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소리에 대하여 (On Bullshit)


내가 처음 PC 통신이라는 것을 접했을 때.
온라인 세상에는 서로에 대한 배려와 소통하고자 하는 의지.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고자 하는 마음 등이 어우러진 장소처럼 느껴졌다.
댓글 하나를 달 때도 대충 아무렇게나 던지지 않고 신중히 한 자 한 자 타이핑했던 기억이다.
그런데 요즘 온라인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목소리가 크고 개소리를 내뱉는 사람이 많다.
세상에 심각한 일은 수없이 일어나지만, 우리는 그 모든 사안에 대해 깊이 파고들 여력이 없다.
그러나 세상 돌아가는 일에 무관심한 것처럼은 보이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대충 훑어보고는 빠르게 자신이 경험한 단편적 지식을 뽐낸다.
마치 카페 모카에 올려진 휘핑크림만 대충 맛보고는 "이건 커피가 안 들어간 음료다. 내가 먹어봤다." 인증샷을 올리는 꼴이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떠들고 싶다면 그건 십중팔구 개소리가 튀어나올 수밖에 없다.
때로는 알고 싶어서 한참을 들여다봐도 알지 못하는 것들도 있다.
아리송할 땐 입을 닫아야 개소리가 튀어나오지 않을 텐데.
조금이라도 알면 여기저기 말하고 싶은 입이 방정이다.
내 입에서 튀어나오는 개소리나 좀 줄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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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소리라는 표현은 종종 꽤 느슨하게, 글자 그대로의 특수한 의미와 관계없이, 단순히 욕설을 가리키는 일반용어로 사용된다. 다음으로, 현상 자체가 매우 광범위하고 일정한 형태가 없기 때문에 뚜렷하고 명쾌한 분석은 무리한 획일화가 되기 쉽다.

협잡 : 누군가가 자신의 생각, 느낌 또는 태도에 대해 특히 허세를 부리는 말 또는 행동을 통해 기만적으로 부정확하게 진술하는 것으로 거짓말에는 미치지 못함.
협잡의 동의어 : 허튼소리(bladerdash), 쓸데없는 말(claptrap), 말도 안 되는 얘기(hokum), 실없는 소리(drivel), 헛소리(buncombe), 사기(imposture), 엉터리(quackery)등
- Max Black, The Prevalence of Humbug (Ithaca: Cornell University Press, 1985).

협잡은 의도적인 부정확한 진술이다. 만일 기만하려는 의도가 협잡의 변치않는 특징이라면, 개념적인 필욘성에 의해 협잡이라는 것의 속성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행위자의 심리상태에 따라 좌우된다.

더 오래전 예술의 시대에는
건축가들이 최고의 세심함을 기울여 공들여 만들었지
매 순간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도,
신들이 모든 곳에 계셨으므로.
- 롱펠로

The Builders
...
In the elder days of Art,
Builders wrought with greatest care
Each minute and unseen part;
For the Gods see everywhere.
...
- Henry Wadsworth Longfellow(http://www.hwlongfellow.org/poems_poem.php?pid=118)

옛 장인들은 자기 작품에서 보통은 눈에 보이지 않는 특징들에 대해서조차 사려 깊은 자기 규율을 느슨히 하지 않았다. 비록 그 특징들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더라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장인들은 양심때문에 괴로워했을 것이다. 따라서 아무것도 양탄자 밑에 쓸어 담듯 숨기지 않았다. 혹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개수작(bullshit)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부주의하게 만든 조잡한 물건이 어떤 면에서 개소리와 비슷하다고 이해하는 것은 타당해 보인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 그럴까? 개소리 자체가 항상 부주의하게 혹은 제멋대로의 방식으로 생산된다는 점, 개소리는 결코 세심하게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점, 개소리를 지어낼 때 롱펠로가 넌지시 말했던 저 꼼꼼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점 등이 비슷한가? 개소리를 하는 사람은 천성이 별생각이 없는 멍청이인가? 그의 생산물은 언제나 너절하고 조야한가? '똥shit'이라는 말은 분명히 그렇다는 걸 암시한다. 대변은 설계되거나 수공예로 만드는 게 아니다. 그것은 그냥 싸거나 누는 것이다. 그것은 다소 엉겨 붙은 모양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공들여 만든 것은 아니다.

광고와 홍보의 영역 및 오늘날 이와 밀접히 연관된 정치 분야는 개소리의 사례들로 온통 가득 차 있다. 그리하여 이들 분야는 반론의 여지 없이 개소리라는 개념의 고전적 패러다임들을 제공할 수 있다.

1914년 방언 노트 IV. 162 불bull, 목적에 부합하지 못하는 말; '더운 공기(hot air)'.

개소리의 본질은 그것이 거짓이라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이 가짜(phony)라는 데 있다. 이 차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리는 가짜 또는 모조가 어떤 측면에서는 (진짜라는 점을 제외하면) 실제의 사물에 비해 열등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또한 진짜가 아니라는 것은 어떤 다른 면에서 단점일 필요도 없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그가 진리라고 여기는 것이 부과하는 객관적 제약에 따라야만 하며, 이것은 일정 수준의 숙련도를 필요로 한다. 거짓말쟁이는 불가피하게 진릿값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거짓말이란 것을 지어내기 위해서 거짓말쟁이는 무엇이 진실인지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해야만 한다. 그리고 효과적인 거짓말을 지어내려면 거짓말쟁이는 자신의 허위를 그 진리의 위장 가면 아래에 설계해야 한다.

개소리는 꼭 허위일 필요가 없으므로, 그것은 부정확하게 진술하는 내용에 있어 거짓말과 다르다. 개소리쟁이는 사실 또는 그가 사실이라고 간주하는 것에 대해 우리를 기만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아니면 심지어 기만할 의도가 없을 수도 있다. 그가 반드시 우리를 기만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그의 기획의도(enterprise)이다. 개소리쟁이에게 유일하게 없어서는 안 될 독특한 특징은, 그가 특정한 방식으로 자신의 속셈을 부정확하게 진술한다는 사실이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과 거짓말쟁이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전자는 마지못해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다. 반면 후자는 거짓말하기를 좋아하며 거짓말하는 즐거움으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다. … 후자는 거짓말에서 기쁨을 느끼며, 허위 그 자체를 즐긴다.
- "Lying," in Treatise on Various Subjects, in Fathers of the Church, ed. R.J. Deferrari, vo. 16(New York: Fathers of the Church, 1952) 성 아우구스티누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어떤 진술이 거짓이라는 사실은, 그것이 아무리 약하고 쉽게 번복할 수 있다 해도, 그것만으로도 그런 진술을 하지 않을 이유가 된다. 반대로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순수한 거짓말쟁이에게는 그런 사실이 그 진술을 하고 싶어 할 이유가 된다. 개소리쟁이에게 그것은 그 자체로 그 말을 해야 할 이유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아니다. 거짓을 말하거나 참을 말할 때 모두, 사람들은 사태의 진상이 무엇인지에 관한 자신의 믿음에 좌우된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과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말하자면 같은 게임 속에서 반대편으로 활동한다. 그들 각각은 자신들이 이해하는 사실에 반응한다. 비록 한쪽의 반응은 진리의 권위에 따르고, 다른 쪽의 반응은 진리의 권위에 저항하며 그 요구에 맞추기를 거부하지만 말이다. 개소리쟁이는 이러한 요구를 모두 무시한다. 그는 거짓말쟁이와는 달리 진리의 권위를 부정하지도, 그것에 맞서지도 않는다. 개소리쟁이는 진리의 권위에 조금도 신경쓰지 않는다. 이 점 때문에, 개소리는 거짓말보다 훨씬 더 큰 진리의 적이다.

어떤 진술이 참이고 어떤 진술이 거짓인지를 규명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더 이상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오직 두 가지 대안만이 있을 수 있다. 첫째는 진실을 말하려는 노력과 기만하려는 노력 모두를 그만두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에 대한 어떠한 주장도 내세우기를 삼간다는 뜻이다. 두 번째 대안은 상황이 어떠한지를 기술하려는 주장, 그러나 개소리밖에는 아무것도 될 수 없는 주장을 계속하는 것이다.

어떤 주제에 대해 말할 기회나 의무들이 화자가 가진 주제와 관련된 사실에 대한 지식을 넘어설 때마다 개소리의 생산은 활발해진다.

모든 것에 대한 의견, 혹은 적어도 국가적인 사안과 관계된 모든 것에 대한 의견을 갖는 것이 민주주의에서 시민의 책임이라는 널리 퍼진 신념으로부터 이와 유사한 사례들이 발생한다. 양심적인 도덕적 행위자로서, 전 세계의 모든 분야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상황을 평가하는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믿는 이들이 있다. 이들에게는, 개인의 의견이 현실에 대한 이해와 의미 있게 연결되지 않는 현상이 말할 필요도 없이 훨씬 더 심각할 것이다.

'반실재론적' 신조는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사심없이 노력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는 확신을 무너트리고, 심지어 객관적 탐구라는 개념이 이해 가능한 개념이라는 믿음을 약화시킨다. 이러한 믿음의 상실에 대한 하나의 반응은 정확성(correctness)이라는 이념에 대한 헌신이 요구하는 규율에서 전혀 다른 규율로 후퇴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진정성(sincerity)이라는 대안적 이념을 추구할 때 요구되는 규율이다. 개인들은 주로 공동 세계를 정확하게 묘사하는데 성공하기를 추구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전달해보겠다는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촌철살인과 개소리의 경계선상에 놓인 말들을 경쟁적으로 쏟아내면서 누가누가 더 개소리를 잘 만들어내는지, 누가 더 뛰어난 개소리 예술가(bullshit artist)인지 장기 자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정치에서 말하는 프레임론과 마케팅에서 말하는 포지셔닝론 모두 개소리의 기술에 관한 이론이다. 모두가 말의 진릿값에는 관심 없고 자신들의 숨은 의도를 관철시키려는 언어조작에 전념한다. - 이 윤

민주 시민으로서 우리나라의 중대 사안 모두에 대해서 어떤 의견을 가져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감을 가진 사람은, 진정성만 있으면 된다는 것을 자기위안으로 삼고 자신이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사안에 대해서도 이러저러한 발언을 하고 또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미안한 말이지만, 그런 사람은 십중팔구 개소리를 할 수밖에 없다. 프랭크퍼트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 강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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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랑자의 이야기.
    월풍도원에선 기부를 받습니다.

몸의 습관을 다스리자. 건강한 내 몸 사용법 알렉산더 테크닉.


장시간 앉아 있다보면 몸이 여기저기 안 쑤신 곳이 없다.
목이 뻐근하고, 허리와 등도 결린다.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봤자 그때 뿐이고, 평소 생활로 돌아오면 다시 몸이 아프다.
그것은 평소 자세가 몸을 아프게 만들기 때문이다.
자세 교정에 관한 읽을거리들이 많지만, 알렉산더 테크닉처럼 와닿는 것이 없었다.
기회가 되면 직접 배워보고 싶은 몸 사용법이다.
우선 그 기회가 오기 전까지는 몸이 뻐근할 때마다 알렉산더 테크닉의 디렉션을 떠올리며 몸을 잘 써보자.


건강한 내 몸 사용법 알렉산더 테크닉 - 책갈피


알렉산더 테크닉을 창시한 프레더릭 마티아스 알렉산더(Frederick Matthias Alexander)는 우리가 스스로 멈출 수만 있다면 괴로움이 즐거움으로 바뀐다는 것을 가르쳤다. 마치 미친 말처럼 뭔가를 향해 내달리는 자신을 잠시 멈출 수 있다면, 습관처럼 반복하는 행동을 자제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한 끗 차이다. 우리는 이 한 끗 차이의 원리를 몰라, 소중한 시간을 과거와 미래에 정신없이 쏟아부으며 기대한 결과만을 기다린다. 자신을 관찰하여 끊임없이 자신의 습관을 자각하는 사람은 무엇을 해도 발전의 길을 걷게 된다.

알렉산더 테크닉은 몸의 해부학적 구조와 기능을 토대로 한 역학적 법칙들을 연구해서 나온 이론이나 의학지식이 아니다.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몸의 정신성에 대한 통찰을 통해 나온 자기의 사용법(Use of the Self)이다. 따라서 학습하여 습득하고 연구하여 결론을 맺는 학문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실현하면 되는 것이다. 오히려 더 익히는 학습이 아닌 덜 익히는 탈학습(unlearning)이다. 이것은 습득하는 것이 아닌 터득하는 것이다. 이것이 알렉산더 테크닉이라는 교육의 방향성이다.

언제나 새로운 준비 상태에서 평정심으로 자기를 사용하고, 기계적이고 습관적인 반응을 멈추는 것이 유일하게 알렉산더 테크닉에서 하려는 것이다.


디렉션(Direction)

머리 디렉션

'내 목이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Think[Let] my neck to be free.)
'내 머리가 앞과 위로 향한다'고 생각한다.
(Think[Let] my head go forward and upward.)

척추 디렉션

'내 척추(몸통)가 길어지고 넓어진다'고 생각한다.
(Think[Let] my torso lengthen and widen)

다리와 어깨 디렉션

'내 다리와 척추가 서로 분리된다'고 생각한다.
(Think[Let] my legs release away from my torso.)
'내 어깨가 중심으로부터 넓어진다'고 생각한다.
(Think[Let] my shoulder widening from each other.)

디렉션 주의사항

하나, 서두르지 말고 느긋하게 한다.
둘, 기대감에 무언가를 상상하고 시각화하여 뇌를 흥분시키지 않는다.
셋, 어떤 느낌들에 지나치게 집중하여 과민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넷, 좋다, 싫다, 잘했다, 잘못했다 등의 판단 없이 디렉션을 생각한다.
다섯, 몸을 디렉션의 방향성에 맞추려 의도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여섯, 반응이 느껴져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확인하려 들지 않는다.
일곱, 잘 되지 않는다고 자책하거나실망하지 말고 그저 꾸준히 일상 속에서 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몸은 변화한다.


알렉산더 테크닉은 자제심에 근간을 두고 있다. 원치 않는 자극에 대한 반응을 자제하는 것, 이것이 인간의 단순반응을 컨트롤 하는 핵심이다.

모든 것이 주어진 자극에 일정하게 반응하는 것을 자제하는 것과 관련된다. 그러나 아무도 알렉산더 테크닉을 이런 식으로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알렉산더 테크닉이 바른 방법으로 의자에 앉거나 일어나는 것이라고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절대 그런 것이 아니다. 알렉산더 테크닉은 자기 자신이 무엇을 하기로 동의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학생들을 대할 때마다 한 번도 그를 본 적이 없는 것처럼 대해야 한다. 그 사람이 새로운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다. 만약 우리들이 상대를 과거로부터 가지고 있는 정보에 의존해 판단한다면 그만큼 그를 제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느 누구라도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자제심은 자극과 반응 사이에 일정한 간격을 두어 불필요한 반응을 제어할 수 있게 한다. 행동하기 전에 의식적으로 '잠시 멈추기(pause)'를 훈련함으로써 새로운 선택이 가능해진다. 이것은 뇌에 구축된 강력한 신경회로에서 벗어나 새로운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감정·사고·행동 수준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네 손은 망치를 세 번 두드리는 데 익숙해 있다. 그러나 행동이 습관에 이끌리면 의미를 잃게 된다. 그리고 결국 해를 유발한다. 우리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유일하고 특별하다. 처세의 유일한 비밀은 바로 이것이다. 습관이 너의 행동을 좌우하게 하지 마라." - 《마크툽》(파울로 코엘료 저) 중에서

공포반사는 충격을 받은 상황에만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이와 유사한 자세(몸의 사용)를 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몸에 기억된 공포에 대한 반응이 무의식 속에서 재현된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불안해하고 걱정하며 불필요한 잡념에 빠져 에너지를 소모한다.

습관은 의식의 흐름에 관성을 띠게 한다. 그래서 자연스러운 생명활동을 간섭하고 충돌하게 한다. 예를 들면 식후에 달콤한 케이크와 커피를 먹는 습관이 있는 사람은 디저트 없이 끝나버린 식사에 대해 불만이 생긴다. 그는 엉뚱하게 다른 사람에게 불만과 짜증을 부릴 수 있다. 매일 아침 비타민을 먹고 출근하던 사람이 어느 날 그냥 출근하게 되면 비타민을 먹지 못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하루종일 피로하다고 느끼고 불안해한다. ······ 습관을 자각하고 자제하지 못하면 결국 집착, 착각, 고집, 오해, 욕구불만 등으로 진행되는 관성을 띤다.

외부 환경에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 환경을 바꾸려 몸부림치지만 결국 순응하고 적응하는 것을 선택한다. 이 과정에서 얻어지는 것이 '학습'이라는 대가다. 고통스런 과정을 통해 이럴 때는 이렇게 하면 된다는 '학습'이 이루어진다. 차후, 유사한 상황에서 이 학습은 매우 유용하게 적용된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되며 지혜롭게 해쳐 나올 수 있다. 학습은 언제나 자신이 뭔가를 알았다는 사실에만 근거를 둘 뿐, 스스로 변화할 수 없는 근성을 가지고 있는 모범생과 같다. 이 학습을 확장시키지 못하면 고집, 무지, 저항이 자신을 유지하기 위한 방어 전략이 된다. 그래서 안정(자기 유지)만이 최선책이라 생각하고 웅크리게 된다. 이것이 배움에 대한 고착의 길이다.
또 다른 길, 확장의 길은 더 나은 배움을 선택했을 때 열리는 길이다. 이것은 또 다른 학습 형식이 아닌, 시행착오를 통해 사로운 경험을 열어가는 탈학습의 지혜다. '학습'은 새롭게 '탈학습'이 되었을 때 건전한 성장이 뒤따른다. F.M. 알렉선더는 "알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버릴 준비를 하라"라는 탈학습의 원리를 가르쳤다. 이것은 지식을 습득하는 학습이 아니라, 삶을 겪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배우고 익숙해진 무의식적인 학습에서 얻은 고정관념의 틀을 버리라는 의미다.

습관은 관성적 의식의 흐름이다. 감각이든 감정이든 생각이든 행동이든 무의식적으로 선택하기 때문에 유사한 상황에서 언제나 유사한 결과를 얻게 된다. 스트레스에 대한 적응과 정에서 각인(학습)된 것이면, 유사한 스트레스로 자극을 받을 경우 고정된 의식의 흐름이 작동한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관성에 의해 진행되는 반응을 한다. 이것은 매우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부분이다. 습관이 삶을 이끌고 가게 될 경우 괴로움, 불편함, 아픔이 뒤따른다는 것을 관찰해 보길 바란다. 어느 정도 습관은 허용할 수 있지만 원치 않는 결과가 계속될 때는 자각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자극(원인)에 대해 충동적인 뭔가를 하려는 반응(결과)을 지켜보는(과정) 것이 우리 의식 속에 온전히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 무엇에 자극받고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아차려 잠시 혼돈으로부터 벗어나 고요한 흐름을 찾을 수 있도록 한다. 그러면 자신의 삶에서 어떤 시행착오를 반복하는지 자각할 수 있고, 그에 따른 새로운 선택이 가능해진다. 몸에 한 번 밴 습관은 좀처럼 인지하기 어렵고 처리하기 어려운 대상이 되므로 반응하기 직전에 잠시 '쉼표'의 신호를 주는 것, 그것이 알렉산더 테크닉이 알려 주는 '자제심'이다.

꿈은 누구에게나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꿈이 삶의 목적이 되고 만다면, 그것만을 좇으며 사는 삶은 진정한 삶의 의미를 망각하게 되는 커다란 함정에 빠진다. 미래의 목표와 꿈만큼 현재의 즐거움과 만족도 중요하다. 가상의 미래를 위해 현재를 낭비하고 불안해한다면 그 미래는 결코 오지 않는다.

목적의식에 빠진 사람들은 자주 당황하고 분노하며 좌절한다. 이것만을 위해 노력해 왔노라 한탄하고 후회한다. 목적 달성이 어려워지면 돌아가면 되고, 시야를 넓혀서 보면 여러 갈래 길중 다른 하나를 선택할 수도 있는데 그럴 여유가 없는 것이다. 목적이 전부인 사람은 고독하다. 목적의식에 대한 습관은 온전히 깨어있지 못할 경우 휩쓸려가기 쉽다. 목적의식은 우리 삶을 어둡게 만드는 그림자다.

우리 삶에는 따로 목적이 있어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과정 속에 순간순간 그 의미가 담겨 있다. 그것을 정하려고 애쓰거나 그렇게만 살려고 고집하지 않아도 된다. 삶의 열정이 있으면 목적은 단지 필요할 때만 사용할 수 있다. 강물이 바다를 목적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닌 것처럼.

시간은 개념에 불과하다. 자연의 변화과정을 우리의 뇌가 선형적으로 나열하여 해석하고 있어서 실재하는 것처럼 경험할 뿐이지, 시간이 실제로 흐르는 것은 아니다. 지금이라는 순간이 쭉 지속되고 있을 뿐이다. 시계바늘이 돌아가듯 12시간이 돌고 도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지금만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다. 우리는 단 한번도 '지금 여기'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지금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금 여기에 다 내려놓으면 된다. 지금 여기에 그라운딩(Grounding, 접지[接地] )하고 사는 것이 알렉선더 테크닉에서 가르치는 '진행과정'이다.

'판단하지 않음'이란 자신의 주관적 감각에 의해 오차가 있을 수 있고, 또한 그 반응에 의한 행동 결정 때문에 문제가 생길 수 있음을 알려 준다. 온전히 맡기고 허용하려 해도 몸속에 강력하게 배어 있는 습관과 긴장들은 생각대로 쉽게 변하지 않는다. 이러한 시행착오는 반복될 것이다. 흔히 왼쪽 어깨가 올라갔다고 판단되면 왼쪽 어깨를 내리거나 오른쪽 어깨를 올리면 된다고 단순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자신의 판단과 결정으로 몸은 더욱 긴장하고, 계속 교정하려는 습관이 배면서 악순환이 된다.

넌두잉은 하려함이 없으나 저절로 되는 상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do nothing) 것이 아니라 하려함(doing)에서 오는 불필요한 긴장이 없는 것이다.

중추조절은 언제나 몸 스스로 해소하는 방향으로 진행하기에 두잉을 하지 않는다. 무언가 하려는 충동을 자각했을 때 잠시 멈추고 허용하면 넌두잉 상태가 된다. 목적의식을 가질수록 두잉하게 된다. 판단을 내려놓고 순간순간 깨어 진행할 때 완전한 경험 속에서 배움을 얻는다. 내가 '~한다'는 생각이 앞서지 않는다면 뭔가 되도록 진행되는 커다란힘을 느낄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평가(판단)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이 습관화되었다. 더럽다, 추하다, 나쁘다, 싫다, 좋다, 옳다, 그르다 등의 식으로 실체와 다른 평가와 판단을 하게 된다. 내면에 이미 형성된 기준들이 있는 그대로를 감각하고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언제나 상대적으로 분별하게 한다. 과거 경험에 의해 강력하게 학습된 반ㅇ응을 선택하는 자신을 관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감정(느낌)과 생각은 인식에 의해 나타난 몸의 현상이다. 따라서 어떤 형식이냐에 따라 달리 불릴 뿐이다. 감정(느낌)은 감각과 인식에 의해 반응하는 에너지 현상을 일컬으며, 생각은 경험한 이미지·개념·언어로 반응하는 정신적 현상을 일컫는다. 관찰은 이 현상들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의식의 조명과 같다. 이 조명은 수평적인 감각인식을 수직적으로 비추는 것과 같다. 따라서 수평적인 의식의 흐름을 가로지르는 진화된 의식이다. 그래서 관찰은 언제나 자각을 향해 비춘다.

몸을 관찰하는 힘은 곧 마음을 관찰하는 힘이 된다. 몸과 마음은 하나다.

습관은 무작정 충동적으로 느끼고 생각하는 성향이 있다. 그렇게 때문에 보고 듣는 순간, 판단하고 집착하며 둘로 분리하여(좋다 싫다, 옳고 틀리다 등) 아주 빠르게 결정을 내린다. 자신에겐 익숙하기 때문에 이것을 알아차리기란 어렵다. 자제심은 이러한 몸과 마음에 휴식을 주는 것이다. 고요히 쉬는 것이다.

자신 안에서 벌어지는 감정, 욕구, 잡념들이 뒤엉켜 혼돈 속으로 들어갈 때 포즈(pause), 즉 잠시 멈추자! 자신을 습관 속으로 다시 데려가려고 강하게 끌어당겨도 내버려 두고 가만히 있어 본다.

세미 수파인(Semi-supine) 자세로 눕기

1. 천장을 바라보고 눕는다. 이마가 지면과 수평이 되도록 단단한 베개나 책등을 머리 밑에 받쳐 준다.(목이 뒤로 젖혀지거나 앞으로 기울지 않도록 한다.)
2. '무릎이 천장을 향한다'고 생각하면서 천천히 한쪽 무릎을 편안한 정도로 세운다. 다른 쪽 무릎도 같은 방법으로 세운다.
3. 무릎에 힘을 빼고 발바닥이 무릎과 연결되는 감각으로 나란히 11자로 세운다.
4. 골반이 편안하게 자리를 잡도록 살짝 들었다 놓는다.
5. 양팔을 앞으로 나란히 한 후 등과 견갑골이 편안하게 놓이도록 살짝 들었다가 놓는다.
6. 양손은 골반 위에 가볍게 올려놓는다.
7. 온몸에 힘을 빼고 쉰다.
주의 : 두 무릎이 바깥으로 벌어지거나 안으로 오므라들지 않도록 한다. 무릎이 안으로 오므라드는 경우 두 발의 폭을 조금 더 좁게 하고, 밖으로 벌어지면 두 발의 폭을 조금 더 넓게 한다.

위스퍼 하(Whisper ah~) 호흡

1. 먼저 숨이 나가고 들어오는 것을 느낀다. 몸 전체의 힘을 빼고 그라운딩한다.(바닥에 닿아 있는 몸을 느낀다.)
2. 복부에 인위적인 힘을 가해 가슴을 부풀리거나 누르지 않는다.
3. 기분 좋은 일을 잠시 떠올린 후, 얼굴 근육이 편안해지면(인스마일[insmile, 내면의 미소]) 숨을 입으로 천천히 내뱉는다.
4. 혀를 아랫니 뒤에 놓으며 턱관절을 자연스럽게 벌린다.
5. 숨이 나갈 때 '하~"하는 소리가 일정하게 나도록 한다.
6. 공기가 다 나가면 저절로 입이 다물어지고 숨이 들어간다. 이것을 반복하면서 턱관절이 점차 더 자연스럽게 열리고 닫히도록 한다.
주의: 1. '하'는 발음하는 발성이 아니라 웃고 울 때 나는 탄성음이다.
2. 인스마일이란 처음 시작할 때 즐거운 상상을 해서 얼굴 전체와 목이 편안하게 가벼운 미소를 띠는 것을 말한다.
3. 턱관절 외에는 다른 신체 부위에 힘이 들어가거나 불필요하게 움직이지 않도록 한다. 점차 아무런 힘을 주지 않고 입을 열고 닫을 수 있도록 연습한다.

평정심을 지닌 사람은 일상의 변화무쌍한 흐름에 흔들리더라도 그 중심에는 깊은 존재의 근원과 닿아 있음을 자각하고 있어 두려움 없이 삶의 경험을 선택하고 맞이한다. 그러나 이것은 쉽게 이루어지거나 정해진 훈련만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삶의 경험이 어떠했고 그것을 통해 무엇을 통찰했느냐에 따라 그 깊이는 달라진다. 그러므로 묘책을 바라지 말고 진실한 태도로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다.

평정심은 선택의 권한(authority)이 외부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음을 이해하는 데서 시작한다. 오늘날 빠르게 발전하는 문명 속에서 쉽게 스트레스를 받고 불안해하는 이유가 무엇을까? 수많은 결정권을 여론, 명령, 관습, 조직, 유행, 시대적 가치관, 명성, 광고, 매스컴, 의무, 책임 등 외부에 내준 채 무의식적인 선택을 많이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외부의 그것에 저항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만들어가는 정신적 환경에 깨어 있을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좌골로 앉기

1. 오른손으로 오른쪽 엉덩이 밑으로 손을 넣어 제일 아래 뾰족한 곳을 찾아본다.
2. 눈을 감고 그곳의 정확한 위치와 느낌을 인지한다.
3. 반대쪽도 같은 요령으로 좌골을 찾는다.
4. 양쪽 좌골이 의자에 닿아 있고 그것이 체중을 받치도록 앞뒤, 좌우로 움직여 본다.
5. 죠용히 움직임을 멈추고 좌골과 머리를 동시에 의식하면서 몸에게 맡겨본다.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기

1.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을 경우에는 좌골을 의자 앞쪽에 놓아서 허벅지가 의자에 많이 닿지 않는 게 좋다.
2. 등이 굽어 있다면 머리가 척추의 움직임을 이끌듯 위로 천천히 편다.
3. 좌골과 발바닥을 의식한다.
4. 몸 전체를 의식하고 디렉션을 순서대로 준다.
5. 호흡이 들어오고 나가는 흐름을 느끼며 긴장을 해소해 간다.

앉기에서 서기

1. 뒤꿈치를 의자 가까이에 가져온다.
2. 좌골에서부터 척추와 머리의 방향, 무릎과 발바닥의 방향을 의식하며 상체를 앞으로 구부린다.
3. 발바닥에 그라운딩이 되면 저절로 일어서게 된다. 충분히 숙이기 전에 일어서려 하면 온몸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발바닥과 좌골로 나뉜 그라운딩이 발바닥으로 충분히 이동한 후에 일어서야 한다.
4. 무릎의 방향성은 항상 발가락과 같은 방향이라는 걸 염두에 둔다.(일어서고 앉을 때마다 무릎 안쪽으로 힘을 주는 습관들이 많다.)
5. 무릎의 방향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관찰한다.
6. 여러 방향으로 시도해 보면서 편안한 방향을 자각한다.

서기에서 앉기

1. 무릎과 고관절을 구부린다.(멍키)
2. 천천히 앉는 과정에서 엉덩이와 무릎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관찰한다.
3. 어디에 힘이 많이 들어가는지 관찰한다.
4. 엉덩이가 의자에 닿기 시작할 때 잠깐 멈춰 좌골 그라운딩을 할 시간적 여유를 준다.
5. 좌골에서부터 머리와 척추가 위로 향하는 방향성을 의식하며 척추를 세운다.
6. 등을 뒤로 미는 습관이 있어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을 때도 척추를 뒤로 비스듬하게 기울이려 한다면 자제한다.
7. 좌골로 안정된 그라운딩을 한다.
8. 호흡을 하면서 디렉션을 주며 긴장을 해소한다.

등받이 있는 의자에 앉기

등받이 있는 의자를 고르려면 좌골이 닿는 바닥과 등이 닿는 등받이가 수직으로 된 것이 좋다. 의자는 몸이 사용을 하는 물건이지, 몸이 축 늘어지듯(무너지듯) 무방비 상태로 의지하는 도구가 아니다.
의자에 앉아 있는 동안에도 바닥과 등받이에 닿아 있는 몸에 의식을 두어야 한다. 쿠션이 많은 의자일수록 그라운딩이 안 되기 때문에 척추를 수직으로 세우기 어렵다. 바닥이 너무 딱딱해서 좌골이 아플 경우에는 얕은 방석을 사용한다.
1. 가능한 등받이 쪽으로 깊이 엉덩이를 안정되게 자리한 후, 등받이에 등을 살짝만 기댄다.
2. 등받이에 닿아 있는 곳이 편안한지 확인하고 습관적으로 뒤로 밀지 않도록 자제한다.

척추를 편안히 세우지 못하게 디자인된 의자에 앉기

자동차, 비행기, 지하철, 학교, 사무실, 소파 등 거의 모든 의자들이 이에 해당된다. 밖으로 나가면 모든 의자들이 몸을 불편하게 한다. 그렇다고 앉지 않을 수도 없다.
1. 일단 의자에 앉아서 좌골이 아닌 천골로 구부정하게 앉아 있든, 척추를 무너뜨리고 앉아 있든, 머리가 뒤로 밑으로 눌린 듯 앉아 있든, 있는 그대로의 내 몸의 모양새를 전체적으로 의식한다.
2. 디렉션을 순서대로 준다. 의식을 하고 디렉션을 주더라도 이러한 의자 때문에 미세하게 무너지는 몸의 긴장을 기억하고 습관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를 관찰한다.
3. 나중에 세미수파인 자세나 등받이 없는 평평한 의자에 앉아 몸의 긴장을 해소하는 시간을 반드시 가져야 한다. 좋은 자세는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그때그때 잘못된 자세가 습관화되지 않도록 긴장을 해소하는 시간을 갖는 습관을 몸에 들이는 게 중요하다.

알렉산더 테크닉 훈련(訓練, practice)은 사실 수행(修行)과 의미가 크게 다르지 않다. 특별히 무엇을 위해 갈고 닦는 수련(修練)의 의미보다 언제나 한결같이 일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수행의 의미가 더 깊게 담겨 있다. 따라서 AT를 수행한다는 것은 테크닉의 학습보다 현존(現存, presence)의 체화라 말할 수 있다. 지금 여기, 아무런 판단 없이 '있는 것(Being)'을 체화하는 과정이 AT의 훈련이며 생활 속의 수행인 것이다. 체화한다는 것은 진정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표현하고 삶 속에서 실현해 가는 것이다.

불만스러운 자아상은 언제나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자아상의 망상을 통해 만족을 얻는 착각을 하게 된다. 성인이 되면서 이것이 굳건해질수록 고지식함과 완고함으로 무장되며, 더욱 자기 방어적이고 이기적인 존재가 된다. 이것이 자신이 몸으로 느끼는 긴장의 실체다. 자연스럽게 구조화된 상호긴장관계와 탄력성이 왜곡된 탓에 내면은 몸으로 표출시켜 해소의 기회를 얻으려 몸부림치게 된다. 이것이 곧 불편함[disease, suffering, 苦]이다. 스스로를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본연의 존재 상태가 아닌, 무언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변형된 충동 속에 휩싸여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거짓된 자아와 싸우며 끝없이 에너지를 소모한다.

AT의 7대 원리와 훈련
디렉션(direction)은 마음속에 무심히 생각을 집중하는 훈련과 중추조절(primary control)이 그라운딩과 함께 변화되는 몸의 감각 속에 느낌을 관찰하는 훈련을 동시에 의식적으로 진행할 때 몸과 마음의 연결을 간섭하는 습관의 충동을 자제(inhibition)할 기회를 갖는다. 잘못 인식되어 반응하려는 것을 멈추고(pause), '노(NO)'하면 습관 속에 있던 감각인식오류가 수정되고 긴장은 해소된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우리 내면에 형성된 4가지 습관이다.
* 목적의식(end-gaining) : 결과에 집착하고 추구만 하는 상태
* 진행과정(means-whereby): 과거와 미래에 얽매어 현재에 충실하지 못하는 상태
* 판단하지 않음(non-judgement) : 착각하고 분별하는 상태
* 넌두잉(non-doing) : 인위적인 행동으로 자연스런 변화에 저항하는 상태

중추조절 - 기기

1. 손바닥과 무릎으로 체중을 그라운딩하고 팔다리를 뻗는다. 정수리가 제일 앞으로 향하고 얼굴은 땅을 향한다.
2. 디렉션을 하나하나 순서대로 주면서 몸의 감각을 깨운다.
3. 머리가 앞으로 저절로 나가는 순간을 기다린다.(마음이 앞서 몸을 움직이려 하면 그 첫 번째 반응에 대해 '노(NO)'를 한다.)
4. 몸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서두르지 말고 몸의 흐름에 맡기며 천천히 움직인다.
5. 팔과 다리는 의식하지 말고 흐름에 맡겨도 좋다. 중요한 것은 머리와 척추가 하나로 연결되면서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것이다.
6. 머리가 방향을 정해서 나가면 그 뒤를 따라 척추와 팔다리가 따라오는 것을 자각한다.

서기

1. 두 발을 골반 넓이 정도로 벌려 주고 양발의 좌우 각도를 균등하게 한다.(크게 불편하지 않다면 11자로 서 본다.)
2. 양 발바닥 전체로 그라운딩한다(세 꼭짓점 유지).
3. 발바닥과 머리 위를 생각하며 몸의 중심을 몸 스스로 잡을 수 있도록 어떠한 간섭도 하지 말고 맡긴다.
4. 호흡이 편안해지는 위치를 관찰한다.
5. 중심이 편안해지면 무릎을 가볍게 구부렸다 폈다 하며 긴장을 관찰한다.
6. 몸을 전체적으로 관찰하면서 변화를 자각한다. 차후 디렉션을 익히면서 더 연습해 보자.
주의 : 자신의 판단대로 몸을 움직여 교정하려 하지 않는다.

멍키(monkey) - 구부리기

1. 양발을 골반 넓이로 벌리고 편안하게 서서 그라운딩한다.
2. 디렉션을 순서대로 준다.
3. 발바닥 그라운딩을 유지하면서 무릎이 앞으로 자연스럽게 구부러지고 발목과 고관절이 함께 접히듯이 움직인다.
4. 머리와 목, 척추가 하나로 연결되며 머리르 뒤로 꺾거나 허리에 힘을 주는 반응을 자제한다.
5. 이 자세에서 디렉션을 계속 주면서 몸의 긴장을 해소한다.
6. 불편해지면 언제든 다시 일어선다.
주의 : 1. 시선은 몸통을 따라 자연스럽게 아래를 본다. 정면을 주시하려 하면 뒷목에 힘이 강하게 들어가니 주의한다.
2. 처음부터 깊이 구부리지 않아도 된다.
3. 너무 오랫동안 멍키 자세를 유지하려고 무릎과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

런지(lunge) - 한 발 내딛기

1. 서기 자세에서 진행하려는 방향으로 내딛으려는 한쪽 발의 각도를 조절한다.
2. 몸통 역시 같은 방향으로 맞춘다.
3. 진행하려는 방향으로 한쪽 발을 일정 거리 떼어 놓는다.
4. 천천히 앞쪽 무릎을 필요한 만큼 구부려 주면서 둥시에 상체를 기울인다.
5. 뒷발에 체중을 분산시키면서 척추와 골반을 지탱할 수 있도록 한다.
주의 : 골반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무릎의 방향과 힘의 균형을 조절한다.

자연의 원리를 건강에 적용하면 된다. 무엇을 내가 더 하고 있는가? 무엇을 습관적으로 반복하고 있는가? 그것이 밥이든, 술이든, 운동이든 그렇게 '더' 함으로써 불편해지는 상태(dis-ease, 질병)를 다시 편안한 상태(rel-ease, 해소)로 회복하면 본연의 조화로운 건강을 저절로 되찾는 원리가 알렉산더 테크닉이다.

'의식하다'는 사실 '집중하다'와는 많이 다를 수 있습니다. AT는 넌두잉(non-doing)을 기초로 합니다. 넌두잉은 아무것도 안 하는 상태에서 저절로 되어가는 상태로 진행하는 훈련입니다.
'의식하다'의 다른 표현은 '깨어 있다.'입니다. 깨어서 경험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감각이든 느낌이든 생각이든 움직임이든 뭔가 더 하고 있음을(doing)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생각의 해석과 판단 없이 감각 그 자체로 인식하고 있는 상태로 되돌아오라는 메시지입니다. 특별한 것을 더 하라는 것이 아니에요. 습관에 의해 뭔가 하려는 충동과 경향이 무의식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자각(깨어 있기)'하는 것입니다.

한국 알렉산더 테크닉 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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