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레슬러

함성에 묻힌 인생. 더 레슬러.

예전부터 보고 싶던 영화를 틀었다.
자세를 바로 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영화감상을 시작하려 하는데...
첫씬을 보니, 아뿔싸! 이건 전에 봤던 영화잖아.
요즘 영화 잘 보지도 않는데 봤던 영화를 또 본다니.
TV를 끌까 말까 망설이다가 기억이 영 희미해서 다시 한번 보기로 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전에는 어떤 느낌으로 이 영화를 봤었는지 떠오른다.
‘맞아. 나도 프로레슬링 좋아했었지. 얼티밋 워리어, 헐크호건, 언더테이커...’
‘아프겠다. 참 안되었군. 저 노인네.’
뭐 이런 생각을 하며 봤었다.
그는 내게 남이었고, 그저 영화 속 캐릭터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좀 다르게 다가왔다.
지금 이웃 중 누군가일 수도 있고, 어쩌면 나. 혹은 지인의 머지않은 미래 생활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지난겨울 지인들과 함께한 술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제일 두려운 건, 나중에 늙어서 폐지 줍는 할머니가 되는 거야.”
다른 지인도 그에 공감하며 자기도 그게 제일 두렵단다.
공부도 많이 했고, 지금은 대기업에서 죽어라 일하는 그녀가 폐지 줍는 할머니가 되리라 생각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이런 시대에 살고 있다.
기술은 점점 발전하고, 기계가 대체할 수 있는 일자리는 사라진다.
설령 어떤 뛰어난 기술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팔아먹지 못할 기술이라면 생존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영상을 보면, 4개국어를 하는 사람이나 로봇을 설계하는 기술자,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한 고학력자가 박스를 줍는 정도가 아니라 노숙자로 생활한다.

지금 어느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내일도 그 자리에 있으리라는 것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나와 주위 사람들은 운이 좋아서 박스 줍는 일을 면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추세로 볼 때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사람은 더 늘어날 것이다.
누군가는 박스를 주울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박스도 줍지 못할지도 모른다.
일하는 사람은 적어지겠고, 업무 강도는 높아지겠다.
스트레스로 머리가 빠질 지경이어도 생존을 위해 일은 하겠지만, 세금이 점점 높아질 것이다.
그리고 그 세금은 박스도 줍지 못해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생활비를 대 주는데 일조할 것이다.
한쪽에선 일이 넘쳐 죽겠고, 한쪽에선 일이 없어 죽겠는 현실에서 빡빡하게 살아가다가 결국은 모두 죽겠지.
랜디가 단지 프로레슬링이 좋아서 피 흘리며 경기를 뛰었을까?
자의 반 타의 반.
고객 만족이 큰 가치인 사업 분야에선 별로 마음에 내키지 않아도 자기 최면을 걸어야 한다.
‘난 원래 이걸 좋아하는걸. 난 고객님 만족을 위해 태어난 것을...’
그래야 살아남기 때문이다.

프로레슬러의 피는 밖으로 튀고,
사무실에서 조용히 일하는 사람들 피는 안에서 터진다.
더 레슬러.
이 영화는 이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가는 현대인을 다룬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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