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된 사람과 다를 게 없는 야훼의 판타지. 구약 성경.

시커멓고 두꺼운 성경책.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내려간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몇 번이고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죠.
구약을 펼쳐 창세기를 읽고 나면, 더는 읽고 싶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 오디오 북으로 구약을 들었습니다.
중간마다 구약 성경책을 찾아보며 읽으니 재미가 쏠쏠하더군요.
구약 성경엔 정말 놀라움이 가득했어요.
첫째로 놀란 건 지금 세상에 야훼와 같은 사람이 넘쳐 난다는 겁니다.
어떻게 신과 같은 존재가 넘쳐 나느냐고요?
인간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신이기 때문이죠.
만약 그를 인간이라고 가정한다면,
티끌만큼의 존경심도 우러나오지 않습니다.
이런 망나니가 따로 없는걸요.
자기가 가진 힘으로 다른 사람을 부리려 들고,
수틀리면 죽여버립니다.
그가 유일하게 잘하는 건 당근과 채찍을 이용해 사람을 부리는 일입니다.
‘내 말을 들으면 상을 내리리라.’
‘너 내가 시킨 대로 안 했네? 그럼 죽어라.’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가 이제 시혼과 그의 땅을 네게 넘기노니 너는 이제부터 그의 땅을 차지하여 기업으로 삼으라 하시더니 시혼이 그의 모든 백성을 거느리고 나와서 우리를 대적하여 야하스에서 싸울 때에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우리에게 넘기시매 우리가 그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모든 백성을 쳤고 그 때에 우리가 그의 모든 성읍을 점령하고 그의 각 성읍을 그 남녀와 유아와 함께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진멸하였고 다만 그 가축과 성읍에서 탈취한 것은 우리의 소유로 삼았으며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모든 땅을 우리에게 넘겨주심으로 아르논 골짜기 가장자리에 있는 아로엘과 골짜기 가운데에 있는 성읍으로부터 길르앗까지 우리가 모든 높은 성읍을 점령하지 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으나 오직 암몬 족속의 땅 얍복 강 가와 산지에 있는 성읍들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가기를 금하신 모든 곳은 네가 가까이 하지 못하였느니라
신명기 (2:31~37)

이 신명기의 구절을 읽을 땐 한 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인간은 기본적으로 양심을 가졌다고 생각해요.
그 양심의 목소리에 기울이자니 차마 못 할 짓을 정당화하기 위해 야훼를 만들어 낸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와 사상이 다르다고 아이까지 잡아 죽이고 약탈하는 걸, 야훼의 이름으로 정당화 시켰으니까요.
야훼의 이름으로 거인 족도 멸망시키고, 참 많은 사람을 죽였어요.
‘내 앞을 막는 것은 무엇이든 쓸어버리겠어!’
욕심쟁이들의 행동을 정당화해주는 수단으로 신을 만든 건 아닐까요?

마온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의 생업이 갈멜에 있고 심히 부하여 양이 삼천 마리요 염소가 천 마리이므로 그가 갈멜에서 그의 양 털을 깎고 있었으니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남자는 완고하고 행실이 악하며 그는 갈렙 족속이었더라 다윗이 나발이 자기 양 털을 깎는다 함을 광야에서 들은지라 다윗이 이에 소년 열 명을 보내며 그 소년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갈멜로 올라가 나발에게 이르러 내 이름으로 그에게 문안하고 그 부하게 사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평강하라 네 집도 평강하라 네 소유의 모든 것도 평강하라 네게 양 털 깎는 자들이 있다 함을 이제 내가 들었노라 네 목자들이 우리와 함께 있었으나 우리가 그들을 해하지 아니하였고 그들이 갈멜에 있는 동안에 그들의 것을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나니 네 소년들에게 물으면 그들이 네게 말하리라 그런즉 내 소년들이 네게 은혜를 얻게 하라 우리가 좋은 날에 왔은즉 네 손에 있는 대로 네 종들과 네 아들 다윗에게 주기를 원하노라 하더라 하라
사무엘상 (25:2~8)

이 구절은 골리앗과 싸워 이긴 다윗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큰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나발과 다윗 모두 잘한 게 없어 보이니까요.
개인이 자원을 움켜쥐고 있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씨를 뿌리면 나무가 자라 모두가 풍족할 것을,
창고 속에 씨를 왕창 넣어두고 썩히면 세상이 황폐해질 수 밖에 없으니까요.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가 각박한 것은 다수 부자들의 습관 때문이라고 봐요.
돈 벌고 먹고 자고 노는데 약간의 돈을 돌릴 뿐, 나머지는 꼭꼭 쌓아두고 있습니다.
대대손손 물려줘서 자기 식구가 굶지 않고 살길 원하기 때문이에요.
‘내가 번 건데?’
돈을 낼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돈을 벌 수 있을까요?
자본가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이 큰 배를 타고 바다를 지날 때,
난파된 배를 발견했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물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면,
그들을 건져내어 배에 태우겠습니까?
아니면 저들의 운명이라 생각하고 그냥 지나가겠습니까?
자본을 움켜쥐고 있는 것은,
물에 빠져 죽는 사람을 모른 체하고 지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다윗은 자본가인 나발에게 협박을 합니다.
‘내가 맘만 먹으면 다 죽여버릴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으니, 좋은 말로 할 때 먹을 것을 내놓으시오.’
협박은 옳지 못합니다.
하지만 자본이 한 곳으로 집중되어,
저 역시 빵 한 조각 못 먹을 상황이 되면,
다윗처럼 자본가를 찾아가 아쉬운 소리를 할 것 같군요.
자원이 잘 돈다면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겠지요.
오늘날처럼 문명이 발달한 세상에도 사람이 굶어 죽는다는 건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기돈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들었더니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웃사가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으니라
역대상 (13:9~10)

야훼가 정말 망나니라는걸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내가 만든 궤를 감히 만져?
네가 안 잡아도 내 힘으로 안 떨어지게 할 수 있거든?
지금 날 무시하냐 니가?
그리고 쳐 죽였죠.

Who Killed more people in the bible?

야훼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누가 이런 통계까지 내 두었더라고요.
오직 하나뿐인 절대자이기 때문에 그래도 된다고요?
그럼 교황은 어떤가요?
대통령은 어떻고요.
어떤 자리도 행동을 정당화할 순 없습니다.

정오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이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더라
열왕기상 (18:27~28)

야훼의 대리자가 남을 비꼬고 조롱하는 걸 보니, 정말 그가 믿는 야훼를 쏙 닮았습니다.

휴.
한숨이 나오네요.
하지만 성경을 약간 유쾌한 시각으로 보면 꽤 재미있습니다.
판타지적인 요소가 많아요.

선지자 엘리야는 강력한 화염계 마법사였습니다.
메테오 스트라이크를 쓰고, 불새와 불말을 소환하기도 했거든요.
제자 엘리사는 스승과 다른 길을 택하였습니다.
정신계 마법의 일종인 블라인드로 사람의 눈을 멀게 하더라고요.

나이 사십에 죽게 된 히스기야가 기도를 하자,
야훼는 친절하게 데스노트에 그의 이름을 적습니다.
‘히스기야. 너는 십오 년 후에 죽는다.’

구약 성경에 어떻게 성경(聖經)이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이런 상스러운 막장 드라마를 어찌 성스럽다고 할까요?
구약 성경은 추악한 것을 집대성해 놓았으므로,
우리는 이를 거울삼아 내면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내가 혹 망나니 야훼처럼 살고 있는건 아닌가?'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도록 도와줍니다.
그래서 성경이라 불리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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