행동을 불사하는 능력이다. 용기는 위험의 성격에 따라, 즉 신체적 위험인지, 금전적 위험인지, 사회적·정신적 위험인지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 불굴의 투지(gameness)는 좌절감, 고통, 피로에 지쳐도 굽히지 않고 계속 혼신의 힘을 다하는 자질이다. 맹목적이고 무감각해서가 아니라 의지와 결단력이 있어서 불굴의 투지를 발휘하는 것이다.
- 사회 조직의 관점에서 핵심적 성격 특성은 성실성(integrity)이다. 상당한 이득이 걸려 있고 순간적으로 도덕적 기준을 벗어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유혹을 뿌리치는 성향을 가리킨다. 다른 사람이 보지 않는 상황에서 운명적 활동을 할 때는 성실성이 특히 중요하다. 사회마다 훌륭하다고 인정하는 성격의 종류는 상당히 다르지만 성실성을 인정하지 않고 육성하지 않는 사회는 오래 존속할 수 없다.
- 정정당당함(gallantry)이란 형식 자체가 내용을 좌우하는 것일 때 그 예절 형식을 지킬 수 있는 자질을 가리킨다.
- 운명적 사건의 관리와 관련된 성격 가운데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자제력, 냉정함, 차분함을 가리키는 침착성이다. 침착성은 기본 자질을 발휘하는 데 직접 영향을 미침은 물론이고 침착성 자체만으로도 평판의 근거가 되는 까닭에 이중으로 사후영향이 있다.
침착성에는 행동의 차원이 있다. 운명적 상황에서 주변과 조화를 이루며 부드럽게 절제된 방식으로 신체적 기량(작은 근육의 통제가 특징적인)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다.
침착성에는 또한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요구되는 자기감정의 통제라는 정서적 차원도 있다. 실제로 정서적 차원은 대화와 몸짓에 사용되는 신체기관의 통제와 관련이 있다.
또한 침착성에는 품위라는 신체적 차원도 있다. 치러야 할 대가, 난관, 엄청난 압력이 있음에도 자세를 단정하게 유지하는 능력을 말한다.
침착성의 마지막 차원은 무대 위에서의 자신감이다. 대규모 관중 앞에서 당황스러움, 창피함, 두려움, 자의식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위험과 기회에 맞설 수 있는 자질을 가리킨다.
사람들의 본성에 대한 민간의 믿음
- 성격 특성은 기본 자질과는 달리 단 한 번의 표현으로 확정되는 경향이 있다. 성격 특성은 중대한 사건을 미처 피하지 못한 드문 경우에 나타나는 것이기에 즉각 뒷받침할 근거를 보태거나 수정할 수가 없다. 부득이 하나의 표본에 기댈 수밖에 없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성격 특성이란 예외를 허용치 않는 이미지에 속한다는 점이다. 개인이 가장 벗어나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순간에 자기가 한결같은 성격의 소유자임을 보여줄 결정적 기회가 찾아온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한결같음이 사실상 성격의 전부다.
- 일단 강한 성격이 입증되고 나면 당장은 성격을 재구성할 필요가 없다. 적어도 그 순간에는 행위자가 자기 성격을 지킬 수 있다.
- 어떤 식으로든 한번 성격 표현에 실패하면 개인은 그 이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자포자기에 빠진다는 믿음도 있다. 자기에게는 철저히 지켜야 할 의지가 있고 의지를 지키지 못하면 완전히 무너진다는 믿음에 사로잡힌 병사는 적군의 심문에 무언가를 한번 누설하고 나면 자기가 알고 있는 기밀을 전부 털어놓는 경향이 있다.
사소한 언행이 심각한 대결이나 결전을 자초할 수 있다. 결판을 내는 동작을 하나 구체적으로 들어보다. 일어서서 다른 사람들이 모두 보는 자리로 걸어가 공개적으로 행동을 촉구하는 몸짓이다. 성인들의 권위에 도전한다는 뜻을 효과적으로 전하는 '비행청소년의 걸음걸이'라는 것이 있다. 그런 걸음걸이로 자기네가 먼저 움직였다는 뜻은 물론이고 자기네가 겨냥했고 또 겨냥하는 상대가 맞서기를 피했다는 뜻도 동시에 드러낸다. 투우장에서 투우사가 으스대며 걷는 산둥가(Sandunga)라는 걸음걸이도 표현양식의 일종이다.
인간에 대한 전통적인 사회학의 관점은 낙관적이다. 사회적으로 규정된 목표를 '이기심'에 사로잡혀 탐하는 짐승 같은 인간을 보면, 그를 붙잡고 면밀하게 구성된 기본원칙에 따라 욕망을 절제하라고 설득하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다(나는 중요한 규칙으로 '상황적 속성', 즉 당면한 상황에서 개인이 보여주어야 할 품행유지 규준을 보태고 싶다). 따라서 개인이 일으키는 문제는 주로 합당한 욕망을 습득하지 못하거나 욕망을 충족하는 과정에서 지켜야 할 규칙을 일부러 어기는 탓에 생긴다.
안전하지만 순간에 충실하지 못한 삶에 대한 일종의 양가감정도 있다. 성격에는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면도 있지만 쉽게 표현할 수도 안전하게 획득할 수도 없는 면 또한 있다. 신중하고 빈틈없는 사람들은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성격을 드러낼 기회를 단념해야 한다. 개인을 운명적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장치는 또한 그 자신에 관한 새로운 정보, 중요한 표현을 가로막는 장치이기도 하다. 그 결과, 신중한 사람은 사회가 높이 평가하는 어떤 가치, 바로 자기가 바람직한 사람임을 표현할 수 있는 어떤 가치를 실현할 길이 없다.
그래서 실용적 도박을 찾거나 아니면 적어도 일상사에서 무언가 일을 벌인다. 정상을 벗어난, 피할 수도 있는, 극적인 위험과 기회로 가득 찬 일들이 바로 행동이다. 운명적 성격이 강할수록 행동은 더 위험해진다.
운명적 상황은 개인에게 아주 특별한 시간을 선사하고, 위험한 행동이 그 개인에게 특별한 시간을 체험하게 해준다. 개인은 운명적 상황에 자신을 던질 각오를 해야 하고 또 그렇게 한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개인이 자신을 던지게 만드는 상황에서는 문젯거리이며 사후영향이 있는 일들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개인의 주관적 경험이 유지되는 동안 개인이 상황에 대처한 결과가 나오고 보상도 얻어야 한다. 자기가 통제할 수 없는, 째깍째깍 흘러가는 몇 분 몇 초의 시간과 맞서야 한다. 짧은 시간 안에 결판이 나는 불확실한 결과에다 자신을 던져야 한다. 그리고 적당한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피할 수 없을 때는 개인은 자신을 운명에 맡겨야 한다. '도박'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위험한 행동은, 대개 영웅주의에 결부된 기회를 몽땅 상실할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서도, 영웅적 품행과 비슷한 도덕적 이점을 어느 정도 누릴 수 있는 수단이다. 그러나 위험한 행동에는 또 상당한 대가가 따른다. 개인이 대가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은 삶의 한 영역에서 운명적인 것으로 보이는 행동에 참여한 대가를 나머지 삶에서 치르도록 정교하게 계산해놓은 상업화된 영역에 참여하는 것이다. 소액의 요금만 치러도 되고 의자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고 집을 나서기만 하면 된다.
성격은 유지하되 비용은 줄이고 싶은 사람들에게 사회가 제공하는 또다른 해결책이 있다. 대중매체를 통해 대리체험을 제조하고 배포하는 것이다.
상업화된 대리체험의 내용을 검토해보면 놀라울 만큼 획일적이다. 실용적 도박, 성격 겨루기, 위험한 행동이 묘사된다. 운명을 건 행동을 벌이는 사람의 속임수, 일대기, 그럴듯한 관점도 보여준다. 그러나 언제나 똑같은 흘러가버린 행동 목록을 생중계하듯 내보낸다. 다양한 종류의 운명적 사건에 연루된 허구의 인물이나 실제 인물과 우리르 동일시하고 대리체험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기회가 사방에 널려 있다.
삶에서 이미 제거된 성분인 갖가지 형태의 운명적 사건들이 왜 그토록 인기가 있을까? 앞서 지적한 것처럼, 소비자는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면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흥분을 얻을 수 있다. 이 동일시 과정을 촉진하는 요소는 두 가지다. 첫째, 운명을 건 행동은 말 그대로 완벽하고 효과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연기자를 자기의 대리인처럼 느끼게 만든다. 한 인물이 의사결정자도 되고, 집행자도 되고, 조직의 관련자도 된다. 실제 인물이든 허구의 인물이든 한 인물과의 동일시가 집단, 도시, 사회운동 또는 트랙터 공장과의 동일시보다 쉽다. 적어도 부르주아 문화에서는 그렇다. 둘째, 운명적 사건은 전모를 다 볼 수 있을 만큼 작은 시공간에서 시도되고 실현된다는 점이다. 자본주의의 발흥이라든지 제 2차 세계대전의 발발 같은 현상과는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전 과정을 묘사하니 한자리에 앉아서 볼 수 있다. 다른 사건들과는 달리 본질적으로 묘사와 관람에 적합하다.
우리가 운명적 사건을 대리소비 하는 이유가 무엇이든 거기에는 분명 사회적 기능이 있다. 우리가 현실세계에서 시선을 도릴 때마다 우리 모두가 안전하게 동일시할 수 있는 명예로운 인물과 그들이 벌이는 운명적 사건들을 볼 수 있다. 이런 동일시를 통해, 일상생활에서 온전히 지키려면 대가가 너무 크고 위험한 운명적 활동의 품행 코드가 명료해지고 재확인된다. 아무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일상의 행동을 판단할 수 있는 준거틀이 보장되는 것이다.
인물과의 동일시는 위험한 과제·성격 겨루기·위험한 행동, 이 세가지 운명적 활동에서 매우 흔하게 일어난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세 가지가 본질적 관련성이 있다고 믿기 쉽다. 성격 때문에 운명적 행동에 말려든 사람은 나머지 두 가지 활동에도 참여해야 하고 또 그런 삶을 바람직하게 여기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형태야 어떻든 모든 운명적 사건에 나오는 영웅의 친화력은 그 영웅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운명에 대리참여 하는 우리들에게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보지 못한다. 우리는 욕구 충족을 위해 그런 낭만적인 인물들을 만들어내고 키운다. 우리에게는 같은 값에 될 수 있는 한 많은 성격들과 대리접촉 하려는 필요의 경제가 있다. 그 모든 운명적 활동을 추구하는 인물로 우리가 오인한 살아 있는 개인이란 소비자의 일괄 구매품에 살과피를 덧붙인 것에 불과하다.
행동이 있는 곳으로 갈 때 사람들은 대게 운이 정해진 곳이 아니라 운을 걸어야 이득을 볼 가능성이 높은 곳으로 간다. 실제로 행동이 벌어진다면 자기가 아니라 자기와 같은 부류에 속하는 누군가 다른 사람이 행동에 참여하는 것이 좋다. 그렇다면 가야 할 곳은 다른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대리체험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by 月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