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면 행동에 관한 에세이. 상호작용의례.



우리가 삶에서 상투적으로 겪는 상호작용 과정을 사전처럼 또박또박 정의한 책이다.
처음엔 뭐 이런 걸 책으로 다 썼나 싶었지만 읽을수록 흥미로운 내용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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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사회적 가치가 드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자기가 지켜오던 노선에 통합되지 못하는 사람을 일러 체면이 망가진(be in wrong face) 사람이라 한다. 상황에 적절한 노선을 갖추지 못한 채 사람들과 만나는 자리에 나타나는 사람을 가리켜 체면 없는(be out of face) 사람이라 한다. 다른 참여자들이 장난조로 당사자에게 눈치를 주기도 한다. 물론 당사자가 스스로 상황 파악을 못했음을 알아차리는 심각한 상황도 있다.

회피절차(avoidance process) 체면에 위협이 될 상황을 막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위협을 될 법한 접촉을 피하는 것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서로를 피하는 관계, 중재자가 중간에서 새심하게 역할을 해야 하는 관계까 있음을 목격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사회 성원들도 체면 유지에 위협이 될 만한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우아하게 한발 물러서는 게 좋다는 사실을 안다.

체면 손상의 위험을 감지하여 취하는 일련의 언행과 의례 균형의 복원 과정을 나는 주고받기(Interchange)라고 부르기로 한다. 행위자가 행동 수순으로서 상대에게 전하는 모든 것을 메시지 또는 조치라고 정의하면 주고받기는 두 사람 이상, 두 가지 이상의 조치로 이루어진다. "실례합니다(Excuse me)"라는 말에 "그러세요(Certainly)"라 대답하기, 선물이나 방문 주고받기가 아마도 미국 사회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명백한 보기일 것이다.

네 가지 고전적 형태의 주고받기

  • 도전(challenge) : 도전은 그릇된 행실에 주의를 일깨우려 참여자들이 책임을 떠맡는 조치다.
  • 제안(offering) : 물의를 일으킨 당사자에게 무례를 만회하고 표현적 질서를 복원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 수용 : 제안을 받은 이들이 표현적 질서와 그 질서로 지탱되는 체면을 살리는 만족스러운 수단으로 제안을 수용하는 것이다.
  • 감사 : 용서받은 자가 자기를 너그럽게 용서해준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는 신호를 보냄으로써 끝이 난다.
너무 감수성이 둔하고, 눈치도 없고, 긍지가 부족하고,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은 상호작용에서 신뢰할 만한 사람이 못된다. 자기 체면도 지키지 못하고 당황해 하는 다른 이들에 체면 또한 지켜주지 못하는 사람은 실제로 사회에 위협이 된다. 그런 사람은 방자하게 굴 테고 다른 사람들도 이에 속수무책일 것이다. 지나치게 예민하거나 너무 긍지가 강한 사람도 다른 이들에게는 어린아이 어르듯 조심조심 다루어야 할 대상이다. 재치가 넘치거나 배려가 지나친 사람은 너무 사교적이라서 실제로 사람됨이 어떤지, 장기적으로 어떻게 대해야 할 사람인지 모르겠다는 느낌을 준다.

회피의례는 말 그대로 행위자가 존대를 받는 이와 알맞은 거리를 지켜 짐멜(Simmel)이 '이상적인 영역'이라 부른 선을 넘지 않도록 조심하는 존대 형태다.

인류학과 사회학에서 가장 흔히 드는 예가 다른 사람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 거리존중 의례다.

영국에서는 중간 계급이 사는 도심 지역에서 하위 계급이 사는 농촌 지역으로 갈수록 좌석 사이의 간격이 좁아진다. 변방의 섬 셰틀랜드에서는 식사자리에서나 그 비슷한 사교모임에서 서로 몸이 닿더라도 침범으로 여기지 않으며 사과를 할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참여자들의 서열과 상관없이 행위자는 상대가 당연히 불가침을 보장받으려는 기대를 하고 있음을 느낀다.

행위자가 상대의 일상 영역에 예사롭게 드나들고 사생활을 침범할까봐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사이라면 친숙한 관계라고 말한다. 행위자가 상대에게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모습을 보면 어색한 관계 또는 정중한 관계라고 말한다. 두 개인 사이의 품행을 규정하는 규칙은 친숙한 관계인지 정중한 관계인지에 따라 대칭적일 수도 있고 비대칭적일 수도 있다.

연출의례라고 이름 붙인 두 번째 유형은 존대를 하는 쪽에서 상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앞으로 닥칠 상호작용에서 상대를 어떻게 대우할지 상대에게 입증해 보이는 행동을 모두 포함한다. 연출의례에서는 의례관행과 관련된 규칙이 금지가 아니라 처방의 성격을 띤다. 회피의례는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규정하는 반면 연출의례는 해야 할 바를 규정한다.

처신은 남들이 보는 자리에서 개인이 품행, 옷차림, 태도를 통해 자신이 바람직한 자질을 지닌 사람인지 아닌지를 나타내주는 의례적 행동의 요소를 가리킨다. 미국 사회에서 '좋은'또는 '올바른' 처신이란 결단력과 진정성, 겸손함, 스포츠맨 정신, 말과 행동의 단호함, 자기의 감정·입맛·욕망에 대한 자제력, 압박감에 시달리면서도 침착성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 따위를 가리킨다.

개인이 자신이 지닌 특정한 부분만을 치장하여 자아상을 완성하려면 남들에게 의존해야 한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하다. 각자 자신의 이미지는 처신으로, 타인의 이미지는 존대로 표현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래서 사람됨이 완전히 드러나려면 각자가 서로 존대와 처신을 주고 받는 의례 사슬에서 손을 잡고 있어야 한다. 개인에게 고유한 자아가 있음은 사실이겠지만 그 고유한 자아라는 것도 순전히 의례적 협동작업의 결과다. 처신을 통해 표현한 부분이 그를 대하는 남들의 존대 행동으로 표현된 부분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은 것이다.

사람은 극심한 제약을 받으면 반사적으로 정상 영역을 벗어날 수밖에 없다. 관습적 의례를 행할 때 쓰이는 기호나 물리적 수단을 이용할 수 없는 탓이다. 남들이 혹 그에게 의례적 존중을 보여준다 해도 그는 답례를 할 수도 없고 존중받을 만한 사람다운 언행을 할 수도 없다. 가능한 것은 의례적으로 부적절한 말뿐이다.

보통 일상의 중요한 상황에서 당황하는 경우는 서로 다른 맥락에서 투사된 자아들이 충돌할 때 생긴다. 다른 상황맥락에서는 타당한 자아가 당장의 상황맥락에서 투사된 자아와는 어긋나 일관된 자아를 유지할 수 없는 경우가 그렇다. 따라서 당혹감은 우리를 '역할 분리(role segregation)'로 유도한다. 누구에게나 여러 역할이 있지만 대게는 '청중 분리(audience segregation)' 덕분에 역할 딜레마에서 벗어난다. 보통 어떤 한 역할을 할 때의 청중은 다른 역할을 할 때의 청중이 아니라서 개인은 그 어느 쪽도 해치지 않은 채 역할마다 각기 다른 사람이 되어 자신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화제에 자연스럽게 상호몰입 하는 상태를 기준으로 삼으면, 우리는 화제로부터 소외되는 경우가 참으로 흔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상호 몰입은 일반적인 기준에서 보면 결함도 많고 부패하기도 쉬운 허약한 상태, 언제라도 개인을 소외시킬 수 있는 위태롭고 불안정한 상태다. 여기서는 의무적인 몰임을 다루고 있는 만큼 소외는 '몰입불량(misinvolvement)'이라 할 수 있는 부정행위에 속한다. 몰입불량에서 비롯된 몇 가지 전형적인 소외 형태를 살펴보자.
1. 딴생각(External Preoccupation) : 개인은 정해진 관심의 초점에 집중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나누는 이야기나 다른 참여자들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일에 사로잡힐 수 있다.
2. 자의식(Self-consciousness) : 정해진 관심의 초점에 집중하는 대신 개인이 자기가 잘하고 있는지 잘 못하고 있는지, 남들에게서 바람직한 반응을 얻는지 그렇지 않은지, 지나칠 만큼 자기 자신에게 신경을 쓸 때가 있다. 개인적 자의식은 우연히 자기가 소재가 된 대화의 내용에 몰입한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대화의 내용에 스스럼없이 몰입해야 할 순간에 상호작용자로서의 자기 모습에 주의를 기울인 결과다.
3. 상호작용에 대한 의식(Interaction-consciousness) : 대화 참여자는 공식 대화 내용에 자연스럽게 몰입하지 못하고 상호작용의 진행이 미진하다는 점에 신경이 쓰일 수 있다. 자의식의 경우만큼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므로 그런 상태가 어디에서 비롯하는지 그 몇 가지 원천의 실례를 들어보자.
상호 작용을 의식하게 되는 흔한 경우 중 하나는 개인의 남다른 책임감에서 비롯한다. 상호 작용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도록,'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적절하게 몰입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감이다.
4. 타인에 대한 의식(Other-consciousness) : 상호작용 중에 다른 참여자에게 신경이 쓰여 산만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개인은 자의식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대화에 집중하지 못한다.
타인에 대한 의식을 유발하는 한 가지 흥미로운 원천은 '과잉몰입'이다. 어떤 대화에서든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 개인이 대화에 얼마나 심취해도 좋은지, 적정 몰입 수준을 규정하는 기준이 설정된다. 자기에게 허용된 정도 이상으로 감정에 휩쓸리거나 행동의 자제력을 잃지는 말아야 한다. 물론 사회적으로 인정된 그 자리의 중요성과 개인이 맡은 역할에 따라 달라지긴 하지만 개인은 어느 정도 몰입을 유보할 감정적 여유가 있어야 한다. 개인이 화제에 지나치게 몰입해서 자기의 감정이나 행동을 스스로 절제하지 못한다는 인상을 다른 이들에게 주게 되면, 다시 말해 그 사람이 그 순간의 상호작용 세계를 너무 현실적으로 받아들이면, 다른 이들은 나누던 화제에 몰입하지 못하고 그 사람 자체에 주목하기 십상이다. 한 사람의 지나친 열정은 다른 이들을 소외시킨다. 어떤 경우든 개인이 지나치게 몰입하면 일시적으로 상호작용자로서의 기능을 상실한다.

소규모 분석으로 정평이 나 있는 프로이트학파는 이제 증상이라고 불리는 특정한 위반 행동을 위반자의 의사소통 체계와 방어기제, 특히 어린아이 단계로의 퇴행으로 읽고 해석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심리학적·전문적 관점의 승리에는 사회적으로 부적절한 행동이 심리학적으로 정상이며(건강하지 못한 결혼관계를 끝낼 수 있을 만큼 강해졌음을 보여주는 사람의 경우처럼) 사회적으로 적절한 행동이 사실은 병적일 수 있다(일부 실험연구자들이 발견한 강박증과 성욕감퇴 증상 따위)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 다. 한마디로 말해, 드러난 증상이란 정신과 의사에게 탐색을 시작해도 좋다는 허가증 같은 것이다.

대면 상황의 품행규칙은 특정 공동체에서 서로 융화되는 모습을 연출하여 일종의 제왕의 평화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참여자들은 관행적 상투어로 서로에 대한 존중을 표현하고, 각자 분수를 지키며, 서로가 관계에 성실하고 말과 몸의 교류를 허용하되 남용하지는 말아야 하고, 사교 자리를 존중해야 한다. 이런 규칙들의 위반이 상황적 부적합성이다. 위반은 대개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의 권리를 훼손하고 또 공개적인 사실로 알려진다. 위반의 동기가 그 자리에 있는 어떤 인물이나 또는 그 자리에 없는 사람과의 특별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부적합성은 일차적으로 대인 의사소통에 사용하는 언어 형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적 품행에 있다. 품행의 결함이 정보 전달이나 관계 맺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면 상황에서 지켜야 할 예의나 처신에 있다는 뜻이다.

"줄 위에 오르는 것이 삶이다. 그 나머지는 기다리는 시간일 뿐이다." - 탤컷 파슨스(Talcott Parsons)

동전 던지기의 결정적 특성은 그 단계적 성격에 있다. 내기를 하는 소년들은 동전 던지기의 조건에 합의해야 한다. 몸을 나란히 하고 서서, 한 번에 동전을 몇 개나 걸지 또 누가 동전의 어떤 면을 택할지 결정해야 한다. 내기에 자신을 던질 자세와 몸짓을 갖추어서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넘어서야 한다. 이것이 내기를 거는 단계 또는 겨룸을 준비하는 단계(squaring off phase)다. 다음은 인과적 힘이 실제로 작용하여 결과를 생산하는 결정 단계(determination phase)다. 이어서 결과가 드러나는 노출단계(disclosive phase)가 뒤따른다. 이 단계의 지속시간은 내기 참여자들이 선 자리와 결정 도구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대개 아주 짧고, 특별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마지막은 청산단계(settlement phase)로, 결과가 드러난 후 진 사람이 내기에 건 돈을 내놓고 이긴 사람은 돈을 거둬들인다.
준비, 결정, 노출, 청산의 네 단계를 거치는 내기가 한 판(span)이고, 한 판과 다음 판 사이에는 휴식시간을 갖는다. 내기 한 판에 걸리는 시간과 한자리에서 몇 판을 할지를 결정하여 내기를 계속하는 동안을 가리키는 내기지속시간(session)은 구별해야 한다. 정해진 단위시간 동안 완료된 내기의 수가 내기의 비율이다. 평균 내기지속시간에 따라 내기 비율의 상한선이 정해진다.

게임과 시합의 특성은 일단 내기에 들어가면 결과의 결정과 청산의 짧은 시간 안에 모두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내기 한 판이 벌어지는 동안 단일한 인식의 초점에 대한 집중력이 최고조로 유지된다.

동전 던지기는 동전 앞면과 뒷면이 나올 확률을 50 대 50으로 셈할 선험적·경험적 근거가 있다. 누가 동전을 던지는가는 따질 필요가 없다. 그 점이 동전 던지기의 좋은 점이다. 그러나 일상에서는 발생할 결과를 완벽하게 규정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할 때가 많다(예컨대, 두 소년이 여러 갈래로 길이 나 있는 깊은 동굴 앞에 서서 무슨 일이 생기나 보려고 동굴 속을 탐험해볼지 말지 결정해야 하는 경우가 그렇다). 모든 가능한 결과를 알고 있다 하더라도 각 결과에 결부된 운수란 실제 체험했을 때 느낄 법한 막연한 매력을 근거로 대충 추정하는 것일 뿐이다. 게다가 결과를 추정하는 사람도 자기 판단이 얼마나 엉성한지는 잘 모른다. 대부분 삶의 상황에서 우리는 주관적 활률, 기껏해야 매우 느슨한 전반적 추정치인 주관적 기대 효용성을 가늠할 뿐이다.

죽은 시간은 사후영향이 없다. 토막 나고 단절된 시간이다. 나머지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달리 말하면, 개인 삶의 경로는 그런 죽은 순간들에 좌우되지 않는다. 개인 삶은 그처럼 죽은 시간들에 휘둘리지 않도록 구성된다.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 하는 활동은 개인을 구속하거나 발목을 잡지 않는다.
시간 죽이기에 들어간 사람은 흔히 문젯거리(problematic - 아직 결정 나지 않았지만 곧 결정될 무엇. 즉, 미리 계획되거나 결정된 것이 아니라 상황에서 즉각 선택하고 결정하는 문제를 뜻한다.)활동을 하게 된다. 잡지나 TV를 보겠다는 결정은 자리에 앉은 후에 한다. 사후영향이 없는 문젯거리 활동이다(흥미롭게도 이는 동전 던지기 사례와 똑같다. 우리의 어린 도박꾼들은 동전 던지기 내기의 승리에 주관적으로 큰 가치를 두겠지만 사후영향은 있을 리 없다).

운명을 구성하는 기본 토대

  1. 우발적 또는 문학적 의미의 운명이 있다. 평소에 잘 관리하고 주의하지 않은 일이 뒤늦게 운명적 순간이었던 것으로 드러날 때가 있다.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 사건이 뒤이어 벌어진 사건과 얽히면서 원인으로 작용했음이 드러나는 경우다.
  2. 사후영향이 없는 단절된 순간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사후영향이 있는 임무를 아무리 안전하게 잘 관리한다 하더라도 개인이 그 순간을 자신의 소유로 온전히 누리려면 반드시 그 자리에 몸으로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몸은 그간 받았던 온갖 상처와 더불어 살아야 하고 가는 곳마다 지니고 다녀야 하는 자아와 일체를 이루는 몸이다. 아무리 조심스럽게 행동하더라도 몸은 얼마쯤은 늘 위험에 처하기 마련이다.
  3. 인간 조건은 타인이 함께 있음(co-presence)을 의식해야 한다는 점이다. 사회적 상황은 두 사람 이상이 신체적으로 함께 있는 동안 상호 감시가 가능한 환경으로 (일차적으로) 정의할 수 있고 상호 감시가 이루어질 수 있는 영역 전체를 포괄한다. 개인의 활동은 말 그대로 사회적 상황에서 또는 혼자일 때 하는 것이다.
인격적 성장이란 설사 제 주변 세계를 즉각 파괴할 만한 능력이 생기더라도 자진해서 포기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보통은 학습이 너무 잘 이루어진 나머지 일상 삶에서 체계적인 포기가 다반사라는 사실, 개인이 점잖게 굴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아수라장과 같은 상황에서 비롯한다는 사실을 사회적 삶을 탐구하는 연구자는 잘 보지 못한다.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순간은 사후영향을 미치는 문젯거리가 없는 순간이라 규정했다. 그런 순간은 무미건조하다.(그런 순간에 불안을 느낀다면 그것은 나중에 사건이 벌어질까봐 불안한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위험과 기회-흔히 위험을 무릅써야만 생기는 기회-를 동반하는 실용적 도박을 자진해서 포기하고 무미건조한 상태에서 편안함을 느끼려 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 하나는 안전성이다.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상황에서는 행동궤도를 확실히 관리할 수 있고 목표를 점진적으로 그리고 예상대로 실현할 수 있다. 그렇게 자기관리를 잘하는 사람이라야 다른 사람들의 기획에도 무리 없이 효과적으로 통합될 수 있다. 삶의 불확실성이 적은 사람일수록 사회는 그를 더 잘 활용할 수 있다. 그러니 개인은 운명적 사건 발성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현실주의적 노력을 기울이며 격려도 받는다. 위험에 대처하는(coping) 것이다.

위험에 대처하는 기본기 중 하나는 몸조심이다. 개인은 행여 부상당할 위험성이 있을까 조심한다.
진지한 업무를 할 때와 마찬가지로 빈둥거릴 때도 몸조심은 의무에 속한다. 약간의 몸조심은 언제나 해야 하는, 인간존재의 항구적 조건이다. 그래서 어느 사회에서나 부모가 자식을 염려하여 당부하는 말은 '몸조심'하라는 것과 피할 수 있는 운명적인 사건에 쓸데없이 끼어
사건 발생을 통제하는 또 다른 수단이자 몸조심만큼이나 많이 강조되는 것은 준비성이다. 이는 장기적 결과를 이루기 위해 아주 조금씩 쌓아가는 행동으로 나타나는 장기목표 지향성이다.
중요한 것은 어느 하루 노력을 생략해도 전체 결과에는 영향이 없다는 점이다. 여기에 삶에 대한 칼뱅(Cal-vin)식 해결책 있다. 일단 하루 일과를 아무런 소득도 없는 일과 조금씩이라도 결과에 보탬이 될 일로 분리해두면 정말로 잘못될 일은 없다는 것.
은명적인 사건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또 하나의 모범적 수단은 다양한 형태의 보험이다. 곤경이 닥칠 경우 치러야 할 비용을 삶의 경로 전체에 골고루 분산시켜 '큰 손실을 작은 고정비용으로 바꾸는 것'이다.
예의범절 체계 역시 원치 않은 운명적 사건, 이를테면, 본의 아니게 상대를 모욕하는 무례를 저질렀을 때를 대비한 보험의 형태로 볼 수 있다. 예의범절 체계는 특히 대면 상호작용을 안전하게 관리할 수 있는 통제수단이다.
위험을 줄일 수단이 있고 그 수단에 의지하면 불안을 야기하는 새로운 조건, 새로운 근거가 생긴다는 점에 주목하자. 별 탈 없으리라 여기고 있는데 뜻밖의 사건이 일어나고 사건의 여파가 그 순간을 넘어서서 이후 개인의 삶을 훼손하게 되면 개인은 이중으로 손실을 입는다. 문제가 된 최초의 손실에다 자기 스스로에게나 남들 눈에나 자신이 위험을 최소화하고 후회할 일은 피하는 이성적 통제력, 즉 '조심성'이 없는 사람으로 비쳐 손실을 보태는 셈이다.

항시 운명적 상황과 마주치는 사람, 예를 들어 전문 도박사나 최전방의 병사가 삶에 적응하는 방식을 세밀하게 관찰해보면 특이하게도 그들은 결과에 대한 경각심이 아주 무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도박을 거는 세상도 결국은 하나의 세상이며, 운을 거는 사람은 그 세상을 어떻게 해쳐 나갈지를 배운다. 도박자는 자기가 이전에 세상과 맺은 관계는 평가절하하고 남들이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세상을 운이 걸린 관계로 받아들임으로써 부침을 거듭하는 자신의 처지에 적응한다. 관점은 상황을 정상화하는 경향이 있다. 상황조건을 완전히 받아들이면 삶이 그런 조건들로 구성될 수 있다. 또 밑에서 위를 올려다보면 추락이 아니라 상승이 일시적인 것으로 보일 것이다.

마이클 발린트(Michael Balint)는 이 같은 안전한 공포감이 주는 짜릿한 흥분을 명쾌하게 묘사한 바 있다.
이런 종류의 재미와 즐거움에서 볼 수 있는 세 가지 특징적인 태도는 (a) 약간의 두려움 또는 최소한 실재하는 외적 위험에 대한 인식, (b) 위험과 두려움에 자발적·의도적으로 자신을 던지기, (c) 위험을 참아내고 정복할 수 있으리라, 위험은 지나갈 것이고 다치지 않은 채 무사히 돌아올 수 있으리라 하는 희망 섞인 자신감이다. 외적 위험에 맞닥뜨릴 때 느끼는 두려움, 재미, 희망 섞인 자신감의 혼합물이 바로 짜릿한 흥분을 구성하는 근본 요소다.

직접 참여를 유도하는 상업화된 행동의 마지막 유형은 내가 '환상의 제조(fancy milling)'라고 부르는 것이다. 미국 사회의 성인들은 고급 제품을 소비함으로써, 돈이 많이 들고 유행하는 오락을 즐김으로써, 화려한 장소에서 시간을 보내고 명사들과 어울림으로써 사회적 신분 이동을 맛볼 수 있다. 이 모두를 동시에 또 보는 사람이 많을 때 하면 신분 이동의 감각을 한층 더 즐길 수 있다. 이런 것이 소비를 과시하는 행동이다. 또한 자기과시적인 사람들이 꽉 들어찬 대규모 모임 자리는 단지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군중이 자아내는 흥분을 확산시킨다. 그뿐만 아니라 다음에는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게 하는 불확실성을 초래한다. 진정한 관계로 이어질 연애놀이도 가능하고 군중 가운데 진짜배기 행동을 실행하는 누군가에게 떠밀리는 생기에 넘치는 경험을 할 수도 있다.

운명적인 사건의 처리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성격 형태

  • 우선, 다양한 형태의 용기(courage)가 있다. 곧 닥칠 위험을 내다보면서도 행동을 불사하는 능력이다. 용기는 위험의 성격에 따라, 즉 신체적 위험인지, 금전적 위험인지, 사회적·정신적 위험인지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 불굴의 투지(gameness)는 좌절감, 고통, 피로에 지쳐도 굽히지 않고 계속 혼신의 힘을 다하는 자질이다. 맹목적이고 무감각해서가 아니라 의지와 결단력이 있어서 불굴의 투지를 발휘하는 것이다.
  • 사회 조직의 관점에서 핵심적 성격 특성은 성실성(integrity)이다. 상당한 이득이 걸려 있고 순간적으로 도덕적 기준을 벗어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유혹을 뿌리치는 성향을 가리킨다. 다른 사람이 보지 않는 상황에서 운명적 활동을 할 때는 성실성이 특히 중요하다. 사회마다 훌륭하다고 인정하는 성격의 종류는 상당히 다르지만 성실성을 인정하지 않고 육성하지 않는 사회는 오래 존속할 수 없다.
  • 정정당당함(gallantry)이란 형식 자체가 내용을 좌우하는 것일 때 그 예절 형식을 지킬 수 있는 자질을 가리킨다.
  • 운명적 사건의 관리와 관련된 성격 가운데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자제력, 냉정함, 차분함을 가리키는 침착성이다. 침착성은 기본 자질을 발휘하는 데 직접 영향을 미침은 물론이고 침착성 자체만으로도 평판의 근거가 되는 까닭에 이중으로 사후영향이 있다.
    침착성에는 행동의 차원이 있다. 운명적 상황에서 주변과 조화를 이루며 부드럽게 절제된 방식으로 신체적 기량(작은 근육의 통제가 특징적인)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다.
    침착성에는 또한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요구되는 자기감정의 통제라는 정서적 차원도 있다. 실제로 정서적 차원은 대화와 몸짓에 사용되는 신체기관의 통제와 관련이 있다.
    또한 침착성에는 품위라는 신체적 차원도 있다. 치러야 할 대가, 난관, 엄청난 압력이 있음에도 자세를 단정하게 유지하는 능력을 말한다.
    침착성의 마지막 차원은 무대 위에서의 자신감이다. 대규모 관중 앞에서 당황스러움, 창피함, 두려움, 자의식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위험과 기회에 맞설 수 있는 자질을 가리킨다.

사람들의 본성에 대한 민간의 믿음

  1. 성격 특성은 기본 자질과는 달리 단 한 번의 표현으로 확정되는 경향이 있다. 성격 특성은 중대한 사건을 미처 피하지 못한 드문 경우에 나타나는 것이기에 즉각 뒷받침할 근거를 보태거나 수정할 수가 없다. 부득이 하나의 표본에 기댈 수밖에 없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성격 특성이란 예외를 허용치 않는 이미지에 속한다는 점이다. 개인이 가장 벗어나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순간에 자기가 한결같은 성격의 소유자임을 보여줄 결정적 기회가 찾아온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한결같음이 사실상 성격의 전부다.
  2. 일단 강한 성격이 입증되고 나면 당장은 성격을 재구성할 필요가 없다. 적어도 그 순간에는 행위자가 자기 성격을 지킬 수 있다.
  3. 어떤 식으로든 한번 성격 표현에 실패하면 개인은 그 이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자포자기에 빠진다는 믿음도 있다. 자기에게는 철저히 지켜야 할 의지가 있고 의지를 지키지 못하면 완전히 무너진다는 믿음에 사로잡힌 병사는 적군의 심문에 무언가를 한번 누설하고 나면 자기가 알고 있는 기밀을 전부 털어놓는 경향이 있다.
위험을 피하면 '겨룸을 놓고 겨루기'가 벌어지는 결과가 따른다. 성격이 망가질 위험한 상황을 피하려는 사람은 겨룸에 들어갈지 말지를 놓고 제3자와 겨루어야 할 처지에 놓인다. 공격자는 자기의 먹잇감이 무슨 수를 쓰든 대결을 피하려 든다고 생각하면 증인을 세워 자신의 용맹을 과시하고 상대의 약점을 노출시키려 한다.

사소한 언행이 심각한 대결이나 결전을 자초할 수 있다. 결판을 내는 동작을 하나 구체적으로 들어보다. 일어서서 다른 사람들이 모두 보는 자리로 걸어가 공개적으로 행동을 촉구하는 몸짓이다. 성인들의 권위에 도전한다는 뜻을 효과적으로 전하는 '비행청소년의 걸음걸이'라는 것이 있다. 그런 걸음걸이로 자기네가 먼저 움직였다는 뜻은 물론이고 자기네가 겨냥했고 또 겨냥하는 상대가 맞서기를 피했다는 뜻도 동시에 드러낸다. 투우장에서 투우사가 으스대며 걷는 산둥가(Sandunga)라는 걸음걸이도 표현양식의 일종이다.

인간에 대한 전통적인 사회학의 관점은 낙관적이다. 사회적으로 규정된 목표를 '이기심'에 사로잡혀 탐하는 짐승 같은 인간을 보면, 그를 붙잡고 면밀하게 구성된 기본원칙에 따라 욕망을 절제하라고 설득하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다(나는 중요한 규칙으로 '상황적 속성', 즉 당면한 상황에서 개인이 보여주어야 할 품행유지 규준을 보태고 싶다). 따라서 개인이 일으키는 문제는 주로 합당한 욕망을 습득하지 못하거나 욕망을 충족하는 과정에서 지켜야 할 규칙을 일부러 어기는 탓에 생긴다.

안전하지만 순간에 충실하지 못한 삶에 대한 일종의 양가감정도 있다. 성격에는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면도 있지만 쉽게 표현할 수도 안전하게 획득할 수도 없는 면 또한 있다. 신중하고 빈틈없는 사람들은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성격을 드러낼 기회를 단념해야 한다. 개인을 운명적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장치는 또한 그 자신에 관한 새로운 정보, 중요한 표현을 가로막는 장치이기도 하다. 그 결과, 신중한 사람은 사회가 높이 평가하는 어떤 가치, 바로 자기가 바람직한 사람임을 표현할 수 있는 어떤 가치를 실현할 길이 없다.
그래서 실용적 도박을 찾거나 아니면 적어도 일상사에서 무언가 일을 벌인다. 정상을 벗어난, 피할 수도 있는, 극적인 위험과 기회로 가득 찬 일들이 바로 행동이다. 운명적 성격이 강할수록 행동은 더 위험해진다.
운명적 상황은 개인에게 아주 특별한 시간을 선사하고, 위험한 행동이 그 개인에게 특별한 시간을 체험하게 해준다. 개인은 운명적 상황에 자신을 던질 각오를 해야 하고 또 그렇게 한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개인이 자신을 던지게 만드는 상황에서는 문젯거리이며 사후영향이 있는 일들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개인의 주관적 경험이 유지되는 동안 개인이 상황에 대처한 결과가 나오고 보상도 얻어야 한다. 자기가 통제할 수 없는, 째깍째깍 흘러가는 몇 분 몇 초의 시간과 맞서야 한다. 짧은 시간 안에 결판이 나는 불확실한 결과에다 자신을 던져야 한다. 그리고 적당한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피할 수 없을 때는 개인은 자신을 운명에 맡겨야 한다. '도박'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위험한 행동은, 대개 영웅주의에 결부된 기회를 몽땅 상실할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서도, 영웅적 품행과 비슷한 도덕적 이점을 어느 정도 누릴 수 있는 수단이다. 그러나 위험한 행동에는 또 상당한 대가가 따른다. 개인이 대가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은 삶의 한 영역에서 운명적인 것으로 보이는 행동에 참여한 대가를 나머지 삶에서 치르도록 정교하게 계산해놓은 상업화된 영역에 참여하는 것이다. 소액의 요금만 치러도 되고 의자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고 집을 나서기만 하면 된다.
성격은 유지하되 비용은 줄이고 싶은 사람들에게 사회가 제공하는 또다른 해결책이 있다. 대중매체를 통해 대리체험을 제조하고 배포하는 것이다.
상업화된 대리체험의 내용을 검토해보면 놀라울 만큼 획일적이다. 실용적 도박, 성격 겨루기, 위험한 행동이 묘사된다. 운명을 건 행동을 벌이는 사람의 속임수, 일대기, 그럴듯한 관점도 보여준다. 그러나 언제나 똑같은 흘러가버린 행동 목록을 생중계하듯 내보낸다. 다양한 종류의 운명적 사건에 연루된 허구의 인물이나 실제 인물과 우리르 동일시하고 대리체험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기회가 사방에 널려 있다.
삶에서 이미 제거된 성분인 갖가지 형태의 운명적 사건들이 왜 그토록 인기가 있을까? 앞서 지적한 것처럼, 소비자는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면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흥분을 얻을 수 있다. 이 동일시 과정을 촉진하는 요소는 두 가지다. 첫째, 운명을 건 행동은 말 그대로 완벽하고 효과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연기자를 자기의 대리인처럼 느끼게 만든다. 한 인물이 의사결정자도 되고, 집행자도 되고, 조직의 관련자도 된다. 실제 인물이든 허구의 인물이든 한 인물과의 동일시가 집단, 도시, 사회운동 또는 트랙터 공장과의 동일시보다 쉽다. 적어도 부르주아 문화에서는 그렇다. 둘째, 운명적 사건은 전모를 다 볼 수 있을 만큼 작은 시공간에서 시도되고 실현된다는 점이다. 자본주의의 발흥이라든지 제 2차 세계대전의 발발 같은 현상과는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전 과정을 묘사하니 한자리에 앉아서 볼 수 있다. 다른 사건들과는 달리 본질적으로 묘사와 관람에 적합하다.

우리가 운명적 사건을 대리소비 하는 이유가 무엇이든 거기에는 분명 사회적 기능이 있다. 우리가 현실세계에서 시선을 도릴 때마다 우리 모두가 안전하게 동일시할 수 있는 명예로운 인물과 그들이 벌이는 운명적 사건들을 볼 수 있다. 이런 동일시를 통해, 일상생활에서 온전히 지키려면 대가가 너무 크고 위험한 운명적 활동의 품행 코드가 명료해지고 재확인된다. 아무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일상의 행동을 판단할 수 있는 준거틀이 보장되는 것이다.
인물과의 동일시는 위험한 과제·성격 겨루기·위험한 행동, 이 세가지 운명적 활동에서 매우 흔하게 일어난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세 가지가 본질적 관련성이 있다고 믿기 쉽다. 성격 때문에 운명적 행동에 말려든 사람은 나머지 두 가지 활동에도 참여해야 하고 또 그런 삶을 바람직하게 여기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형태야 어떻든 모든 운명적 사건에 나오는 영웅의 친화력은 그 영웅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운명에 대리참여 하는 우리들에게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보지 못한다. 우리는 욕구 충족을 위해 그런 낭만적인 인물들을 만들어내고 키운다. 우리에게는 같은 값에 될 수 있는 한 많은 성격들과 대리접촉 하려는 필요의 경제가 있다. 그 모든 운명적 활동을 추구하는 인물로 우리가 오인한 살아 있는 개인이란 소비자의 일괄 구매품에 살과피를 덧붙인 것에 불과하다.

행동이 있는 곳으로 갈 때 사람들은 대게 운이 정해진 곳이 아니라 운을 걸어야 이득을 볼 가능성이 높은 곳으로 간다. 실제로 행동이 벌어진다면 자기가 아니라 자기와 같은 부류에 속하는 누군가 다른 사람이 행동에 참여하는 것이 좋다. 그렇다면 가야 할 곳은 다른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대리체험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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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행복과 자유를 찾아가는 단순한 삶의 원칙. 단순하게, 산다.


삶에서 우리는 복잡한 상황을 종종 마주하게 된다.
그럴 때 담대하고 솔직하게 마주한다면 일이 더 복잡해지지 않는다.
단순하게, 산다.
이 책은 백 년도 전에 쓰인 책이며 현대 사회는 그때보다 더 어지럽다.
그러나 본질이라는 것은 쉽게 변하지 않기에,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단순한 삶이 멀지만은 않다.
올바르고 솔직하며 신뢰와 자신감을 가지고,
부수적인 것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본질적인 것에 전념하는 자연스러운 삶.
이런 단순한 삶과 우리 삶의 거리는 얼마나 되는가?


단순하게, 산다. - 책갈피


욕심과 탐욕, 불건전한 쾌락을 채우려고 많은 인간들이 비열한 짓을 저지르지만, 굶주림 때문에 비열한 짓을 저지르는 사람은 없다.

사물이나 사람이나 결국에는 금전적 가치로 평가된다. 달리 말하면, 사물과 사람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으로 평가된다. 따라서 아무것도 안겨주지 못하는 것은 무가치한 것이며,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사람은 무가치한 사람이다. 청빈함도 부끄러운 것으로 여겨질 가능성이 농후하며, 돈은 부정하게 벌어들일지라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데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과거를 되살리려는 시도는 가장 무익하면서도 가장 위험한 몽상이다. 행복한 삶의 비결은 현재의 삶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회의 발전을 방해하는 많은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가장 부담스러운 잘못을 찾아내려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하루하루 더 나은 삶을 살겠다는 본질적인 목표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짐을 단순화하며 가볍게 해야 한다.

단순한 삶을 살지 못하는 대표적인 사람들로는 구걸로 연명하는 거지, 사기꾼, 기생충 같은 사람, 아첨하는 사람, 시샘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이 땅에서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이 소유한 것을 어떻게든 한 조각- 가능하면 크게- 이라도 뜯어내려 한다.야심이 가득한 사람과 영악한 사람, 나약한 사람과 인색한 사람, 오만한 사람과 꾸미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어떤 사회 계층에 속해 있든 간에 단순함과는 거리가 먼 부류에 속한다.

본질, 즉 근원은 내면적인 것이다. 단순함은 일종의 정신 상태이다. 단순함의 주된 존재 이유는 우리에게 활력을 주는 데 있다. 따라서 인간다운 인간, 즉 진정한 인간이 되는 것이 최고의 목표인 사람은 단순하다.

인간다운 인간은 성심껏 행동하지 메마른 호기심을 채우려고 행동하지는 않는다.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알려고 하는 시도라는 구실을 내세우더라도 그런 호기심은 깊은 감동을 맛보지 못하고, 진정한 행위로 연결되지 않는다.

우리의 일상정인 삶에 기생충처럼 따라붙으며 우리를 괴롭히기에 서둘러 바로잡아야 하는 또 하나의 나쁜 습관은 끊임없이 자신을 점검하고 분석하려는 강박증이다.

사소한 것에 집착하고, 지나치게 조심하는 사람은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인간이 자기만을 생각하지 않도록 만들어진 존재라는 걸 깨닫는 데는 약간의 양식(良識)만 있으면 충분하다.

새로운 것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평범한 것이 영원한 것이다. 평범한 것만이 오랫동안 지속되며, 평범함에서 멀어지는 행위는 지극히 위험한 모험을 무릅쓰는 짓이다. 단순한 것은 무가치한 것이란 착각에서 깨어나 다시 단순한 삶을 찾는 사람은 행복을 찾아가는 사람이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인간은 몇몇 기본적인 것만 있으면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
그 기본적인 것들이 무엇일까?
첫째로 인간의 삶에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신뢰이다.
둘째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감이다.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가, 우리를 둘러싼 신비로운 현상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두 눈을 크게 뜨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할 때이다. 또한 우리가 지금까지 쌓은 지식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는 것은 지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하며, 세상이 우리 두뇌보다 훨씬 크다는 걸 생각해야 하는 때이기도 하다.

활기 넘치고 역동적이어야 한다. 신뢰와 희망과 선량함 그리고 삶의 무한한 가치를 실질적으로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 당신의 좋은 면과 나쁜 면을 조화롭게 결합하여, 당신에게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야 할 필요성을 알려주어야 한다.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고통이 궁극적으로는 해방을 위해 거쳐야 하는 단계라는 깨달음을 주고, 타인의 생각을 존중하는 마음을 키워주어야 한다. 용서를 더 쉽게 하고, 행복감을 덜 뽐내며, 의무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죽음 이후의 세계를 막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게 해주어야 한다.

삶을 단순한 방향으로 개선하려면 말과 글에 신경을 써야 한다. 단순하게 생각하듯이 단순하게 말해야 한다. 물론 정직하고 꾸밈없이 말해야 한다.
'올바르게 생각하고, 솔직하게 말하라!'

궤변을 늘어놓고 중상모략하는 사람들, 요컨대 말과 글을 능숙하게 다루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아는 까닭에 말솜씨만 뛰어난 사람들이 생각을 확산하고 전파하는 모든 수단을 대대적으로 이용했다. 그 결과가 무엇이겠는가? 우리 시대에 대해서, 또 우리 시대에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한 진실을 알아내기가 무척 어려워졌다.

말은 어떤 사실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 어떤 사실을 멋지게 장식함으로써 그 사실을 잊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단순하게 말하면서도 최대한 많이 전달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기적을 울리는 데 증기를 몽땅 써버린 기계는 톱니바퀴를 돌리지 못한다. 요컨대 침묵하는 힘을 키워라 . 말을 줄이면 그만큼 당신의 말에 담긴 힘이 커진다.

우리가 직면한 현대인의 삶은 너무도 복잡해 엄청난 에너지 소비를 요구한다. 그래서 우리는 안달복달하며 숨을 헐떡이고, 끝없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지낸다. 말과 글도 이런 우리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세상에서 잊혀진 사람들을 위해 일하십시오. 배우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을 쓰십시오. 그렇게 할 때 여러분은 해방과 평화에 기여하는 업적을 남긴 것이며, 단순함으로 천재성을 드러내는 방법을 알았던 까닭에 단순하게 보이는 창작물로 그 시대에 도전하고 저항하던 옛 대가들의 비밀 상자를 다시 열어젖힌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삶의 활력을 잃어버린 사람은 어려운 의무를 제대로 해내지 못했거나 불가능한 일을 완수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한 의무를 완벽하게 해내는 걸 등한시하기 때문에 활력을 상실한다.

인간은 원대한 것을 꿈꾸지만, 큰일을 할 기회가 자주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설령 그런 기회가 주어질 때도 끈질긴 준비가 되어 있는 경우에만 확실한 성공이 가능하다. 작고 사소한 것에 충실할 때 큰일도 이루어낼 수 있는 법인데, 우리는 그런 진리를 잊고 살아간다. 힘든 시기를 맞거나 삶의 위기를 맞았을 때 반드시 알아야 할 진리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단순한 의무는 가까이 있는 것에 대한 의무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가까이 있는 것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가까이 있는 것을 높이 평가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새 장수에게 새를 사면, 그는 우리의 새로운 식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준다. 관리법과 먹이 등 새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몇 마디로 요약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을 정리하면 짤막한 몇 줄로도 충분할 것이다.

부유하고 만족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부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만족하는 방법을 알기 때문이다.

즐거움을 누리려면 돈이 있어야 하지 않나? 말도 안되는 생각이다!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다. 즐거움과 돈! 많은 사람이 이 둘을 새의 양쪽 날개로 생각한다. 안타까울 따름이며, 엄청난 착각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소중한 것과 마찬가지로 즐거움은 팔 수도 없고 살 수도 없는 것이다. 즐기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자기 몫을 해내야 한다. 그것이 필수 조건이다.

장사꾼 근성은 '나에게 얼마를 벌어다 줄 수 있는가?'라는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되며,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 있다'라는 격언으로 정리된다. 이 두 가지 행동 원칙이 지배하는 사회는 표현하고 상상하기 힘든 수준으로 타락할 수 있다.

인간의 모든 기본적인 역할에는 헌신과 희생이 그 밑바탕에 깔려있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해관계를 철저히 따지는 사람도 계산 이외의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는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다.

많은 봉급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은 언제라도 구할 수 있지만, 그만한 능력을 지닌 사람을 찾기는 점점 어려워진다. 여기에 성실함까지 겸비한 사람을 찾으려면 어려움은 더욱 커진다. 돈을 밝히는 사람은 쉽게 찾을 수 있지만 헌신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내면의 삶, 즉 내면의 세계가 힘을 잃으면, 요컨대 우리가 겉모습에 신경을 쓰느라 내면의 세계를 경시한다면, 겉모습으로 얻은 것만큼의 가치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평등분배론자도 두 종류로 나뉜다. 첫째는 다른 사람들의 재산 중 일부를 자기 것으로 차지하려는 사람들이다. 이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 다수이고 대체로 비속한 편이다. 이 부류에 속하기는 쉽다. 욕심만 많으면 충분하다. 둘째로는 자신의 소유물을 가난한 사람들과 기꺼이 나누려는 사람들이다. 이 부류에 속하는 사람은 무척 드물다. 이렇게 선택받은 집단에 속하려면 개인적인 욕심을 버리고, 주변 사람들의 행복과 불행에 민감하게 공감하는 의연하고 선량한 마음을 지녀야 한다.

수전노에게 단순한 삶은 비용을 아끼고 또 아끼는 싸구려 삶을 뜻한다. 편협한 마음을 지닌 사람의 경우, 단순한 삶은 인생에 즐거움을 주는 모든 것을 멀리하는 음울하고 무미건조한 삶을 뜻한다.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지만 있으면 더 좋은 것에 관심을 갖느냐, 갖지 않느냐는 결코 간단히 넘길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삶에 영혼을 담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여기에서 구분된다.

몸단장에 많은 의미가 담겨 있을수록 그 가치가 높아진다. 몸단장이 진정한 아름다움으로 여겨지려면 자기만의 참된 멋을 전해줄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의 모든 돈을 쏟아붓더라도 그 몸단장이 당사자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면, 자기만의 개성을 드러내지 못한 가면에 불과하다.

자신의 재산으로 장벽을 쌓아 남들과 멀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재산을 남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수단으로 삼는다. 부자라는 지위가 오만하고 이기적인 많은 사람들에 의해 망가지고 왜곡되었지만, 위와 같은 부자는 정의에 무감각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결국에는 인정받고 존중받기 마련이다.

개인에게는 권력에 저항하라고 유도하는 뭔가가 존재하는데, 그 뭔가는 원래 무척 존중할 만한 것이다. 근본에서 우리는 모두 평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구도 나에게 순종을 강요할 권리가 없다. 그는 그이고 나는 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가 나에게 명령을 내린다면 나를 모멸하는 것이며, 그런 모멸은 용납할 수 없다.

많은 장점을 가졌다면 더욱 겸손해지자. 그것은 우리가 많은 것을 빚졌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은 누군가에게 빚진 것이다. 그런데 그 빚을 확실히 갚을 수 있을까?

남들보다 두각을 나타내는 유일하게 참된 방법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당신이 그 자체로 존중받아 마땅한 지위에 있는 까닭에 실질적으로 존중받고 싶다면, 먼저 당신이 그 지위에 적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그 지위를 증오하고 경멸하게 만드는 원흉이 된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남들과 달라야 하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남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의지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더 겸손해지고 더 상냥해지며,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과 한층 가까워진다.

자식을 중심에 놓고 키워서도 안 되고, 부모를 중심에 놓고 키워서도 안 된다는 뜻이다. 인간은 운명적으로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나의 표본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삶다운 삶을 살도록 가르쳐야 한다.

인위적인 삶에서는 인위적인 생각과 자신 없는 말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건전한 습관과 강한 인상, 현실과의 일상적인 접촉이 있으면 말과 행동도 자연스레 솔직해진다. 거짓은 노예의 악습이고, 비열한 자와 나약한 자의 피난처이다. 자유롭고 당당한 사람을 솔직하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무엇이든 솔직하게 말하는 낙천적인 담대함을 독려하자.

우리는 사회의 모든 계층에게 뭔가를 요구한다. 모두 자신이 채권자라고 주장하며, 자신이 채무자인 걸 인정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우리가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이유는 다정한 말투나 위압적인 말투로 빚을 갚으라고 그들을 다그치기 위해서인 듯하다.

매일 아침 우리는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기억하라! 잊어라!"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본질적인 것은 기억하고, 부수적인 것은 잊으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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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는 삶의 즐거움. 지적 생활의 즐거움.


길게 늘어선 읽어보고 싶은 책 목록에서 그 우선순위를 정하는 일이 쉽지 않다. 마음 같아서는 다 읽고 싶지만, 책만 읽고 사는 삶은 아니기에 더 신중하게 책을 고르곤 한다.
그러나 때로는 이렇게 전혀 계획에 없던 책을 집어 드는 것도 좋다.
계획 따라 산다면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며, 때론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행운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지적 생활의 즐거움.
이 책을 전혀 알지 못했으며, 그저 지적 생활을 풍성하게 즐기지 못하는 자로서 대리 만족을 바라며 집어 들었다.
책은 적당한 책 두께와 가벼운 무게도 그 결정에 한몫했다.
P.G.해머튼.
그가 쓰는 단어 하나 하나에 힘이 실려있으며, 적절한 비유와 인용이 책을 읽는 즐거움을 더해주었다.
영국에 사는 H.D.소로를 만난 기분이다.
이 둘은 삶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졌다는 점에서 닮았다.
비슷한 시대를 살았으며, 글도 재미있게 잘쓴다.

책에서 이 말이 제일 마음속 깊이 들어왔다.
'매일같이 열심히 공부한다고 해서 지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지적인 삶과는 거리가 먼 지식노동에 회의감을 느껴 교양으로부터 멀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지식을 활용하는 기술만 늘어나는 것입니다. 지성과 교양의 궁극적 목표인 개인의 완성과 성취감, 행복은 사라지고 오직 지식이 재물로 변환되는 물질적 성과에 급급하게 되어 지식인임에도 지성인이 되지 못하는 사람도 우리 주변에는 많습니다.'

실제로 내 삶에서 지적 생활보다는 지식노동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흥미 있는 무언가를 깊이 탐구하는 시간보다는, 지금 당장 써먹을 만한 것을 익히는데 더 많은 시간을 쓴다. 이것이 지식노동자로서 제공해야 하는 노동의 의무이긴 하지만, 깊은 탐구가 결여된 지식은 본질에 접근하기 어렵다.


지적 생활의 즐거움 - 책갈피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름에 2주일 넘게 휴가를 즐기며 1년 간의 건강을 축적해두려고 계획을 세우지만, 그보다는 한 주간의 건강유지를 위해 2시간의 산책과 운동이 훨씬 더 효과적입니다.

지적 생활은 결국 신경조직에서 행해지는 활동입니다. 신경조직이 건강하게 유지되려면 운동은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는 몸을 움직여야 됩니다. 육체를 단련하는 일련의 과정들을 우리가 참아내고 수용할 수 있다면 그 효능은 지금껏 발견된 그 어떤 진정제보다 강력하게 작용합니다.

지적 생활은 육식동물의 생태와 닮은 점이 많습니다. 맹수는 간격을 두고 사냥에 나섭니다. 눈앞에 먹잇감이 뛰어다닌다고 해서 무조건 쫓지는 않습니다. 휴식을 취해야 될 때는 먹으라고 고기를 던져줘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휴식이야말로 지친 두 다리에 생기를 불어넣고, 힘줄을 끊는 데 사용한 턱 근육을 이완시켜주며, 다시금 사냥의 목적, 즉 굶주림이라는 욕망을 발생시킨다는 것을 맹수는 알고 있습니다. 휴식을 통해 맹수는 전투력을 유지합니다.

칸트는 새벽 다섯 시에 차와 담배 한 대로 아침식사를 마친 후에 강의준비와 집필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여덟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일했습니다. 일이 끝난 오후 1시에 단골식당에 가거나, 꼭 만나야 되는 사람들과 점심을 먹었습니다. 이후로는 음식을 일절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칸트는 의식적으로 두뇌를 사용해야 하는 일들, 예를 들어 독서라든가, 사색, 집필, 고민 등은 반드시 잠들기 15분 전에 끝마쳤습니다. 그에 따르면 잠들기 전에 머리에 휴식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머리가 휴식하지 못하면 제대로 잠들지 못한다는 주장입니다. 잠을 자도 숙면이 아니라고 합니다. 비단 칸트뿐 아니라 우리도 흔히 경험하는 이야이기입니다. 오늘의 지적 생활은 어젯밤 숙면했느냐와 직결됩니다.

식이요법은 다른 게 아닙니다. 채소를 다량 섭취하고, 고기를 피하고, 물을 많이 마시는 건 아무런 소용도 없습니다. 진정한 식이요법은 생활개선입니다. 나에게 맞는 생활습관을 찾아내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감이 단언하건대 지적 생활에서 요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지적 생활에 종이와 인쇄, 펜이 차지하는 비중 그 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선의 지적 생활은 무엇을 먹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요리는 지적 생활의 기초를 이루는 일종의 과학입니다. 우리 목적에 적합한 음식을 만들고, 적당량을 섭취하는 일련의 습관은 우리가 익혀야 될 과학 중의 과학이며, 인류를 현재와 같은 형태로 만들어낸 어머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와인 애호가는 날카롭지만 쉽게 흥분합니다. 맥주 애호가는 둔중하지만 그 둔중함 속에 평화가 있습니다. 충실하고 다스리기 쉬우며, 금방 화내는 법이 없고, 폭력에 호소하지 않는 침착함이 있습니다.

담배를 지나치게 많이 피우는 사람은 쉽게 불안감을 느낍니다. 그 불안감을 담배로 진정시키는 습성이 몸에 배어버린 탓입니다. 적당한 흡연은 지력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나친 흡연은 사람의 의지를 나약하게 만듭니다. 중독입니다. 종류에 상관없이 중독은 인간의 의지를 공략합니다. 의지가 있는 자는 무엇에도 중독되는 법이 없습니다.자신의 의지에 기대지 못하는 사람들이 뭔가에 중독됩니다. 지나친 흡연자의 특성은 의지부족입니다. 그 증거로 그들은 실천하기 전에 말이 많습니다. 끝없이 이야기합니다. 노력보다는 입으로 해결하려는 태도가 역력합니다.

인간에게는 두 종류의 생활이 있습니다. 동물적 생활과 지적 생활입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이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동물적 생활과 지적 생활을 적당히 융합해 더욱 건강하게 생활하라고 한다면 이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가 됩니다. 우리는 늑대도 아니고 여우도 아닙니다. 사람입니다. 그런데 늑대와 여우처럼 환경에 적응해나가라고 하는 건 우리를 지금 이 자리로 끌어올려준 지적인 강박증에서 벗어나라는 이야기입니다. 똑똑해지는 동시에 보다 강해지라는 요구는 받아들이기 쉬운 조건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기나긴 시간의 연속입니다. 지금 손해인 듯 보이는 운동이 한평생을 두고봤을 때 크나큰 이익이 되는 것입니다. 지적 생활은 건강이 오랫동안 유지되어야만 가능합니다. 건강도 실력입니다. 건강이 뒷받침되지 않는 지적 노동은 죽음과 직결됩니다. 신체를 건강하게 유지하고자 운동이라는 희생을 지불하는 것은 최상의 투자인 것입니다.

지적 생활에서 신문의 최대 결점은 항상 색다른 것만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2200년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지난밤에 찰스 다윈이 어디를 다녀왔는지는 그리 중요한 사건이 아닙니다. 언제 발견했는가는 사건의 핵심이 아닙니다. 그 같은 진실에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더욱 중요합니다. 헌데 신문은 이를 채워주지 못합니다. 색다른 사사리을 신문이 강조할수록 사건의 올바른 관계는 잘못 전달됩니다. 랜턴은 빛의 콘트라스트로 배경을 어둠 속에 가라앉혔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곳밖에 비추지 못합니다.

신문은 문명화된 세계에서 그날그날 가족끼리 주고받는 대화와 비슷합니다. 신문이 있기에 우리는 매일 서로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고, 불길한 고독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지적 생활에는 따로 계급이 없습니다. 지적 생활에도 급이 있다는 생각은 편협입니다.

지적 생활을 꾸준히 추구하려는 정신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똑똑한 반항아일지라도 자기 세계를 구축하지 못합니다. 같은 이유에서 전 세계에서 시험성적이 제일 좋은 사람이더라도 부여되는 지적 활동에 끌려가는 자는 결국 스스로를 잃고 맙니다.

훈련을 시작하는 근본적인 동기는 소망입니다. 타고난 능력뿐 아니라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지식욕, 이를 밑천 삼아 마음껏 지적 활동에 나서보고 싶다는 강력한 소망이 젊은이를 지적 훈련으로 인도합니다. 훈련을 쌓을수록 늘어나는 지식의 총량에 즐거워하고, 그 즐거움이 비로소 자신감이 되어 나를 세상으로 인도합니다.

작가라는 직업만큼 자기훈련에 나약해지는 분류는 없을 겁니다. 문학은 매우 보편적이어서 장벽도 없고, 자격증도 필요 없습니다. 음악과 미술처럼 소질에 덧붙여 이를 개발하고 만개시키는 일련의 교육과정이 수반되지 않습니다. 문학은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예술장르입니다. 수십 년 책을 읽고 문학 언저리에서 재능을 갈고 닦은 사람이 글을 써서 책을 내고 작가가 되듯, 수십 년간 시장에서 좌판을 깔고 채소를 팔던 장사꾼이 오늘 당장 글을 써서 책을 내면 작가가 됩니다.

아서 헬프스. 그의 글에는 한마디로 부적절한 말꼬리가 없습니다. 간결한 표현, 기억에 남을 만한 개성적인 비유, 더 이상 합당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 정확한 언어구사 능력, 이 모든 것들은 그가 앞세우는 사상의 가치를 떠나 젊은 시절 어떤 지적 훈련을 경험했는지 짐작케 해주는 대목입니다.

생트 뵈브.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조사를 완벽하게 끝마쳤다는 확신이 서지 않는 한, 뵈브는 함부로 펜을 들지 않습니다. 자료를 수집하고, 그것들을 배열하고 분류해서 숨겨진 상호관계를 발견하는데 뵈브는 일가견이 있었습니다.

산해진미의 재료가 갖춰졌더라도 적당한 양을 순서에 맞게 사용하지 못한다면 죽보다도 못한 음식이 나옵니다.
지적 활동, 특히 글을 쓴다는 건 준비된 자료와 나의 생각을 하나로 융합해 새로운 무엇인가를 창출해내는 과정입니다. 작품에 통일성이 이어져야 하며, 현실과 이상은 적절한 균형을 이뤄야 합니다. 그런데 지적 훈련이 부족한 작가는 지식은 부족하고 사상은 지리멸렬합니다.

"영감과 평소의 노력은 형제다. 자연을 구성하는 수많은 대립적 존재들이 그러하듯이 영감과 인위적인 로겨 사이에는 배척도, 배반도 찾아볼 길이 없다. 공복과 소화와 수면이 그랬던 것처럼 영감은 평소 생각했던 데서 찾아온다. 나는 그것이 부끄럽지 않다. 오히려 최대한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일 해야 될 일을 고민하는 것은 훈련이다. 내일의 나를 기대하는 것은 노력이다. 그것이 영감의 원천이다." - 샤를 보들레르

지적 훈련이 중요하기는 해도 한 가지 유념해야 될 사항이 있습니다. 우리들 인간의 정신은 즐겨 수용하는 부분이 있고, 반대로 인내 없이는 수용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는 점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좋고 싫음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이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좋고 싫다는 감정은 타고난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내적인 욕망을 따라가는 데 우리는 필연적으로 거부감을 느낍니다. 정신의 거부반응입니다. 특별히 선천적으로 정신이 무능력해서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몸에 밴 일상이라는 습관, 나날의 고민들에 짓눌려 거부감을 느끼게 되었을 뿐입니다. 이런 종류의 거부반응에는 주의해야 합니다. 만약 이런 기분에 휩싸였다면 자기 반성과 충분한 검토가 필요합니다.

"자기 힘을 함부로 낭비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은 없다. 그런 행위는 정열을 방해하는 짓이다. 10년만 그렇게 살아보라 의지는 찾아볼 수가 없고, 생각하는 것마다 시금떨떨한 뒷맛이 따라다닌다. 마음속에 감추고 있던 근성도 시들어버린다. 좌절은 덤이다. 젊은이는 이를 깨닫지 못한다. 무엇인가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구실만 믿고 마음 가는대로 행동한다. 이런 경험이 쌓여 젊은이는 인생을 배우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보게 되었을 때, 정력은 쇠잔하고 열정은 사라졌으며, 행동하는 법은 까맣게 잊어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서른 살의 일개 노동자, 단순한 호사가를 자처하는 자기 모습에 실망하게 될 것이다. 이도 아니라면 부모가 물려준 재산을 탕진한 채 돌아오지 않는 청춘을 그리워하는 패배자가 될 것이다." - 임폴리트 텐

세상엔 수없이 많은 요리가 있지만, 음식을 만드는 방법만 놓고 본다면 결국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재료끼리 주고받는 맛의 뒤섞임을 알고 있을 것, 둘째는 재료에 따른 화력의 사용법이라고 합니다.

그분에게 명성을 안겨준 요리는 '갸또 드 푸아(Gateau de Foie)'라는 이름의 음식입니다. 이 메뉴는 뛰어난 풍미로 유명합니다. 맛의 중심이 되는 주재료는 닭고기입니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닭은 간(肝)'입니다. 두 번째 핵심재료는 파슬리입니다. '갸또 드 푸아'는 닭의 간에 파슬리의 풍미를 더하는 것이 기술이며, 파슬리를 생략하거나, 파슬리 대신 다른 잎채소를 쓰면 특유의 풍미가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 파슬리를 지나치게 많이 쓰면 풍미가 짙어지기는 커녕 입도 못 댈 만큼 쓴맛이 난다는 것입니다.

주의할 점은 인간은 자신과 관련이 없는 것들에 간혹 의문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의문으로 그쳐야 되는데 의문이 확신이 될 때까지 추구하다보면 정작 관심을 가져야 될 것들에 소홀해지기도 합니다.

선천적으로 자신과 맞지 않는 분야에 관심을 돌리는 것은 쓸데없는 낭비입니다. 이는 뿔을 찾으러 떠났다가 귀를 잃어버린다는 유대인 속담에 나오는 어리석은 낙타를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는 지식과의 대면에서 옛날 사람들이 겪었던 흥분을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의 지적 수준은 과거보다 확장되었을지 몰라도 지적 감수성은 과거에 비해 분명 퇴화해버렸습니다.

이 시대의 청년들이 방황하는 이유는 지나치게 많이 배워서입니다. 얕은 깊이로 너무 많은 학문을 거쳤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지적 유산은 그리 풍부하지 못합니다. 현대인이 지적 생활을 계획하면서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피할까, 고민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고뇌는 쓸데없습니다. 우리는 본능으로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 무엇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 길로 망설임 없이 떠나면 되는 것입니다.

조상들은 하나를 공부했고, 여기에 정통해질 때까지 최선을 다했습니다. 우리는 여섯 가지를 공부하고, 그중 단 한 분야에도 정통하지 못하는 실패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조상들은 배움을 실천에 옮겨 자기만의 사상을 갖추려고 노력했다면, 우리는 배우는 과정에 집착하여 '배웠다'는 과거형을 자랑삼고 있습니다.

요즘 시인들은 문학상을 받기 위해 시를 씁니다. 상을 받기 위해 만들어진 시에는 열광이 없습니다. 그런 시는 안전을 추구합니다. 안전한 시어, 안전한 시상, 안전한 시제, 안전한 묘사뿐입니다. 그 시를 읽고 수상자를 결정하는 권한을 지닌 문단의 어른들에게 잘 보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규범을 벗어나지 않는 무난한 시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해할 수 있어야 되므로 독창성은 피해야 합니다.

교사는 단지 전문기관을 수료한 졸업생일 뿐입니다. 가르치는 과목에 무지합니다. 그들에게 배운 어린 학생들이 혼란을 겪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리스어를 가르치는 교사는 그리스어뿐 아니라 그리스 문화, 역사, 철학에 정통해야 합니다.

"메모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해두세요. 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쓰는 단계가 되면 메모를 보지 마세요. 기억에 남아 있는 걸 끄집어내야 합니다. 메모는 과연 이 장면이 내 머릿속에 남을 만큼 인상적인지를 시험하는 단계에 불과해요. 당신이 메모한 것이 정말 중요한 가치가 있다면 그걸 꺼내보지 않더라도 필요할 때 기억날 테니까요. 그러니 잊어버렸다고 아쉬워해서는 안 됩니다. 기억할 가치가 없었기 때문에 잊어버린 거라고 생각하면 편해집니다. 잊어버린 게 많다는 건 그만큼 지워야 할 것들을 미리 삭제한 것이에요. 수고를 덜게 되어 다행이라고 여기십시오."

좋은 기억력이란 많은 것을 기억하는 게 아닙니다. 선택 기억이든, 합리적 기억이든 본질은 '연계'입니다. 관련이 있는 것들 사이에서 개인의 연상력이 작용하고, 머릿속에 하나의 질서가 새롭게 생성되는 창의성이 핵심입니다. 지성의 올바른 작용과 조화는 기억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기억력은 연마할수록 확장됩니다. 제대로 된 연마법을 익힌다면 누구든지 남보다 뛰어난 기억력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기억력은 그런 의미에서 일종의 지적 근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간을 절약하는 가장 유용한 방법은 뭔가를 배우거나 연구하는 등의 지적 활동에 임할 때 의지를 갖고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을 완전히 나의 것으로 만들겠다, 나라는 존재로 가득 채우겠다, 라는 강한 기개를 드러내야 합니다. 그런 날들이 차곡차곡 쌓이다보면 어느 순간 도저히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할 것 같은 장벽에 부딪히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진실한 마음으로 자기를 돌아봐야 합니다. 과연 나는 지금보다 더 성장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에 확신이 든다면 좀더 매진합니다. 성장할 수 있다는 확신은 들지 않더라도 그 무엇보다 내가 이 분야를 연구하고 공부하는 데 기쁨을 느끼고 있다면, 그래서 도저히 포기할 수 없다는 마음이 생긴다면 마찬가지로 좀더 매진합니다.
반대로 이 한계가 넘을 수 없는 장벽처럼 보일 때 깨끗이 인정하고 돌아섭니다. 어떤 지식과 기술에 익숙해질수록 시점이라는 것이 보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점이란 습득한 지식과 기술이 일상에서 자연스레 발휘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도달하기까지 많은 장벽들이 있습니다. 시간도 적잖게 필요합니다. 흥미를 갖고 배우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꽤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는 수준에 도달하기까지 인내만 있다면 누구든지 가능합니다. 그러나 습득한 지식과 기술이 나의 일생을 좌우하는 데 이르기 위해서는 시간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시간과 더불어 재능과 열의가 필요합니다. 그간 내가 쌓아올린 시간에 어느 정도로 열정과 재능을 담아냈는가가 중요합니다.

누구에게나 불완전하게 습득한 지식이 몇 가지 있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실제로는 도움이 되지 않는 지식과 기술입니다. 예를 들어 제대로 된 대화가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몇 개 나라의 외국어를 조금은 할 줄 알며, 기초가 습득되어 있지 못한 과학 지식도 알고 있습니다. 또 타인도 나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변변찮은 기술도 있습니다. 이처럼 불완전한 습득에도 적잖은 시간이 소모됩니다. 헛되이 사라진 시간들입니다. 배우려는 노력만으로도 정신은 일정 수준의 연마가 가능합니다. 따라서 이 시간들을 무조건 헛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최소한 정신의 연마는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낭비로 몰아가는 시각도 부적절합니다.
그러나 결과물, 즉 습득된 지식과 기술의 편차를 놓고 말한다면 극히 낮은 수준입니다. 이 같은 불완전한 정신노동이 현대사회에서는 꽤나 유용한 활동으로 장려되고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현재의 시간을 철저하게 절약하고 싶다면 지금 몰두하고 있는 일들을 리스트로 작성해보는 건 어떨까요. 각각의 일에 정직하게 불완전한 정도를 기입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그 일들에 어느 만큼 집중하고 있는지, 또 그 일들이 당신의 생활에서 얼마나 큰 의미를 차지하고 있는지, 앞으로 지속적인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을 때 그 일에서 기대할 수 있는 성과가 어떤 것인지 차근차근 정리해보기를 권합니다. 이렇게 하면 몇 가지 지적 활동 중에서 실현 가능한 것, 다시 말해서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분야가 보입니다. 그 분야에 집중하십시오. 나머지 활동은 비록 흥미가 있고 개인적으로 소중하더라도 내려놓습니다. 단념입니다. 단념하는 대신 귀중한 시간이 주어집니다. 단념하지 않고서는 시간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지적 활동에 앞서 이 같은 기초지식의 한계설정을 등한시하고 있습니다. 나는 꽃을 좋아하니까 당장 정원으로 뛰어나가 꽃을 심겠다는 사람은 있어도, 나는 꽃을 좋아하니까 우리 집 정원에 꽃을 심기 전에 식물학 표본 등을 공부해 우리 집 정원 토양에 적합한 꽃을 어떻게 키워야 되는지 조사해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전자의 활동은 육체노동, 혹은 치미생활이며 후자는 지식이 동반되는 지적 생활입니다.

서로 보충하는 연구를 동시에 진행하는 것도 효과적인 시간절약입니다. 풍경을 그리는 화가에게 자신이 일하고 있는 지방의 식물을 안다는 건 매우 큰 도움이 됩니다. 왜냐하면 식물에 관한 지식이 있으면 모든 종류의 식물을 가능한 한 정확하고 세밀하게 기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풍경화가가 만약에 과학을 연구하려 한다면 그림에는 전혀 무관한 화학이나 수학을 공부하는것보다는 그림을 그린다는 지적 활동에 도움을 주는 식물학을 공부하는 편이 좋습니다. 전문적으로 하고 있는 연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지적 활동은 쉽게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인내는 우리가 가진 최고의 재능이자 최선의 기능입니다. 물러서는 대신, 후회하는 대신 그 자리에 꿈쩍 않고 서서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당신에게 부족한 것이 시간인지, 재능인지, 아니면 자신을 기다리지 못하는 불신인지 헤아려보십시오. 정답은 당신 안에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인생은 짧고 시간은 화살보다 빠르므로 현재라는 시간은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건 당연한 소리입니다. 그러나 좀 더 개인의 구체적인 생활 속으로 침잠해들어간다면 일상의 내면에서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되는지, 또 무엇부터 시작해야 되는지를 결정하는 권한은 우리에게 있으며, 격언의 가르침을 듣고 깨우쳐 이를 선택하려면 우리에겐 보편적인 지혜를 말하는 격언과 달리 특별하고 개인적인 지혜가 준비되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현대인에겐 시간이 지연되는 것을 참지 못하는 나쁜 습성이 있습니다. 기다림과 미뤄짐을 무조건 손해로 여깁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지연되었기에, 미뤄졌기에 위험을 피하게 되는 상황이 종종 벌어집니다. 그런 경험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런 행운은 그저 행운일 뿐입니다. 어쩌다 보니 재수가 좋아 한 번쯤 이런 일도 있구나, 하고 넘어가버립니다. 보편적인 나타남은 일시적인 행운이 아닙니다. 실제를 갖춘 지혜입니다. 우리는 늦어짐의 지혜에 대해 생각해봐야 되는 것입니다.

책은 좋은 지적 도구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전업 작가이거나, 정말 책을 좋아해서 인생에 독서 외에는 의미 있는 활동이 없다고 굳게 믿는 사람이 아니라면 굳이 독서라는 지적 활동에 얽매여 반드시 많은 책을 읽어야 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대학교의 방식을 참고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대학교는 최고의 지식교육기관이지만 그 실상을 살펴보면 그리 많은 책을 광범위하게 읽도록 강요하지 않습니다. 전공에 특화된 소수의 책을 완벽하게 섭렵하라고 요구합니다.

지적 생활은 시간을 먹이로 삼습니다. 따라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지적 생활의 핵심입니다. 탐욕스런 인간의 본능은 시간에 대해서도 비슷한 행위를 나타내려고 노력합니다. 우리는 휴식이라는 이유로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할 때가 아주 많습니다. 그 시간들을 절약하지 않고서는 지적 생활에 필요한 기본 토대가 마련되지 않습니다.

남보다 오래 공부한다고 해서 그들보다 더 나은 성적을 받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단지 시간을 들인다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시간을 들이지 않으면 남보다 나은 성적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마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시간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약속해주지 않지만, 또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약속해줍니다.

기억의 형성에는 두 가지 조건잉 씨습니다. 첫째, 감정적 충격입니다. 선명한 감정적 충격이 뇌리와 마음에 깊게 새겨져 기억할 의사가 없음에도 저절로 기억되는 경우입니다. 두 번째는 반복입니다. 시간을 들여 반복적으로 주입시킨 기억입니다.

지적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대여섯 개의 다른 분야에 관심ㄴ을 갖고 있습니다. 이에 적잖은 시간을 소요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대여섯 개의 분야 중에 제대로 만족스런 성과를 얻게 되는 것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시간 절약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것만으로 능률은 향상됩니다. 그러나 시간을 절약한다는 것은 고무줄을 늘이는 것과는 다릅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가죽끈을 늘이는 것과 비슷합니다. 즉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시간을 절약할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이 한 시간에 어느 정도나 일할 수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어리석음에는 어리석음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걸 잊은 채 살아가는 사람과 뭔가를 찾아내 기억하며 살아가는 사람의 미래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시간의 다른 이름은 기억입니다. 젊은 날 우리는 자신의 가능성을 과대평가한 대가로 오늘은 비참해졌고 , 내일을 두렵게 만든 잘못을 저지른 바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겠지요. 희망이 없어 보이지만, 희망이 없다고 여겨지는 삶이기에 우리는 희망을 찾고 싶다는 열망을 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오늘이 기억해야 될 현명한 꿈이 아닐는지요.

환자와 건강한 사람의 차이가 뭘까요? 환자는 침대에 누워 있고, 건강한 사람은 자신의 두 발로 걸어다니고 있는 걸까요? 맞는 이야기에요. 그렇다면 환자와 건강한 사람의 차이는 '걷다'가 되겠지요. 환자는 걷지 못하고 건강한 사람은 걷고 있다, 이말인 즉 계속 걸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곧 환자라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자신의 길을 중단한 사람이 곧 환자라는 이야기입니다. 시간이 없다, 돈이 없다는 이유로 잠시라도 그 걸음을 멈추었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지금 아파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 나이팅게일

중단된 독서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습니다. 당신이 중단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전깃줄을 다시 이어붙이면 전류는 다시 통하지만, 사람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적인 상상력이 끊어진 뒤로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끊어진 자리에서 재생되는 지적 감동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찢어진 명화를 다시 붙인들 과거의 명작이 되지 안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이 부족하므로 여유가 생겼을 때 띄엄띄엄 책을 읽고 필요한 만큼의 지적 생활을 이어나가겠다는 산술적 계산으로는 당신이 기대하는 지적인 삶은 건설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돈은 지성의 토양과 같습니다. 토양이 충분하고 물을 넘치게 흘려주면 싹은 저절로 피어납니다. 그 이점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게 슬퍼질 따름입니다. 토양이 메말라 모래와 같은 곳에 씨를 뿌려봐야 싹이 틀 리 없습니다. 사상도 현실의 일부입니다. 자본이 다스리는 현실 사회에서는 돈이라는 토양을 거부하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지적 생활도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매일같이 열심히 공부한다고 해서 지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지적인 삶과는 거리가 먼 지식노동에 회의감을 느껴 교양으로부터 멀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지식을 활용하는 기술만 늘어나는 것입니다. 지성과 교양의 궁극적 목표인 개인의 완성과 성취감, 행복은 사라지고 오직 지식이 재물로 변환되는 물질적 성과에 급급하게 되어 지식인임에도 지성인이 되지 못하는 사람도 우리 주변에는 많습니다.

과거의 나는 기회의 중요성을 믿었습니다. 기회가 주어져야 노력이 가능한 것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헌데 이 나이게 될 때까지 살아보니 정말로 간절한 것은 시간과 건강입니다. 시간과 건강이 허락하는 한, 기회는 쉬지 않고 찾아옵니다. 우리를 찾아오지 않더라도 내가 찾애닐 수 있습니다.

"율법은 확실히 무거운 짐이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게나. 전쟁터에 나간 군인들에게 총과 탄약은 생명보다 값진 것이네. 아무리 무거워도 총을 버리고 전쟁터에 나가진 않을 게야. 배낭이 쓸데없이 큰 것 같아도 그 안에는 모포며, 식량이며, 물과 약품들로 가득하네. 이 또한 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것들이지. 내가 만약 군인이라면 그것들이 무거워도 함부로 버리지는 않을 걸세." - 어느 늙은 랍비 랍비

인생은 정직해져야 합니다. 누구보다도 나 자신에게 정직해져야 합니다. 현재 나는 본래의 내가 가진 능력보다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그 평가에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생활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식인들은 나는 그것을 모른다, 라고 말하기 보다는 그것은 애초부터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라고 말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인종입니다. 이런 변명으로 자신들의 신분이 유지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의 비루한 처지가 설명된다며 득의양양해합니다.

고통과 즐거움은 같은 길에 놓여 있습니다. 기쁨의 끝에 고통이 있고, 고통 끝에 기쁨이 있습니다. 당신을 괴롭히려고 운명이 시련을 주는 건 아닙니다.
확신하십시오. 진정한 생명은 당신의 슬픔으로 심어진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 열매가 당신 소유가 되지 않을지라도 당신은 충분히 행복했다는 것을.

목숨이 붙은 것들은 언젠가 떠나야 합니다. 그것이 나를 부끄럽게 합니다. 언젠가는 떠나야 할 이 삶에 나는 왜 그리도 미련을 갖고 살아가는지, 생각할수록 부끄럽습니다. 언젠가는 나를 떠나게 될 그 무엇에 왜 그리도 초조해하는지, 뒤돌아볼수록 부끄럽기만합니다. 가구 하나, 책 한 권도 나의 것이 아닙니다. 이것들도 제 나름대로 목숨을 갖춘 존재들입니다. 문짝이 썩고, 책갈피의 수명이 다해지면 나를 떠날 것입니다. 나의 그리움과 애증 따위엔 동정을 배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나는 이것들이 나의 것이라며, 내가 허락하지 않는 한 제 마음대로 나를 떠나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하며 살아왔던 것은 아닌지요. 그 편협한 애증이 나를 부끄럽게 만듭니다.

두려움은 믿음이 약해졌다는 신호입니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믿음밖에 없습니다. 인생이 두려운 까닭은 나 자신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고, 사람이 두려운 까닭은 그를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을 믿기만 한다면 인생은 두려울 이유가 없습니다. 상대방을 믿어주기만 한다면 그의 말과 행동이 나를 괴롭히지 않습니다.

건강은 두말할 것도 없이 큰 축복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남보다 오래 살고 싶다는, 즉 그들보다 빨리 죽고 싶지 않다는 미혹된 마음으로 건강한 삶을 추구한다면 머지않아 그토록 아끼고 애달프게 여기는 건강을 잃게 될 것입니다. 건강은 육체의 강건함만으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정신과 감성이 올바를 때 건강도 유지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인간을 괴롭히는 질병 중 태반이 피폐된 정신과 감성에서 싹트고 있습니다. 육체적인 건강에 유념하느라 정신과 감성을 상실한다면 가장 두려운 결과, 즉 건강한 몸으로 속절없이 사라져야 하는 참담한 운명과 맞닥뜨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으며, 무슨 이유로 인생이 고단해졌는지도 묻지 않고 살아갑니다. 왜 그런 일을 할 수 없는지 원인을 궁금해하지도 않고, 불가능한 일에 매달려 아까운 세월만 허비하고 있습니다.

"돌진하라!"
이것은 명령이었습니다. 나의 사회적 위치와 눈앞의 과제를 모두 뛰어넘는 무소불위의 권력이었습니다. 그 명령이 손가락질함는 곳엔 항상 내가 있었습니다. 내가 돌진해야 할 상대는, 넘어뜨려야 할 적은 항상 나 자신이었습니다.
나를 비굴하게 만드는 적도 나였고, 나를 허약하게 만드는 적도 나였으며, 나를 무기력하게 만든 적도 언제나 나 자신이었습니다. 인생은 나 자신과의 승부였습니다. 승자는 항상 나였고, 패자도 항상 나였습니다. 나는 인생의 모든 고비에서 승리와 패배를 동시에 맛봐야 했습니다. 그 반복적인 경험에 익숙해지면서 나는 승리를 기뻐하지 않게 되었고,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철학의 학문적 특성은 보편적 세계관의 표출입니다. 제아무리 위대한 사상가의 철학도 출발은 개인적 세계관의 수립입니다. 이 개인적인 세계관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을 때, 우리는 그의 이름을 위대한 사상가의 반열에 올려놓습니다.

철학이 권위를 덧입게 되면 그것은 더 이상 철학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상적 폭력이며, 군림이고, 구속입니다. 철학은 지극히 개인적인 자기표현입니다.

위대한 사상이 위대한 철학자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위대한 생애만이 그를 위대한 철학자로 만들어줍니다. 요즘 등장하고 있는 사상가들은 철학적인 생에보다 철학의 결실에 더 매진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철학을 멀리하는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인간은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인간은 자유를 쟁취해야만 합니다. 인간은 자유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명예와 호화로운 저터개이 당신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이 공허하고 따분하게 생각된다면 당신의 삶이 억눌려 있다는 증거입니다. 당신에게 자유가 필요하다는 증거입니다. 당신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애꿎은 사람들에게 분노하고 실망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실 당신 삶에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나이듦이 고통시러운 까닭은 어떻게 늙어야 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한 번도 늙어본 적이 없으므로 그 과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모릅니다. 그 무지가 노년의 생에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곤 합니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지혜가 무엇이냐고 한다면, 어떻게 늙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인간의 최후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지혜는 없습니다. 이 지혜는 젊었을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고 어렵습니다.
노인답게 자연스럽고 현명해진다는 것은 러렵기만 합니다. 아름다운 노년은 서쪽 하늘을 물들이는 노을입니다. 노을이 아름답기 위해서는 새벽부터 대지를 달궈야 합니다. 아름다운 노년은 결국 아름다운 청춘을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주어진 인생에 최선을 다했다는 뜻입니다.

당신이 어떤 직업을 통해 행복해지고 싶다면 다음 세 가지를 유념해야 합니다. 첫째, 그 일에 필요한 능력을 갖출 것, 둘째, 지나치게 많이 일하려고 하지 말 것, 셋째, 그 일을 사랑한다고 당신 자신을 속이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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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도 가까운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나는 요즘 자주 잊곤 한다.
내 삶이 언젠가 내가 예측하지 못할 때 끝나리라는 것을.
그래서 죽음에 비추어보면 아주 보잘것없는 일에 욕심을 부리기도 하고,
시간이 갈수록 줄어드는 나의 인생의 한 시간, 하루, 일주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낭비해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인생이란 건 무척 재미있는 이야기와 같아서, 그 낭비했던 세월을 되돌아보았을때 인생에 최고의 순간이 되기도 하며,
밤낮으로 에너지를 쏟았던 일이 개똥만도 못한 기억으로 남기도 한다.
만약 어떤 아름다운 미래를 예상하며 모든 에너지를 쏟았더니 그게 개똥이 된다면?
그 충격은 마취 없이 내시경을 받는 것만큼이나 커다랗게 느껴진다.
그리하여 인생에는 균형을 찾는 것이 참 중요한데, 내 경우엔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나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매일 한 시간, 그러다 30분, 10분, 아니 5분이라도, 단 1분이라도 그런 시간을 가지다가 어느 순간 까마득히 잊고 지냈음을 느꼈다.
멀고도 가까운.
이 책은 내 삶의 균형이 무너지기 전에 중요한 걸 다시 일깨워 줬다.

멀고도 가까운 - 책갈피

동화가 아이들의 이야기인 이유는, 아이들을 위해 쓰인 것이라서가 아니라, 이야기 자체가 인생의 초반기, 다른 사람들은 내게 힘을 행사하지만 정작 나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는 그 시기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면 그건 대부분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었다.

글쓰기는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두에게 하는 행위이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이 표현은 기계장치의 신을 뜻하는데, 고대 그리스 극작가가 극을 계속 끌고 가거나 주인공을 구해 줄 때 쓰던 장치로,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젊을 때 읽었던 마르키 드 사드의 문장이 종종 떠오르곤 한다.
"아! 늘 무언가를 창조해 내는 시간에게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이 살덩이든 저 살덩이든, 오늘은 한 인간의 몸을 이루고 있지만 내일이면 1000마리의 곤충으로 변해 버릴 것을?"

'바니타스(vanitas)'라는 단어는 부정적인 의미를 지닌 영어 '배너티(vanity)'와 그 의미가 크게 다르지 않다. 공허함, 결실 없음, 그리고 어리석은 자만심이라는 의미다.

나병은 신경을 짓눌러 아무런 감각을 느낄 수 없게 만들 뿐이고, 그렇게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되면 환자들은 그 부위를 돌보지 않게 된다. 피부를 상하게 하는 것은 병이 아니라 환자 본인이다. 스스로가 제 손가락과 발가락, 발, 손을 베이고, 화상을 입고, 멍들게 하고, 벗겨지게 하다가, 결국 그 부위를 잃게 되는 것이다.

고통에도 목적이 있다.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느낄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돌보지도 않는다.'

감정이입 덕분에 당신은 고문, 배고픔, 상실의 느낌을 상상할 수 있다. 당사자를 안으로 불러들여, 그들의 고통을 당신의 몸이나 가슴, 혹은 머리에 새기고, 그 다음엔 마치 그 고통이 자신인 것인 양 반응한다. 동일시라는 말은 나를 확장해 당신과 연대한다는 의미이며, 당신이 누구와 혹은 무엇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느냐에 따라 당신의 정체성이 구축된다.

영어와 라틴어에서 '꿰메다'라는 뜻으로 쓰이는 'suture'는 산 스크리트어 '수트라(sutra)'혹은 고대 인도어의 하나인 팔리어의 '수타(suta)'를 어근으로 하고 있다. 두 단어 모두 바느질과 관련이 있다. 불교의 가장 성스러운 경전 수트라가 그런 이름을 가지게 된 이유는 최초에는 경전을 끈으로 꿰어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야자수 잎을 두 개의 끈을 사용해 접이식 블라인드처럼 묶었던 것이 경전이었다.

괴로움이 팔리어 '두카'의 정확한 번역은 아니다. '두카'는 하늘, 공기 혹은 구멍, 특히 바큇살의 축에 있는 구멍을 의미한다. '수카'가 바퀴가 잘 굴러가게 하는 좋은 구멍이라면, '두카'는 잘못된 구멍, 바퀴가 흔들리고 길에서 덜컹이게 하는 구멍이다. 이는 조화나 차분함의 반대어로, 불화 아니면 소란으로 번역할 수 있다. 뭔가 어긋난 느낌, 조화롭지 못하고 만족스럽지 않으며, 불안하고 두렵고, 마음이 쓰린 느낌은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싯타르타는 최초의 수트라인 [초전법륜경]에서 이렇게 말했다. "태어남도 괴로움이다. 늙음도 괴로움이다. 병도 괴로움이다. 죽음도 괴로움이다. 근심, 탄식,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도 괴로움이다. 싫어하는 것들을 만나는 일도 괴로움이다. 좋아하는 것과 떨어져 있는 일도 괴로움이다.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요컨대, 다섯 가지 집착이 모두 괴로움이다."

한때 노숙인 생활을 하다 불교 사제가 된 한 지인의 말에 따르면, 그렇게 호흡에 집중하며 현재에 몰두하다 보면 자신의 이야기에만 빠져들지 않고 다른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게 된다. 정좌를 하고 자신의 호흡을 세면서 머릿속을 떠오르는 이야기를 그대로 응시하고, 그렇게 흘려보내며,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당신의 취향을 조금씩 알게 되고, 당신이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사실 자체도 인식하게 된다. 배고픔이나 통증 같은 것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신체적 괴로움을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자신이 감정적 의미의 고통을 이전보다 훨씬 더 잘 다룰 수 있게 되었음을, 관점에 따라 다르게 느낄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육식만 하는 이누이트들은 가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존재가 지닌 가장 큰 위험은, 우리의 식단이 온통 영혼을 가진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말이 식인 풍습을 접한 인류학자의 충격을 줄여주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감각이 있는 다른 존재를 매일매일 먹고 있다는 점을 더욱 깊이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분명하다.

아직 아무것도 적지 않은 종이의 흰색과 무언가를 썼다 지운 후의 흰색은 같으면서 같지 않다. 말을 하기 전의 침묵과 말을 한 후의 침묵도 같은 침묵이면서 같은 침묵이 아니다. 눈은 만물이 성정하는 시기의 앞과 뒤에 내린다. 내가 어머니와 화목한 관계를 유지했던 시기는, 나의 기억이 시작되기 전과 어머니의 기억이 희미해진 후였다. 어머니 당신이 지워지고 있었다. 다시 흰색으로 돌아간, 부재를 향해 가는 종이처럼.

종종 지금 내가 사는 집에서 나보다 앞서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편지를 받을 때가 있다. 어떤 때는 나의 몸이 하나의 집이 되어, 여러 세입자가 차례대로 살다가 떠나는 곳이 된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들 하나하나가 기억을 남기고, 습관과 상처, 기술, 그리고 여러 기념품을 남긴다. 아주 오랜 후에도, 나의 마음은 여전히 뒤에 처져 있곤 한다. 이제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어 버렸는데도 나는 멸종해 버린 과거의 어머니와 여전히 다투고 있고, 과거를 해결하고 싶어 하고, 과거를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어머니를 돌보는 일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너무 작아졌지만 여전히 내게 무언가를 가르쳐 주는 어머니를 나는 진심으로 걱정하고, 열린 마음으로 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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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작가의 내공이 느껴지는 책. 나는 걸었고, 세상은 말했다.

원고 하나를 세상에 내보내지 못하고 묵혀두었는데,
이 책을 읽으니 그 원고의 문제를 알겠다.
전에 형에게 지나가듯 물었더니,
‘에세이는 솔직한 게 다야.’라는 간단한 답을 들었다.
나머지 답은 ‘나는 걸었고, 세상은 말했다.’ 에 있다.
솔직하되, 군더더기는 없어야 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쓰되, 남이 알아듣는 언어로 써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꾸준히 글을 써서, 작가의 내공이 쌓여야 한다.
이 책은 지금까지 ‘변종모’라는 이름으로 나온 단행본 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책이다.
지금까지는 주제의 틀에 맞추어 사진과 글을 짜 넣었다는 느낌이라면,
이번 책은 다르다.
가장 보여주고 싶은 사진과 제일 하고 싶은 말을 담았다는 느낌이다.
멋있다.
나는 아직 멀었다.
그리고 요즘엔 더 멀어졌다.
하지만 사시사철 계절이 바뀌듯, 내게도 다시 글 쓸 날이 오리라.

나는 걸었고 세상은 말했다.
나는 읽었고 내공을 느꼈다.

아이-'나는 걸었고 세상은 말했다. 변종모'

나는 걸었고, 세상은 말했다. 책갈피

전문가가 나눈 블루의 종류는 110가지라고 한다. 사람들이 저마다 가진 슬픔의 색은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은 종류가 있을지도 모른다.

“용서해줄게! 그런 계절에 꽃으로 이별을 던지고 간 너. 미안하다는 말 대신 노란 튤립이 두 송이 핀 화분만 남기고 7월인가에 문자를 해서는 튤립이 졌겠다며 딴 소리만 하던 너. 용서할게.”

함부로 바라지 않는 마음. 어딜 가도 내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절대로 변할 수 없는 세상. 휘영청 밝은 달을 보며 세상만사가 내 뜻과 다르게 변한다고 야속해하진 말아야 한다. 사실 내 마음을 제외하면 세상은 한 번도 달라진 적 없는 것을.

자신을 믿지 못하거나 마음의 깊이가 낮은 사람일수록 깊은 흔적을 남긴다.

무슨 마음이었을까? 그때 나의 그 맹세는. 너만을 사랑하겠다던 그 말, 영원히 함께하자던 그 말. 어디론가 사라진 그 맹세는 이미 네겐 낡아버린 언어일 테고 의미없이 내게만 남은 미련이다. 너에게 던져준 말인데 내게만 남았다.

붙잡아둔다고 묶여 있을 것은 놓아줘도 달아나지 않는다. 구속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구속할수록 속박당하는 것은 그대의 마음뿐.

모든 사람이 자신을 사랑할거라 믿는 사람은 타인에게 배려가 부족한 사람이고 모두가 자신을 싫어할 거라 믿는 사람은 자신에게 배려가 부족한 사람이다.

너의 말처럼 나는 걷고 있다. 너도 어느 길 위에서 나처럼 걷고 있을 것을 안다. 그러니 어느 방향으로 걸어도 같을 것이다. 너의 말처럼 그것은 함께 걷는 일일 것이다. 너와 내가 같은 마음으로 걷고 있다면. “함께 가지 않아도 우리는 동행이에요.”라던 너의 말. 그 말만은 믿어본다.

사는 것은 실수의 연속이고 그것은 연습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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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수필인 줄 알고 펼쳤다가 침이 흘렀다. 그래도 나는 당신이 달다.

새 책이 나왔단 소식을 들었습니다.
나태하고 무기력함에 빠져 지내던 터라,
읽어야지 생각하고 근 한 달 만에 책을 펼쳤네요.
다른 읽던 책들이 있어서 그러기도 했고,
책보단 낮잠이나 자고 게임 실컷 하는 게 더 즐거워서 그랬기도 하지요.

‘나는 지금. 꿈을 이룰 생각에 가슴 뛰는가?’
어쩌면 허황한 지도 모르겠다.
지금 당장 변변한 밥 한 끼 사 먹기도 어려운 판에 무슨 꿈인가.
개꿈인가.
귀신 씨나락 까먹는 꿈인가.
꿈이고 생시고.
일단은 먹고 살아야지 않겠나?
하지만 난 꿈을 이루고 싶은데?!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건 뭔가?
그런 고민을 하다 게임에 빠져들었습니다.
게임엔 고민이 없거든요.
그렇다고 게임만 하고 살 순 없겠죠.
다시. 꿈을 향해 걷습니다.
설령 비행기 타고 날아가기에도 먼 거리일지라도.
전 지금 자신의 변화를 꾀하며 마음을 가다듬는 중입니다.
그러던 중 이 책을 읽게 되었어요.

“야, 이 목적도 방향도 없이 사는 놈아!”
책 속의 호통에 뜨끔합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전 길을 잃은 상태였거든요.
그때 이 책을 읽었다면 괜히 더 의기소침해 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좋은 음식도 좋은 책도 다 때에 맞추어 먹어야 하는 거지요.

오늘은 아침을 평소보다 좀 부실하게 먹었습니다.
오후쯤 되니 배가 고파요.
으레 여행 수필이려니 이 책을 펼쳤다가 침을 흘릴 뻔했습니다.
요리 이야기가 많이 나오거든요.
새 책을 못 쓰게 만들 뻔 했네요.
저도 여행 레시피가 모이면 이런 유의 책을 한 권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책 한 권에 담을 만큼 레시피가 모이려면 아직 한참 남았지만 말이에요.

책에 나온 간단한 마늘과 올리브를 곁들인 파스타 레시피가 반가웠습니다.
저도 자주 만들어 먹었거든요.
이 레시피에 치즈를 왕창 넣고 좀 더 느끼한 파스타를 만들어 먹곤 했지요.

이 책은 여러 재료가 들어가서 그런지 오묘한 맛을 내는 책입니다.
책 제목은 ‘그래도 나는 당신이 달다.’이지만.
달고 짜고 시고 쓰고 맵고 고소한 다양한 맛이 들어있지요.
사진 한 장. 단어 묘사 하나에서 고수의 풍모가 느껴집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나중에 만들어 먹으려고, 레시피 몇 개를 책에서 옮겨 적었어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모히토를 만드는 방법
컵 테두리에 럼주를 바르고 설탕 위에 컵을 엎어서 설탕을 묻힌다. 럼주 두 잔에 라임즙 한잔을 얼음과 함께, 여기에 소다수를 넣고 질 낮은 설탕 한 주먹과 민트 한 주먹을 손바닥으로 비벼서 넣는다.

햄버거
갈아놓은 소고기를 준비한다.
파를 다지고 고추와 마늘을 다져 넣는다.
양파는 물이 생기니 넣지 않는다.
후추 소금을 조금 넣고 손바닥에 밀가루 반죽처럼 달라붙는 정도까지 쥐어짜듯 반죽한다.
이렇게 만든 햄버거 패티는 적어도 하루는 냉동실에서 숙성한 뒤 반드시 바비큐 그릴에 구워야 한다.
프라이팬에 굽다 보면 기름기가 남게 되어 빵에 들어가면 눅눅해진다.

그린 파파야 샐러드
파파야를 얇게 채를 썰어서 고춧가루와 피시 소스, 라임을 뿌려 버무린다.

월남 쌈 피시 소스 만들기
피시 소스 반 컵 정도에 우선 사이다를 컵의 3분의 2지점까지 채우고 설탕을 크게 한 스푼 넣은 다음, 청양고추나 할라피뇨 또는 세라노처럼 청양고추에 대응하는 고추를 잘게 다지고 마늘 역시 칼로 다져서 넣은 뒤, 중간 크기의 라임을 두 개 정도만 넣어주면 소스 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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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련한 여행자의 솔직한 이야기. 아무도 그립지 않다는 거짓말.

한국에 돌아오면 제일 처음으로 읽고 싶던 책.
다른 몇 권의 책을 읽고 나서야 이 책을 집어 들었습니다.
친구 집으로 향하는 전철 안에서 몇 장을 읽고,
오랜만에 만난 녀석들과 술을 한잔 마셨습니다.
목구멍까지 술이 차올라 찰랑거렸으니,
어쩜 술 한잔이라 하기엔 좀 과할 정도였을지도 모르겠군요.
친구들은 하나둘씩 곯아떨어지고,
남은 한 친구와 밤새 떠들었습니다.
어느덧 아침입니다.
닭도 한 마리 울지 않는 도시의 아침 해를 보며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갔지요.
그리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다시 이 책을 펼쳐 읽었습니다.
어제 마신 술 때문인지, 흔들리는 버스 때문인지.
차에서 나는 기름 냄새 때문인지. 멀미가 납니다.
그 어지러움 속에서 흔들리는 글씨를 한 자 한 자 집어 담았어요.

집에 도착하니 책이 몇 장 남지 않았습니다.
책 제목을 한번 보고는,
괜히 휴대전화를 꺼내 연락처를 뒤적여 봅니다.
일요일 오후.
누구에게 전화를 걸어 볼까 하지만.
이내 전화기를 던져 버리곤 침대에 누웠어요.
한국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곤 가장 먼저 전화를 줬던 형의 목소리가 문득 떠오릅니다.
"건강하니? 언제 또 나가니?"
멀리 미국 땅에서 걸려온 전화가 멀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괜스레 흘러간 옛 노래가 듣고 싶었습니다.
오래된 CD 재생기를 열어보니 먼지 쌓인 CD가 몇 장 들어있었지요.
이 녀석한테 2번 CD를 틀어 달라고 눌렀더니 자기 마음에 드는 1번 CD를 틀어버립니다.
고등학생 때 샀던 양파 1집의 노래를 흘려들으며 소파에 누웠습니다.
그리곤 몇 장 안 남은 책을 다시 펼쳐 들었어요.
여러 장소에서 책을 읽으니 여행 이야기를 읽는 묘미가 더 살아납니다.

미얀마-'아무도 그립지 않다는 거짓말 - 변종모'

어쩌면 대부분의 꿈은 알 수 없는 희망으로 꾸는 게 아니라 구체적인 경험에 의해 꾸는 것이다.
이미 사랑한 후에 또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처럼. - 변종모 -

이 구절에선 참 인간적인 냄새가 났습니다.
이 책에 담긴 그리움이 저 글귀에 농축되어 있는 듯 느껴졌어요.

여행지마다 풍기는 분위기가 다릅니다.
제 발길이 닿았던 곳이라던가, 미얀마처럼 언젠간 가 보리라 마음속에만 품은 곳도 있어요.
듣도 보도 못했던 장소에 문득 가보고 싶어집니다.
마슐레라는 동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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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자 월풍의 여행수필집. 방랑은 청춘이다.


방랑은 청춘이다.

여행.
왜 떠나시나요?
혹자는 지친 몸을 재충전 하러 떠나고,
어떤 이는 팔팔한 몸을 지치게 만들러 떠납니다.
여러 나라를 돌아보고 견문을 넓히러 나가기도 하고,
그 넓은 세상 속의 자신을 돌아 보기 위해 나가기도 합니다.
이 수필집엔 여행자가 내면을 바라보고 정리하는 과정이 담겨있어요.
글은 기교 없이 단순하고 투박한 편입니다.
초보의 글이니까요.
글을 제대로 맘 잡고 쓴 건 이제 겨우 삼 년이 지났으니,
기술이 매끄럽지 못하지요.

이 수필집이 은 쟁반에 금 가루가 뿌려 나오는 화려한 음식이 아니에요.
강한 조미료 탓에 원래 재료가 무언지 알기 어렵거나,
미식가들만 잡아 내도록 맛을 꼭꼭 숨겨 놓은 요리도 아닙니다.
다만 좋은 재료를 골라 정성스레 만든 만큼,
손맛이 깊게 베인 수필집 이지요.
모두가 그럭저럭 먹을 수 있는 흰 밥이 아닌 이상,
입맛에 따라 음식의 호불호가 갈리지요.
이 수필집 또한 어떤 이의 입엔 영 맞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대신 입에 착착 감긴다는 사람도 있겠죠? :D

저는 한번 읽은 책을 다시 꺼내 보는 경우가 드문 편 입니다.
제가 쓴 글을 빼면 두 자릿수를 넘게 본 적이 없지요.
그런데 이 수필집은 출판 되기도 전에 세 자릿수를 넘겼습니다.
글을 다듬고, 고치다 보니 계속 읽게 되더라고요.
그러면서 책과 정이 많이 들었습니다.
어쩜 누군가에겐 한번 읽기에도 내키지 않는 글일지도 모릅니다.
여러 사람이 적당히 즐겁게 읽으려면, 그에 맞게 글을 가려 써야겠지요.
하지만 저는 제 입맛에 맞지 않는 요리는 만들지 못합니다.
자기 입에도 맞지 않는 음식을 무슨 맛으로 만들겠어요?
글 또한 제 취향대로 씁니다.
책의 성격에 따라 말투나 분위기는 좀 다르지만 말이에요.
얼마 전 나온 ‘은의길 욕하지 말고 웃으며 걸으세요.’가 겉절이라면,
이 수필집 ‘방랑은 청춘이다.’는 묵은지 이지요.
겉절이는 신선한 맛에, 묵은지는 깊은 맛에 먹습니다.

자, 맛을 보시지요.
아래의 두 글은 책이 너무 두꺼워져서 편집 한 글입니다.
영화로 치면 감독 판에나 등장하는 장면이에요.

얼마나 높은 산인가?

토마토 같은 사람

아래 링크엔, 책 속의 여행지를 지도에 정리했습니다.

방랑은 청춘이다 여행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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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 심취한 구도자 소로우. 그의 여행기. 콩코드·메리맥 강에서 보낸 일주일.

영어.
참 실용적인 언어입니다.
생존하기 위해 익혀야 했지만, 여태껏 영어 때문에 가슴이 뛴 적은 없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지요.
취미가 없으니 발전 또한 없습니다.
중학생 때부터 십수 년의 많은 시간을 쏟았지만,
여전히 유치원 꼬맹이 수준에 못 미칩니다.
‘영어’ 생각에 밤잠을 설칠 정도로 설레는 날이 일 년만 되었다면,
이 외국어가 좀 친숙해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영어는 여전히 낯선 언어에요.
영어를 공부하면서 유일한 위안이 되었던 건,
제가 좋아하는 작가의 글을 원서로 읽는 즐거움을 맛보리란 것이었지요.

도서관에 들렀다가 읽고 싶은 책이 보이길래 덥석 집어왔습니다.
월든과 시민의 불복종은 한글 번역이 되었지만, 이 책은 한글판이 없어서 못 읽었던 책이거든요.
삼 개월 전에 빌렸던 책을 이제 다 읽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해하는 부분은 삼분지 일도 안되지요.
우선 저는 아는 영어 단어가 별로 없습니다.
특히 초월론(Transcendentalism) 같은 단어는 몇 번을 웅얼거려도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소로우가 즐겨 읽은 책을 보지 않았으니 그것에 대해 의견을 나누지도 못하고,
그가 살던 시절의 콩코드·메리맥 강 풍경을 보지 못했으니,
단어만으로 그 아름다움을 떠올리기엔 무리가 따릅니다.
심지어 등장하는 새나 산짐승의 이름도 생소하지요.
그놈은 눈이 세 개 달렸는지,
뿔 달린 토끼인지 도무지 감이 안 잡힙니다.
하물며 향기 모를 꽃의 아름다움은 어찌 알겠습니까?
알아듣지 못할 말이 잔뜩 입니다.

저는 책을 많이 읽는 편이 아닙니다.
독서가 습관인 사람은 책이란 토양에 뿌리를 내려 영양분을 흡수하지만,
저는 광합성에 더 큰 비중을 두지요.
뿌리를 통해서는 광합성을 도울 요소만 끌어오는 편입니다.
책은 좋은 촉매 역할을 해요.
콩코드·메리맥 강에서 보낸 일주일.
이 책은 쓸데없이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것을 날려 보내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과산화수소에서 산소 분해를 돕는 이산화망간처럼 말이지요.

ViengXai Laos-'A Week on Concord and Merrimac Rivers'

소로우가 여행 중 보고 듣고 느낀 것들. 그리고 사유.

Every people have gods to suit their circumstances; the Society Islanders had a god called Toahitu, “In shape like a dog; he saved such as were in danger of falling from rocks and trees.” I think that we can do without him, as we have not much climbing to do.

-Sunday

Christ was a sublime actor on the stage of the world.

History has neither the venerableness of antiquity nor the freshness of the modern.
If I am not I, who will be?

-Monday

I have climbed several higher mountains without guide or path, and have found,
as might be expected, that it takes only more time and patience commonly than to travel to smoothest highway.

When I inquired if there were any bears. He answered impatiently that he was no more in danger of losing his sheep than his neighbours.

-Tuesday

Mencius says: “If one loses a fowl or a dog, he knows well how to seek them again; if one loses the sentiments of his heart, he does not know how to seek them again... The duties of practical philosophy consist only in seeking after those sentiments of the heart which we have lost; that’s all.”

-Wendsday

Some hard and dry book in a dead language, which you have found it impossible to read at home, but for which you have still a lingering regard, is the best to carry with you on a journey.

The cheapest way to travel, and the way to travel the farthest in the shortest distance, is to go a foot carryng a dipper, a spoon, and a fish-line. Some Indian meal, some salt and some sugar.

The laws of Nature break the rules of Art.

-Thursday

Silence is audible to all men, at all times, and in all places.

-Fri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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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소설가인 김연수 작가의 수필. 청춘의 문장들.

석모도 가는 배

우습습니다.
서른 권도 더 펴낸 소설가이자 시인의 책 중에 처음 읽은 게 에세이라니.
웃었습니다.
한 작가의 추억을 담은 이 수필집엔 저를 소리 내어 웃게 하는 부분이 종종 보였거든요.

읽고 싶은 책이 생기면 우선 메모를 해 둡니다.
그중에 한 권을 읽게 되면, 다시 한두 권이 도서 목록의 새로운 줄을 차지하죠.
그러니 죽을 때까지 책만 읽는다고 해도 도서 목록의 책을 몽땅 읽지는 못할 겁니다.
김연수 작가의 청춘의 문장들은 그 목록에 없던 책입니다.
그냥 문득 ‘청춘’에 관한 책을 찾다가 끌리는 제목을 보고 집어 든 수필집이에요.
‘아, 이 작가는 나와 다른 시대에서 이런 생각을 하며 살아왔구나.’
정 반대의 삶을 살아온 사람을 만난 기분이었어요.
그래서 더 흥미로웠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짜장면을 먹고 싶어서 중국집에 갔어요.
그런데 이 중국집이 짬뽕을 기가 막히게 잘하는 집인 겁니다.
그러니 굳이 여기서 짜장면을 시켜 먹을 필요는 없죠.
그건 다른 데서도 많이 파니까요.
김연수 작가가 내놓은 짬뽕엔 오징어 대신 꼴뚜기가 씹힙니다.
‘이런 게 맛의 비결이구나.’
작가의 문장력에 감탄했지만,
제가 그의 문체를 소화하긴 어렵습니다.
짜장면에 짬뽕 국물을 부으면 좀 그렇잖아요.

제가 쓸 만한 건 꼴뚜기 정도입니다.
가끔은 이렇게 저와 다른 성향의 글을 읽는 것이 즐거워요.
이런 글을 맛봐야 언젠가 맛 좋은 해물 짜장을 만들게 될 테니까요.
그러나 저는 우선 면 삶는 데부터 익숙해져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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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사상가. 인용의 달인 미셸 몽테뉴의 수상록.

몽테뉴와 같은 시대를 살았다면,
저는 다른 언어보다 불어를 우선 공부했을 겁니다.
서로의 사상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기 때문이죠.
독일에선 니체나 쇼펜하우어 같은 학자 타입의 철학자가 많이 났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확실히 흥미롭지만, 저와는 성향이 달라요.
물론 제가 몽테뉴와 도플갱어가 아닌 이상 어찌 생각이 똑같겠어요.
그저 인간으로서 친근감이 들고 끌릴 따름입니다.
수상록을 읽으며 그가 인용의 대가라고 느낀 건,
적절한 부분에 인용구를 잘 배치했다는 느낌을 받아서입니다.
그는 단지 그 글을 오려서 자신의 책에 붙인 것이 아니고,
자신이 씹어 삼키고 소화한 것을 적었습니다.
남의 이야기만 적는 사람의 글은 힘이 없어요.
몽테뉴의 수상록은 태어난 지 한참이 지났지만, 아직도 글이 생기발랄합니다.
그는 수상록에서 여러 주제를 다루었지만, 제가 특히 재미있게 읽은 부분은 죽음에 관한 부분과 교육을 다룬 이야기입니다.
저 역시 그 주제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에요.
비슷한 생각을 하고 살던 옛사람을 만난 것이 반갑기도 한데, 한편으론 서글픕니다.
요즘도 사람들의 생각이 그 시대와 별반 다르진 않으니까요.
뭐 어쩌겠어요.
‘이것이 내가 하는 일이다. 그대는 그대가 좋은 대로 하라.’ - 테렌티우스
라는 말을 내 뱉을 수밖에요.
저는 그저 제 길을 갈 따름입니다.

몽테뉴

몽테뉴가 거짓을 바라보는 시각

‘거짓을 말하다(dire mensonge)’ 라는 것은 그릇된 일을 말하면서 그것이 진실인 줄 생각하는 것이고,
‘거짓말하다(mentir)’라는 말의 정의는 자기 양심에 반대되는 뜻을 말하는 것, 즉 자기가 알고 있는 것과는 반대되는 것을 말하는 경우다.

몽테뉴가 생각하는 죽음

우리 생애의 목표는 죽음이다. 이것이 우리가 겨누는 필연적인 대상이다. 죽음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면, 어찌 우리가 몸을 떨지 않고 한 걸음인들 앞으로 나갈 수 있겠는가. 속인의 치료법은 그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미련해야만 그렇게도 사리를 못 보는 장님이 된단 말인가?

늙은이도 젊은이도 모두 같은 조건으로 이 세상을 떠난다. 누구나 다 방금 인생에 들어왔는데 하는 식으로 이 세상을 떠나고 만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늙었어도 마투살렘의 나이(에노크의 자식, 969까지 살았다고 함. 「창세기」5)에 다다르지 않는 동안은, 체내에 아직도 20년의 수명이 남아 있다고 생각지 않는 자가 없다.

어떤 방법으로라도 죽음의 타격에서 면할 수만 있다면, 송아지 가죽이라도 쓰라면 마다할 내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정이 허락하는 한, 언제나 신발을 신고 떠날 차비를 해야 한다.

이집트 사람들은 잔치가 끝난 다음 회식객들에게 사자(死者)의 큰 초상화를 가져오게 하여 『마시고 놀아라. 죽으면 너도 이 꼴이 되리라.』라고 소리치게 하였다.

앞으로 백 년 뒤에 살아 있지 않으리라고 슬퍼하는 것은 지금부터 백 년 전에 살아있지 않았었다는 것을 슬퍼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히파니스 강에서 하루밖에 살지 않는 작은 짐승이 있다.』라고 말하였다. 아침 여덟 시에 죽는 것은 청춘에 죽는 것이고, 저녁 다섯시에 죽는 것은 노쇠해서 죽는 것이다. 이 순간적인 일을 행 혹은 불행이라 생각하는 것을 보고, 우리들 중에 그 누가 비웃지 않을 것인가? 우리의 일생을 길다 짧다 하는 것은, 그것을 영원과 비교해 보거나 또는 산이나, 별이나, 나무들이나, 기타 딴 동물의 수명과 비교해 본다면 역시 마찬가지로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몽테뉴가 말하는 교육

어린애들이 가야 할 방향을 잘 선택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이 뿌리를 박을 수 없는 일에 그들을 훈련시키려고 헛된 수고를 하며 많은 세월을 허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곤란에 처해서 내 견해로는 그들을 항상 가장 좋고 가장 유익한 일로 지도하며, 우리가 어릴 때의 아이들 동작을 보고 경솔하게 짐작하고 예측하는 바를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보통의 가정교사는 마치 깔때기에 물을 부어넣듯 끊임없이 우리 귀에 잔소리를 퍼붓고 우리는 그가 말하는 대로 되풀이 하기만 할 뿐입니다.

제자의 걸음걸이를 판단하고 그의 힘에 맞추어 가기 위해 자기의 자세를 어느정도로 낮추어야 하나 판단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앞에서 그를 걸어보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선생님은 제자에게 모든 것을 체로 걸러내어 자기 머리에는 단순한 권위와 신용만으로 아무 것도 받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칙이건 스토아 학파나 에피쿠로스 학파의 원칙이건 그것이 자기 원칙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천차만별의 판단을 그의 눈앞에 내보여야 합니다. 그는 할 수 있으면 택할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의문 속에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확고부동한 것은 백치(白痴)뿐입니다.

진리와 이치는 누구에게나 공통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처음에 말한 자의 소유가 아니며, 뒤에 말하는 자의 것도 아닙니다. 내가 말했다고 진리가 아니며 플라톤이 말했다고 해서 진리라는 까닭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도 나도 똑같이 그것을 이해하고 그것을 보고 있으니까요. 꿀벌은 이리저리 꽃을 찾아 다니며 그 뒤에 꿀을 만듭니다. 그 꿀은 전부 그들의 것입니다. 이미 그것은 사향초꿀도 박하꿀도 아닙니다. 이와 같이 그도 남으로부터 빌린 것을, 형체를 바꾸어 섞이고 완전히 자기 자신의 작품을, 즉 자기 자신의 판단을 만들어 내어야 합니다. 그의 교육, 그의 공부, 학습도 오직 이 판단을 만들어 내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연약하고 겁 많은 어린 마음들을 손에는 채찍을 들고 시뻘건 무서운 얼굴로 지도하니, 이것이 아이들에게 공부할 생각을 일으키게 하는 방법이겠습니까? 정당치 못하고 해로운 방법입니다. 아이들의 이익이 있는 곳에는 그 즐거움도 있어야 합니다.

만일 누군가가 자제를 삼단논법과 같은 귀찮은 궤변으로 공박하여 『소금에 절인 햄을 먹으면 물이 마시고 싶다. 물을 마시면 갈증이 풀린다. 따라서 햄은 갈증을 풀어 준다.』라고 말해 보면 어찌 해야 좋겠습니까? 그 따위는 코웃음 쳐주면 됩니다. 대답하기 보다는 정말 코웃음 치는 편이 현명합니다.

공부하려는 의욕과 흥미를 돋구어 주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책을 억지로 짊어진 당나귀가 태어날 뿐입니다. 그들은 채찍에 맞아가면서 주머니 가득히 학문을 쑤셔 넣습니다. 그러나 학문을 잘 쓰려면 그것을 담아 두기만 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수상록 속 인용구

그 운율을 빼버리고, 앞에 있는 글귀를 뒤에 놓고, 마지막 글귀를 처음에 바꾸어 놓아라. 시는 흩어져도 그대는 역시 그 곳에서 시인의 모습을 보리라(호라티우스 「풍랄시」 1의 10)

그는 마치, 추울 때나 더울 때나, 산을 넘고 골짜기를 건너, 토끼를 쫓는 사냥꾼 같다. 그는 이미 잡은 것은 바라보지도 않는다. 그저 달아나는 것만들 쫓아간다(아리오스토 「노한 오르란도」 10의 7)

사랑이란 아름다운 사람의 우정을 얻으려는 노력이다. (키케로)

이것이 내가 하는 일이다. 그대는 그대가 좋은 대로 하라.(테렌티우스 「헤아우톤티모로우메노스」 1의 1의 28)

이제 늙은 농부는 머리를 흔들면서 한숨을 쉬고 지난날을 지금과 비교하여 가끔 부친의 행운을 찬양하며, 옛날 사람들이 얼마나 신앙심이 깊었던 가를 되풀이한다.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 2의 11의 65)

본인의 뜻에 반하여 그 목숨을 살리는 것은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세네카 「서간」 77)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다고 하는데, 그대는 대리석을 깎고 무덤 대신에 집을 짓는다(호라티우스 「카르미나」 2의 18의 17)

관능적 욕구에서 해방된 것을 연령에 감사한다. (소포클레스 「연령론」14)

좋은 수확을 하려면 손으로 씨를 뿌리지 않으면 안 된다. 부대로 뿌려서는 안 된다. (그로토우스 리프시우스)

누구에게나 자기의 똥은 냄새가 좋다(에라스무스 「격언집」3의 4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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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시화 시인의 삶 속에서 건져 올린 몇 편의 이야기. 삶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들.

저는 류시화 시인의 시를 참 좋아합니다.
그의 수필을 읽을 때면 항상 실망하게 되는데,
그것은 시만큼 감동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시를 쓰지 않았다면, 이런 아쉬움은 없었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는 훌륭한 이야기꾼이기도 해서,
그의 경험 속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냅니다.
아무런 소득이 없어도 절망하지 않고 언제나 행복에 넘쳐있던 도둑이
이슬람교 신비주의자 하산에게 큰 가르침을 내렸다는 이야기나,
죽은 뒤에도 친구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옷 속에 폭죽을 넣고 다녔다는 친구의 유언
“친구여. 내가 죽으면 입고 있는 옷 그대로 입혀서 화장해 주게.”
등의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들어있는 책이에요.

류시화 시인의 시를 읽을 때면,
‘사람은 뭔가 타고난 능력이 있긴 한가보다.’라고 생각하게 되요.
제가 가끔 시를 끄적인 시를 보면,
다람쥐가 알맹이를 빼먹은 밤껍질 처럼,
보잘것없는 껍데기의 느낌을 받습니다.
스스로 그렇게 느끼니 남에게 보일 수도 없죠.
하지만 류시화 시인의 시는,
밤나무에서 막 떨어져서 언덕을 굴러 내려가는 밤송이 같아요.
신선한 힘이 느껴지거든요.
혹 모르죠.
저도 한 이십 년 시를 쓰다 보면.
시구에 생명을 담아내는 내공이 쌓일지도 말에요.
지금의 저는 아름다운 시를 쓸 수도 없고,
소설처럼 잘 짜인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도 없기에,
투박한 수필을 써 나갈 뿐입니다.

나메오 가는길 - 라오스

류시화 시인이 들려주는 옛 이야기

“언제,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프란치스코는 아무런 말없이 눈이 쌓인 산꼭대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아마 저 산에 눈이 녹고 꽃이 필 때쯤이면.”
그 말이 끝나자 갑자기 눈이 녹고 산마다 꽃이 피었다.
-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글라라의 사랑 이야기.

“시간이 없어서 명상할 수 없다는 것은 변명이다. 명상하지 못하는 진짜 이유는 마음이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 어느 한 선사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사람이란 말인가?”
“뭐? 그럼 내가 사람이 아니고 대체 뭐란 말인가?”
“부처지. 하하.”
- 일본 메이지시대 진언종 운쇼와 황실대학의 철학교사 탄잔의 대화

공감하는 류시화 시인의 한마디

명상을 잃어 버린 종교는 맹목적이 되며 종교 없는 명상 또한 무목적인 것이 되리라.

류시화 시인의 시 한 편 - 길 위에서의 생각

집이 있는 자는 빈 들녘의 바람을 그리워한다.
나 집을 떠나 길 위에 서서 생각하니
삶에서 잃은 것도 없고 얻은 것도 없다.
모든 것들이 빈 들녘의 바람처럼
세월을 몰고 다만 멀어져갔다.
어떤 자는 울면서 웃을 날을 그리워 하고
웃는 자는 또 웃음 끝에 다가올 울음을 두려워 한다.
나 길가에 피어난 꽃에게 묻는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았으며
또 무엇을 위해 살지 않았는가를
살아 있는 자는 죽을 것을 염려하고
죽어가는 자는 더 살지 못했음을 아쉬워한다.
자유가 없는 자는 자유를 그리워하고
어떤 나그네는 자유에 지쳐 길에서 쓰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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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의 오두막 생활을 담은 한 권의 편지.

게으름과 사치는 버려야 할 악덕이고, 부지런함과 검소함은 익혀야 할 미덕이다.

법정 스님께선 게으름과 사치를 묶어서 말씀하시고,
부지런함과 검소함을 묶으셨지만,
저는 관점이 좀 다릅니다.
멈추어야 할 땐 게으르고, 행동할 땐 부지런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올바른 방향으로 한걸음 내딛는 것을, 무턱대고 열 걸음 내 딛는 것보다 선호합니다.

중생은 부처를 제도하고 부처는 다시 중생을 제도한다는 말이 있다. 모든 부처와 보살은 오로지 중생이 있기 때문에 불도를 성취한다. 따라서 중생이 없다면 부처와 보살은 할 일이 없어져 끝내 불도를 이룰 수 없다.

불교에 깊은 관심이 있지만, 항상 마음에 걸리던 부분을 법정 스님께서 이 책에 적어주셨습니다.
중생과 보살, 그리고 부처로 나뉘는 것이 영 불편해요.
효율적인 측면에선 이렇게 각자 전문분야를 맡아 사는 것이 좋겠죠.
중생은 구도자의 배를 채워주고, 가르침을 받습니다.
스님은 중생의 정신을 채워주고, 밥을 받습니다.
분명 괜찮은 품앗이 방식이지만, 저는 왠지 이 방식에 거리를 느껴요.

예전에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월든을 읽으며 생각했습니다.
‘아. 나도 언젠가 이렇게 모든 것을 놓는 삶을 살아보리라.’
전기도 수도도 없이 자연과 벗 삼아 사는 단순한 삶.
법정 스님의 오두막 생활기를 읽으니 그런 생각이 더욱 강렬하게 다가오는군요.
봇짐 하나 매고 떠도는 생활을 시작한 이래로 짐이 많이 줄었지만,
아직도 저에겐 필요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컴퓨터만 해도 그래요.
오랫동안 옆에 두고 편리하게 쓰는 게 익숙해져서 그런지.
제 생활에 필수품이라고 느껴집니다.
하지만 컴퓨터가 없다면?
없는 대로 살아가겠죠.
한 곳에 눌러살 작정을 하면 짐이 점점 많아집니다.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하며, 심지어 그것까지 필요해집니다.
이사라도 한번 하려면 난리가 나요.
버리기엔 아깝고, 들고 갈 수 없는 물건들에 아쉬움이 남죠.
우리가 삶에서 죽음으로 이사를 할 땐,
챙겨갈 수 있는 물건이 없습니다.
외적인 요소로 인생을 가득 채웠다면,
모두 버리고 가는 게 아쉬울 수밖에 없어요.

나메오 가는길 - 라오스

마음에 드는 인용구 - 법정스님의 오두막 편지

입 안에 말이 적고, 마음에 일이 적고, 뱃속에 밥이 적어야 한다. 이 세가지 적은 것이 있으면 신선도 될 수 있다.
- 옛 사람

사막을 건너려는 강물에게.
“네 자신을 증발시켜 바람에 네 몸을 맡겨라. 바람은 사막 저편에서 너를 비로 뿌려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는 다시 강물이 되어 바다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 수피즘의 우화

노승은 일찍이 행각하면서 죽 먹고 밥 먹는 두 때만 잡된 마음에 팔렸을 뿐 별달리 마음을 쓸 곳이 없었다. 만약 이와 같지 못하다면 출가란 매우 먼 일이 될 것이다.
- 조주

훌륭한 나그네는 어디로 갈 것인지도 모르고 또 어디서 왔는지도 모른다. 심지어 자신의 성이나 이름도 모른다는 것이다. 도를 구하는 사람은 정적 속에 살면서도 고독을 느끼는 일이 없고, 시끄러운 장바닥에 있으면서도 소란스러움을 모른다. 그는 또 말하기를 ‘나는 도를 깨달은 사람이 아니라 도를 사랑하는 사람이다.’라고 한다.
- 도융(屠隆)의 여행기 명료자유(冥寥子遊)

정치가란 시냇물이 없어도 다리를 놓겠다고 허풍을 떠는 자들이다.
- 니키타 세르게예비치 흐루시초프 (Nikita Sergeevich Khrushchyov)

구름은 희고
산은 푸르며
시냇물은 흐르고
바위는 서 있다.
꽃은 새소리에 피어나고
골짜기는 나무꾼의 노래에 메아리친다.
온갖 자연은 이렇듯 스스로 고요한데
사람의 마음만 공연히 소란스럽구나.
- 소창청기(小窓淸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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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시민의 불복종과 몇 편의 수필 모음.

저는 그의 글이 참 좋습니다.
솔직하고 유머가 풍부해요.
그가 추구하는 삶을 적은 몇 편의 글은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죠.
<월든>과 이번에 읽은 <시민의 불복종>은 그의 대표작입니다.
그러나 모든 책이 널리 알려진 건 아니에요.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의 일주일>이란 책은 초판 1천부 중 삼백 권도 안 팔렸다고 하네요. 팔리지 않은 책을 집으로 가지고 온 그는 저널에 다음과 같이 썼다고 합니다.
‘나는 900권이 조금 못 되는 장서를 가지고 있는데 그중 700권 이상의 책은 내가 직접 저술한 것이다.’
피식 웃음이 나옵니다.
제가 그 시대에 살았더라면 분명 한 권 사 보았을 텐데 아쉽네요.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글에는 생동감이 있습니다.
머리로 생각한 것을 손으로 적어내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경험한 것을 가슴으로 뿜어내기 때문이죠.
<시민의 불복종>과 <야생 사과> <돼지 잡아들이기>등의 수필을 엮은 이 책 또한 에너지가 넘칩니다.
이 좋은글을 우리글로 옮겨주신 강승영 번역가님. 고맙습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와의 교감

옳고 그름을 실질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다수가 아니라 양심인 그런 정부는 있을 수 없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기계로서, 자신의 육신을 바쳐 국가를 섬기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이 판단력이나 도덕 감각을 자율적으로 사용하는 일은 전혀 없으며 오히려 그들 스스로가 자신을 나무나 흙이나 돌과 같은 위치에 놓아버린다.

내가 만약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으로부터 부당하게 널빤지를 빼앗았다면 나는 비록 나 자신이 물에 빠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 널빤지를 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덕을 찬양하는 사람이 999명이라면 진짜 덕인은 한 사람뿐이다.

투표는 모두 일종의 도박이다. 장기나 주사위놀이와 같다. 단지 약간의 도덕적 색채를 띠었을 뿐이다. 도덕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옳으냐 그르냐 노름을 하는 것이다.

왜 정부는 항상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며, 코페르니쿠스와 루터를 파문하고, 조지 워싱턴과 프랭클린을 ‘반역자’라 부르는가?

부자는 언제나 그를 부자로 만들어준 기관에게 영합하게 마련이다. 단언하는 바이지만,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덕은 적다. 왜냐하면 돈이 사람과 그의 목적물 사이에 끼여들어 그를 위해 그것을 획득해 주기 때문이다.

돈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유일한 새로운 문제는, 그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어려우면서도 부질없는 문제 뿐이다. 이리하여 부자의 도덕적 기반이 발밑부터 송두리째 흔들리게 된다. 이른바 ‘수단’이란 것이 늘어갈수록 삶의 기회들은 줄어든다.

학교 교사는 목사의 생활비를 위해 세금을 내야 하는데, 왜 목사는 학교 교사를 위해 세금을 내지 않는지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름다운 처녀를 보면 나는 그녀의 장밋빛 볼에 관심을 갖지, 그녀가 주로 무슨 음식을 먹는가를 알아내려고 하지는 않는다.

자연을 거부하지 말라. 인간은 겨우 몇 가지 자연식품이 건강에 좋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뿐이다. 그러나 자연 전체가 우리 몸에 좋다는 것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 ‘자연’은 건강의 또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으며, 각 계절은 건강의 각기 다른 상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농부들이 접붙이기 위해 고르는 사과들은 그들이 지닌 어떤 발랄한 맛 때문이 아니라 대개는 맛이 순하다거나 크고 열매를 많이 맺는 특성 때문에 선택이 되며, 과일의 아름다움보다는 매끈하고 흠이 없는 점 때문에 선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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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으로 추대 받는 위대한 영혼. 간디의 자서전.

문인 타고르가 마하트마(위대한 영혼)라고 불렀던 정치인 간디.
이백 쪽 내외의 책을 주로 즐겨 보는 저에게 이 자서전은 부담스럽게 두껍습니다.
지루한 부분도 없진 않았지만, 대체로 재미있게 읽었어요.
이 책을 보면서 어떤 희망을 품어 보기도 했고, 좌절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고타마 싯타르타나 예수 그리스도 같은 삶을 산다면 이상적이겠지만,
지금의 현실로는 그게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간디라면?’
이 자서전은 모든 사람이 간디 정도의 삶을 살 수는 있겠다는 희망에 차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본받을 이가 나타나면,
좋은 점을 본받기보다는 ‘성인’이라는 부류로 분류해서 치워버리는군요.
‘저 인간은 사람이 아니야.’ 라면서 말이죠.
저는 간디가 ‘성인’으로 불리는 사실에 깊은 좌절감을 느낍니다.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구도자 간디.
이 한 사람이 쓴 자서전은 저의 관심분야에 대해 숙고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간디 동상

인상 깊은 글귀 - 간디 자서전

배움

간디에 의하면, 개인의 다양한 능력을 발달시키고 그의 인격을 도야하며 그를 사회의 건전한 성원이 되도록 훈련하는 일반교육은 다만 지성과 정서에 관한 교육이 아니고 전인간-몸과 마음과 혼-의 교육인, 몸과 마음과 정신을 다같이 가장 잘 발전시키는 교육은 지능의 사용에 국한되는 읽고 쓰기의 매개 수단을 통해서는 행해질 수 없고, 손과 머리와 마음을 동시에 사용케 하는 모종의 유용한 공작을 과학적으로 가르침으로써 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참된 우의란 혼과 혼의 하나됨인데 세상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것이다. 오직 같은 성격 사이에서만 우정은 가치있는 것이 될 수 있고 또 오래 갈 수 있다.

말을 믿을 수 없는 데 증명서를 가지고 있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우리의 생활 양식이 다른 것, 우리의 검소한 버릇, 근소한 소득으로 만족하는 우리의 성질, 건강과 위생의 원리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 주변을 꺠끗하고 산뜻하게 하기를 게을리하는 버릇, 우리의 인색한 성질로 집수리를 할 줄 모르는 것, 이 모든 것에다가 종교가 서로 다른 것까지 한데 합하여져서 인도인에 대한 적개심의 불길에 부채질을 해주었다.

오늘날까지 금화로 물건을 헤아리던 사람이 갑자기 잔돈에 지나지 않는 동전으로 계산할 수가 있을까? 마치 코끼리가 개미의 척도를 가지고 생각을 하려 한다면, 세상 없는 정성을 가지고 한다 해도 어떻게 할 길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국 사람이 인도인의 방식으로 생각하거나 법을 만드는 것은 도저히 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과 그가 하는 행위는 서로 별개의 것이다. 선한 행실은 칭찬을 받아야 하고 악한 행실은 비난을 받아야 하는 것이지만, 그 행실을 한 사람은 선하건 악하건, 언제나 그 경위대로 존경을 받든지 그렇지 않으면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제가 충분히 증험해 보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이 믿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진리를 흐리게 하는 일이다.

사람을 쉽게 믿는 것은 내가 실제로 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사업을 해 보자는 야심이 있어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 야심은 나 자신에보다도 내 동료들에게 걱정을 끼치는 일이 더 많았다.

우리는 이 썩어질 몸을 장식하고, 덧없이 지나 버리는 이 몇 분을 더 살기 위해 수많은 남의 생명을 희생 시키는걸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감각의 쾌락을 누리려는 동안에 우리는 결국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능력까지 잃어버리고 만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우리 눈앞에 스치고 지나가건만 소경보다도 더 그것을 보지 않으려 하고 있다.

선생은 제자에게서 몇 마일을 떨어져 있으면서도 그의 생활을 통해 그들의 정신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내가 만일 거짓말쟁이라면, 아이들더러 참되게 말하라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겁쟁이 선생은 결코 자기 제자를 용감하게 만들 수가 없고, 자제가 뭔지 모르는 사람은 결코 자기 제자에게 자제의 귀함을 가르칠 수 없을 것이다.

대중의 태도에는 아주 두드러진 두가지 차이가 있다는 것. 즉 흥분되는 일은 굉장히 좋아하고, 조용하고 건설적인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차이는 지금도 다름이 없다.

진리의 영을 얼굴와 얼굴을 맞대고 보려면 가장 하잘것 없는 미물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은 다음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향해 애타게 올라가는 사람은 생활의 어떠한 면도 등한히 할 수는 없다. 그것이, 나의 진리에 대한 헌신이 나를 정치로 끌고 들어간 이유다. 그러므로 나는 털끝 만큼도 주저함 없이, 그러면서도 겸소한 마음으로 말할 수 있다. 종교는 정치와는 상관이 없다는 사람들은 종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함을.

교활한 정욕을 정복하기란 내가 보기에는, 무력을 가지고 세계를 정복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인도에 돌아온 후도 언제나 내 속에 보이지 않게 정욕이 잠재해 있는 것을 경험하곤 한다.

단식 예찬

일반적으로 성욕을 억제하는 것은 단식을 아니하고는 불가능 하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그이와 얼굴을 맞대고 보기를 원하는 구도자에게는 양으로나 질로나 음식을 절제하는 것이 생각과 말을 절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절대로 필요하다.

과일식을 시작했지만 절제의 견지에서 볼 때는 과일식이나 곡물식이나 별 차이가 없었다. 내가 보면, 맛에 빠지기는 과일식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며, 버릇이 되면 과일식이 도리어 더 심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명일에 단식을 하거나 일식을 하는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참회나 혹은 그와 같은 것을 할 경우가 생기면 나는 그것을 기꺼이 단식의 목적에 이용했다.
그러나 또 몸을 힘써 바짝 말리면 말릴수록 음식은 더 맛이 있고, 식욕은 점점 더 왕성해 진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됐다. 단식은 절제의 무기가 될 수도 있지만 또 탐닉의 강력한 무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사람은 맛을 즐기기 위해 먹어서는 안되고 오직 몸을 지탱하기 위해서 먹어야 한다. 각 감각기관이 몸을 섬기고, 몸을 통해 혼을 섬길 때 그 특유의 맛은 없어지고 만다. 그리고 그때 가서야 자연히 의도하는 길대로 작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공공 사업

나는 첫 출발에서부터 공공사업은 빛을 지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른일은 다 그렇지 않을는지 몰라도 금전에 관해서만은 누구든 약속을 그대로 믿어서는 안된다. 나는 이때까지 자기 입으로 내겠다고 한 회비를 곧 내는 사람을 본 일이 없는데, 나탈 인도인들도 그 법칙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영구기금이란 그 속에 그 기관의 도덕적 타락의 씨가 들어 있다. 공공기관이라는 것은 그 뜻이 공중의 찬동과 공중에게서 나오는 기금으로 운영된다는 데 있다.
그런 기관이 공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게 될 때 기관 존립의 권리를 이미 버리는 것이다. 영구기금에 의해 유지되는 기관은 흔히 공중의 의견을 무시하는 일이 있고, 공중에 반대되는 처사를 하는 책임이 그것에 있는 수가 아주 많다.

봉사란 버섯처럼 돋아나는 것은 아니다. 첫째로 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하고, 다음은 경험이다.

우리나라는 너무 혹독한 가난과 기근 속에 빠져 있기 때문에 해마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을 거지로 만들어 버리므로 먹을 것을 얻기 위해 필사적인 경쟁을 하는 그들은 체면도 자존심도 돌아볼 줄을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자선가들은 그들에게 일거리를 주어 제 손으로 밥을 벌어 먹도록 하게 할 생각은 않고 동냥만 주고 있다.

옛날 인도 사상에서 나눈 인생의 네가지 목적
1. 재산 (Artha)
2. 사랑 (Kama)
3. 의무 또는 법 (Dharma)
4. 모크샤 (Moksha) - 세속과 정욕의 모든 구속과 유혹을 벗어 버리고 완전한 정신적 자유에 이른 경지.

인용구

감각의 대상을 골똘이 생각하면 집착이 생긴다.
집착에서 욕망이 일어나고 욕망은 불타올라 맹렬한 정욕이 되고 정욕은 무분별을 낳는다.
- 바가바드 기타(Bhagavad Gita)

당신도 알듯이 내 번역은 언제나 직역이 아니지요. 그 정신을 그려내면 그만이오.
나는 당신처럼 말쑥한 물건이 아니오. 최소한의 먹을 것, 최소한의 입을 것이면 되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내 책에서 나오는 얼마 안되는 돈과 친구들이 주는거면 넉넉해요.
- 나라얀 헴찬드라(Narayan Hemchandra)

우리가 사업을 경영하는 것은 박애심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익을 위해서 하지요. 우리는 주주들을 만족시켜야 합니다. 물가는 수요의 지배를 받습니다. 벵골 사람들은 자기네의 운동이 스와데시 천의 수요를 자극시켜서 필연적으로 그 값을 오르게 한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었습니다. 그들은 믿었습니다. 아주 완전히 믿었지요. 그래서 공장주들이 그렇게 까지 완전히 이기적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기네의 조국이 이렇게 어려운 때에 거기에 대해 배신행위를 하고 심지어는 외국 천을 스와데시 천이라고 속여서 팔 만큼 비애국적일 줄은 몰랐던 것입니다.
- 공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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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고 집어온 책. 조지 오웰의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

작년 3월.
북미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길고 긴 시간동안 앉아있느라 좀이 쑤셨죠.
그때 영화를 찾아보니 조지오웰의 1984가 있더군요.
흔들리는 비행기 안에서 보기 딱 좋은 영화였습니다.
실감이 났거든요.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은 어릴적 읽었겠지만...
잘 기억 나진 않습니다.
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리곤, 반 정도 읽었습니다.
책의 1/3은 저에게 정말 지루하고 재미가 없더군요.
그럼에도 나머지 부분은 모두 재미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하는 책입니다.
몇몇 부분에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매력이 있거든요.
by 月風

조지 오웰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

조지 오웰

에릭 아서 블레어.
그는 20대 후반에 조지 오웰이라는 필명을 쓰며 첫 책을 출간합니다.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이라는 책인데요.
'나는 왜 쓰는가'에도 일부가 포함되어 있어서, 참 흥미진진하게 읽었습니다.
그는 '나는 왜 쓰는가?'라는 물음에 답합니다.
글을 쓰는 동기는 4가지가 있다고 말이에요.

  • 순전한 이기심 - 똑똑해 보이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고싶은, 사후에 기억이 되고싶은, 어린시절 자신을 푸대접한 어른들에게 앙갚음을 하고 싶은 등등의 욕구를 말한다. 이게 동기가 아닌척, 그것도 강력한 동기가 아닌 척하는건 허위다.
  • 미학적 열정 -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또는 낱말과 그것의 적절한 배열이 갖는 묘미에 대한 인식을 말한다.
  • 역사적 충동 -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을 알아내고, 그것을 후세를 위해 보존해두려는 욕구를 말한다.
  • 정치적 목적 -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어떤 사회를 지향하며 분투해야 하는지에 대한 남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욕구를 말한다. 다시 말하지만, 어떤 책이든 정치적 편향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인 것이다.

나는 내가 글을 쓰는 동기들 중에 어떤 게 가장 강한 것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게 가장 따를 만한 것인지는 안다.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건대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 - 조지 오웰 (George Orwell)

조지 오웰이 이야기 하는 글쓰는 동기에 어느정도 동의합니다.
저는 동기가 어떻든 살아있는 글을 쓰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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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벗 삼아 떠도는 즐거움.
이를 통해 저는 영혼을 유지합니다.
21세기인 요즘에도 이렇게 생명이 넘치는 자연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이전에 살던 사람들이 자연을 그럭저럭 잘 보존해 주었기 덕분이에요.
백 년 전에는 오늘날처럼 숲을 찾아 먼 길을 가지 않아도 되었겠죠.
창문만 열어도 자연을 느낄 수 있던 시절.
그 때 존 뮤어는 환경운동 단체인 시에라 클럽을 만들었습니다.
미래의 사람들에게도  자연을 누릴 수 있는 기쁨의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자연을 벗 삼아 지내왔고,
죽을 때 까지 자연을 친구로 또한 스승으로 가까이서 접했습니다.
자서전엔 존 뮤어가 본격적인 여행에 나서기 전 까지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어린시절 만났던 동물, 곤충, 식물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합니다.
딱따구리  한 마리.
사향쥐 한 마리.
심지어 꿀벌 한 마리를 만났을 때도.
존 뮤어는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워 하고, 깊은 대화를 나누죠.
안타까웠던 것은 제가 이 책에 나오는 자연의 구성원들에 대해 익숙하지 않다는 겁니다.
기껏 익숙한 동물이라면 개, 고양이, 비둘기 정도일까요?
녹색보다 회색이 짙은 도시에서 만날 수 있는 자연은 한정되어 있으니까요.
존 뮤어 덕분에 백 년 전 자연을 간접적으로 나마 만나게 되어 기뻤습니다.
 
"난 항상 자유롭고 행복했으며, 가난하고 풍요로웠다." - 존 뮤어 (John Mu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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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가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은 뭘까?
이 책엔 정신과 의사인 저자와 달라의 라마가 행복에 대해 나눈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슬픔.
분노.
두려움.
이런 부정적인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면, 삶이 더 행복하겠죠?
달라이 라마는 말합니다.
부정적인 감정의 자리에 '자비심'을 채우면 행복해 질 수 있다고요.
'나도 행복을 위해 자비심을 키우고 싶다.'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을 읽기 얼마 전.
문득 자비심에 대한 생각이 들고 난 뒤라 그럴까요?
책에 몰입이 더 잘 되었어요.
한장 한장 책장을 넘기다가, 흥미로운 부분을 발견했습니다.
'어? 이건 내 이야긴 데.'
'왜 자비심이어야 하는가.' 장에서 달라이 라마는 자비심의 중요성을 설명합니다.
"물론 어떤 사람에게 자비심의 중요성을 설명하려고 하는데,
그가 아주 냉담하고 개인적이며 오직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을 가진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사랑하는 연인이나 아주 가까운 사람의 고통조차도 함께 느낄 수 없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에게도 사랑과 자비심을 갖는 것이 자신의 이익을 얻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하면서 그 중요성을 강조할 수 있습니다."


전 참 이기적이고 냉담하게 살아왔습니다.
'자비는 무슨. 세상은 혼자야.'
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죠.
앞으로는 저에게도 이로울 것이 없고,
남에게도 이로울 것이 없는 이기심을,
자비심으로 바꿔 가려고 합니다.
자비심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저도 이기심의 자리를 자비심으로 채울 수 있겠죠?
수 많은 사람을 죽여 손가락을 목에 걸고 다녔던 앙굴리 마라 존자가,
잘못을 뉘우친 후에, 깨달음을 얻었듯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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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 헨리 데이빗 소로우(Walden - Henry David Thoreau)[월든,walden,헨리 데이빗 소로우,Henry david thoreau,도덕경,노자,무위자연,자연에동화된 삶]

이미지출처 : leeyoon.com

참 궁금한것도 많지..

스릴러나 공포영화를 보면 '너의 호기심이 죽음을 불렀다.' 라는 대사 참 많이 나오는데,

설마 호기심에 책 읽다가 죽지는 않겠지.. 라는 생각으로 이 책을 읽게되었다.

앞서 읽었던 4시간,여행의 기술에서는 '월든을 읽고..' '월든의 내용을 참고하면..' '소로우는...' '그는...'

등등.. 참 이책에 대한 언급이 수도없이 많았음은 물론,

추천서적란에도 딱 나와있었다.

책은 내가 태어나기 백년쯤전에 쓰여진 책으로,

'참 사는데 필요한거 많이 없다.'

라는걸 말하는 책이었다.

나는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태어나서,

십수년간 물질만능주의에서 살아남는법에 대한 교육이라고 포장된 세뇌를 당했고,

당연히 죽을때까지 내 혼을 태워서 일을 해야만 생명을 유지하고 먹고 살 수 있는줄로 생각했었다.

물론 그 먹고 산다는 기준이 소득 수준에 따라서 방한칸에 밥은 먹고다니는 정도에서,

경비행기정도는 끌고다니고, 리조트 몇개정도 가지고 있는것까지 다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 '필수품'이 줄어들면, 그만큼 게으름을 피울 수 있다!"

라고 나를 감동시켰다. 참 당연히 필요한게 적으면 그만큼 덜 일해도 되는데,

왜 난 지금까지 더 많이 일해서 더 많은걸 가지려고만 생각했을까.

지름신이 강림해서 사는 4+1 칫솔살균기,멋진조명효과를 가진 오르골,한정판 쓰레기봉투 압축기같은건 사실 없어도 사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데 말이다.

나는 아직 휴대전화나 컴퓨터가 없이 한달이상 지내는 현대인을 내 주위에선 못봤다.

이것들이 과연 필수품인가. 아니면 편의품인가.

없으면 밥을 굶는다면 필수품이겠고.^^;

아니라면 편의품이 아닐까?

나는 그동안  '필수품' 이라고 생각되는것들을 너무 많이 사들였었다는 생각이든다.

가끔은 내가 물건의 소유주인지, 물질의 노예인지 하는 생각이 들정도로 이것들이 없다면 참 불편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며칠만 밖에 나가봐도, 없이 살 수 있는것 투성이다.

이 책은.

소유욕을 충족시켜줄 수많은 것들을 위해서,
짧은인생을 일만 하면서 지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2년간 직접지은 통나무집에 산 경험을 토대로 우리에게 보여준다.

정말.

가뭄의 단비.
사막의 오아시스.
호두과자의 호두
붕어빵의 붕어. <- 이건 아닌가?-_-;
와 같은 멋진 책이다.

이 책은.
여행자의 필독서.
주 20시간 이상 일하는 직장인의 구원서.
밤낮이 바뀐 사업가를 구원해줄 메뉴얼.
정력증가를 원하는 남성의 정력제.
피부미용과 주름살개선을 꿈꾸는 여성의 지침서.
성장기 발육에 도움을 주는 청소년의 성장제.
세계 최고의 개미달리기 조련사가 되기 위한 조련서.
어쨌든 이책은 즐겁게 살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필독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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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사랑이었네 - 한비야 에세이[그건 사랑이었네,에세이,한비야]

이미지출처 : stonetiger.egloos.com

이 책이 출판되고,

지하철을 탈때면, 두어번에 한번쯤은 이책을 읽고있는 승객들을 볼 수 있었다.

'아. 저책.'

내가 여행을 떠날꺼라며 회사를 그만두고 기숙사의 짐을 빼던날.

쓸때없이 늘어난 짐을 함께 옮겨주신 용달차 아저씨가 말씀하신

'대단한 여자' 가 쓴 책이구나.

라고 생각했었는데,

어느날 보니 어머니께서 사서 읽고 계셨다.

무협지나 소설 그리고 관심분야의 책을 제외하곤 잘 읽지 않는 나.

지하철 타고다닐때는 읽을꺼리던 놀꺼리던 있어야 시간이 빨리간다는 진리를 초등학생때 이미 깨우친 나는,

주로 핸드폰 게임따위를 하며, 시간을 보내지만, 혹은 조그마한 수첩에 낙서도 하고 가끔은 이렇게 책도 읽는다.

난 이분이 쓴 책을 단 한번도 읽어본 적이 없었기에,

책을통해 이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알아가는데 도움이 되었다.

어려운 말이 난무하지도 않고, 외국의 어느 소설처럼 세빌리아 블랑코 드 키르케르호케르바코옹 같은 긴 이름의 등장인물들을 외우다가 결국엔 다 그놈이 그놈같아지는 책도 아니라서 책은 술술 읽혀 졌다.

마지막장까지 다 읽고 느낀점은.

'이분은 정말 멋지고, 힘이 넘치는 분이구나.'

그리고,

'나와 다른 인생관을 가진 사람이구나.'

혹은

'나와 무척이나 다른 패턴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라고 느꼈다.

여행을 떠나고 싶어서 자유로운 영혼이 된 내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어쨌거나 여행을 떠나라.' 였고,

또 하나는 어디선가 보았던,

내가 장미인지 목련인지 혹은 소나무인지 단풍나무인지 생각해보라는 구절의 연장선과 같은 구절이었다.

'나는 사막의 낙타인가, 숲의 호랑이인가.'

이책은 나만큼이나 독서를 안하는 사람들에게 참 좋은 책이다.

저자가 책을 많이 읽고 좋은책을 여러권 추천해놨으니, 마음에 드는 책을 쉽게 고를 수 있는 이정표가 되어 줄 수 있으니...

물론 1년에 365권 읽기 같은 목표를 정해놓고 스트레스 받기는 싫지만 말이다.: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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