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데없는 것의 쓰임. 동양고전 장자.

재작년에, 언젠가 읽어봐야겠다며 도서목록에 장자를 적어 놨었습니다.
철학 부분 가장 위에 적어 놓고서 이년 만에 책을 펼쳤네요.
이번에 장자를 읽게 된 계기는 얼마 전 친구들과 다녀온 경주여행 덕입니다.
그때 한옥 펜션 소요유((逍遙乳)에 묵었었는데, 소요유가 장자 내편 첫머리에 나오는 말이거든요.
눈에 띈 김에 읽자는 생각으로 장자를 손에 들었습니다.

우선 장자를 매끄럽게 번역해주신 김학주 교수님께 고맙습니다.
신경 써서 다듬어 주신 덕에 글이 술술 읽혔어요.

이 책에는 혜시라는 친구와 대화가 꽤 많이 나오는데,
장자는 그 친구를 비평합니다.
장자의 친구 혜시는 관점에 따라 사물을 다르게 바라보는 주장을 펼쳤거든요.
예를 들자면 달걀에도 털이 있다.(닭이 되니까) 나는 새의 그림자는 움직이지 않는다.(움직이는 것은 새라서.) 강아지는 개가 아니다.(모든 개가 강아지는 아니기 때문.)등의 주장을 펼쳤는데 장자는 그가 덕을 닦는 일에는 빈약하면서도 물건에는 집착이 강하여, 그의 도가 비뚤어져 있다고 평했어요.
이 부분에서 엘프리드 줄스 에이어(Alfred Jules Ayer)라는 철학자의 주장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정의에 의해 참인가? 그것은 경험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가? 이 두 가지 중에 아무것에도 해당하지 않는다면 그 문장은 무의미하다.'
이 철학자의 주장으로 비추어 봐도 혜시의 주장은 궤변에 불과했다고 여겨지네요.
'팥빙수는 차갑지 않다.(얼음이 차가울 뿐이다.)' 같은 말장난일 뿐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도 혜시의 주장을 모아 놓은 책은 한 권 읽어보고 싶네요.
이런 말장난은 비록 아무 의미도 없을지언정, 문학적인 가치를 지닌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저는 살면서 어떤 행동을 할 때 이런 생각이 들곤 합니다.
"아. 이걸 지금 해서 뭐해. 아무 소용이 없는데."
때론 허무감에 빠지기도 하고, 죄책감이 들 때도 있습니다.
인생을 허송세월하는 기분이 들어서이죠.
장자에서 저에게 준 가장 큰 메시지는 쓸데없는 것의 쓰임(無用之用)입니다.
쓸데없는 것 덕에 쓸 모 있는 것이 유용하단 것이에요.

장자를 읽으며 감탄이 터져 나온 구절이 많습니다.
그래서 몇몇 어귀를 메모 하다 보니, 상당히 많은 글을 옮겨 적었네요.
이렇게 적을게 많다는 건 그만큼 저와 장자의 거리가 멀다는 이야기입니다.
도와 가깝길 원하면서 도에 대한 이야기에 감동을 받는 다는 것은,
도와 한참 떨어진 삶을 사는 중이란 말입니다.
한 십 년쯤 더 지나서 장자를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그때 또 글귀 하나하나에 감탄만 하고 앉아 있다면, 저는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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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편

소요유((逍遙乳) - '어슬렁어슬렁 노님'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노니는 경지에 처신하는 것'

제물론(齊物論) - 모든 사물은 한결같음

큰 지혜를 지닌 사람은 여유가 있지만 작은 지혜를 지닌 사람은 남의 눈치만 본다. 위대한 말은 담담하고 너절한 말은 수다스럽기만 한다. 잠잘 때에는 혼백에 의해 꿈을 꾸고, 깨어나면 몸에 의해 활동한다. 외물을 접하게 되면 어지러워져 매일처럼 마음은 갈등을 일으킨다. 그렇지만 너그러운자도 있고 심각한자도 있으며 꼼꼼한 자도 있다. 두려움이 작을 때에는 두려워 떨지만 두려움이 크면 멍청해진다.

그의 육체의 노화를 따라 그의 마음도 그와 같이 노화한다면 어찌 큰 슬픔이라 말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말이란 소리가 아니다. 말이란 것은 말로 어떤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나, 그 말로 표현하는 생각은 일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 과연 말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본시부터 말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새새끼가 우는 소리와는 다르다고 하지만, 그것과 차이가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옛날에 원숭이를 기르던 사람이 원숭이들에게 도토리를 주면서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朝三暮四) 주겠다"고 하자 원숭이들은 모두 화를 냈다. 다시 "그러면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 주겠다"고 하자 원숭이들은 모두 기뻐하였다. 명분이나 사실에 있어 달라진 것이 없는데도 기뻐하고 화내는 반응을 보인 것도 역시 그 때문이다. 그래서 성인은 모든 시비를 조화시켜 균형된 자연에 몸을 쉬는데, 이것을 일컬어 '자기와 만물 양편에 다 통하는 것'이라 한다.

도에는 본시부터 한계가 없는 것이다. 말(言)에는 본시부터 법도가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말에는 구별이 생기는 것이다. 그 구별에 대하여 말해 보고자 한다. 말에는 왼편이 있고 오른편이 있으며, 이론이 있고 설명이 있으며, 분석이 있고 분별이 있으며, 대립이 있고 다툼이 있다. 이것을 '여덟가지 덕(八德)'이라 말한다.

위대한 도란 말로 표현하지 못하며, 위대한 이론은 말로 나타내지 못하는 것이다. 위대한 어짊은 어질지 않는 듯하고, 위대한 청렴은 겸손하지 않은 듯하며, 위대한 용기는 남을 해치지 않는다. 도가 밝게 드러난다면 도가 아닌 것이며, 말이 이론적으라면 불충분한 것이다. 언제나 어질다면 완전한 것이 못 되며, 청렴함이 분명히 드러난다면 믿음을 받지 못하며, 용감하면서도 남을 해친다면 용기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다섯 가지를 버리지 않고 있어야만 거의 도를 향해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죽음과 삶도 자기에게 변화를 가져올 수 없거늘 하물며 이롭고 해로운 것의 평가 기준이야 어떠하겠는가?

옛날에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 그는 나비가 되어 펄펄 날아다녔다. 자기 자신은 유쾌하게 느꼇지만 자기가 장주임을 알지 못하였다. 갑자기 꿈을 깨니 염연히 자신은 장주였다. 그러니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던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되어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장주와 나비에는 반드시 분별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을 '만물의 조화'라 부른다.

양생주(養生主) - 삶을 길러주는 주인

우리의 삶에는 한이 있으나 앎에는 한이 없다. 한이 있는 삶을 가지고 한 없는 앎을 뒤쫓음은 위태로운 일이다. 그런데도 앎을 추구하는 자가 있다면 위태로울 따름인 것이다.

착한 일을 행하여 명성을 가까이하지 말고, 악한 짓을 행하여 형벌을 가까이하지 말아야 한다. 가운데의 올바름을 따름으로써 법도를 삼는다면 몸을 보존할 수 있게 되고, 삶을 온전히 누릴 수 있을 것이며, 어버이를 부양할 수 있게 되고, 자기 목숨대로 살 수가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나는 그를 훌륭한 사람으로 여겼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조금 전에 내가 조상을 하면서 보니 노인들은 자기 자식을 잃은 것처럼 곡을 하고, 젊은이들은 그의 어머니를 여읜 것처럼 곡을 하더구나. 그들이 그의 죽음에 감동된 까닭은 반드시 조문을 해 달라고 부탁하지는 않았을망정 조문을 하도록 만들고, 곡해 달라고 부탁하지는 않았을망정 곡을 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자연을 어기고 진실을 배반한 것이며 그의 분수를 잊은 것이다. 옛날에는 그런 것을 '자연을 어긴 죄악'이라 말하였다. 그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그가 태어날 때가 되었기 때문이며, 그 사람이 죽은 것도 죽을 운명에 따른 것이다. 윤회하는 때에 안주하고 주어진 운명에 따르면 슬픔이나 즐거움은 끼여들 수가 없는 것이다. 옛날에는 이것을 하늘의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이라 불렀다.

기름은 촛불이 되어 타 없어져 버리지만, 불은 옮겨 붙여 주면 다할 줄 모르게 된다.

인간세(人間世) - 사람들 세상

덕은 명성 때문에 진실성을 잃기 쉽고, 지혜는 경쟁심 때문에 지나치게 되는 것이다. 명성은 서로를 손상시키는 것이고, 지혜는 다툼의 연모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는 흉기이므로 지나치게 행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덕이 두텁고 신의가 많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의 기분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명성을 두고 다투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람들의 마음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억지로 어짊과 의로움을 가지고 사람들을 바르게 하고자 하는 논의를 난폭한 사람 앞에서 하는 것은 남의 악함을 이용하여 자신의 훌륭함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을 '남을 해치는 사람'이라 부른다. 남을 해치는 사람이라면 남도 반드시 그를 해치게 될 것이다.

천하에는 큰 법칙이 두 가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운명이며, 다른 하나는 의로움입니다. 자식이 어버이를 사랑하는 것은 운명입니다. 그것은 마음으로부터 풀어 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은 의로움입니다. 어디를 가나 임금이 없는 곳이 없으며, 하늘과 땅 사이에서는 그 관계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경계하고 조심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몸을 올바로 가지십시오. 태도는 종순해야 하며, 마음은 온화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이 두 가지에도 조심이 필요합니다. 종순하면서도 남에게 끌려 들어가지 않아야 합니다. 온화하면서도 남에게 일을 드러내지 않아야 합니다. 태도가 종순하면서 남에게 끌려 들어가다 보면 전복되고 멸망당하여 무너지고 파멸하게 됩니다. 마음이 온화하면서 남에게 일을 드러내다 보면 명성을 뒤쫓다가 재난을 당하게 됩니다. 상대방이 아이 같다면 그와 더불어 아이같이 되십시오. 상대방이 분수 없는 사람이라면 그와 더불어 분수 없게 행동하십시오. 상대방이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라면 그와 더불어 종잡을 수 없게 행동하십시오. 여기에 통달하게 되면 탈 없는 경지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덕충부(德充符) - 덕이 속에 차 있는 증험

죽음과 삶도 큰 문제이긴 합니다만, 그러나 그 분은 그것에 의해 변화를 받지 않습니다. 비록 하늘과 땅이 떨어지고 뒤엎어진다 하더라도 역시 그 때문에 그 분은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의지할 것이 없는 참된 경지를 잘 알고 있어서 밖의 사물에 의해 변화를 받지 않습니다. 밖의 사물의 변화를 따르면서 그의 근본을 지키는 분인 것입니다.

성인은 마음을 노닐게 하는 바가 있으며, 지혜를 번거로운 것이라고 하고, 약속은 아교와 같이 사람을 제약하는 것이라 하고, 소득이란 것은 다른 것을 더 추구하는 것이라 하고, 기교는 남에게 물건을 파는 것과 같다고 여겼다. 성인은 일을 꾀하지 않는데 어찌 지혜를 쓰겠는가? 약속을 깎아 없애지 않거늘 아교 같은 제약을 어디에 쓰겠는가? 잃는 것이 없거늘 소득을 어찌 추구하겠는가? 이익을 추구하지 않거늘 어찌 물건을 팔겠는가? 이 네가지는 하늘의 보육이라는 것이다. 하늘의 보육이란 하늘이 먹여 주는 것이다. 이미 하늘로부터 먹을 것을 받고 있거늘 또 어찌 사람을 필요로 하겠는가?
성인은 사람의 형체를 지니고 있지만 사람의 감정은 지니고 있지 않다. 사람의 형체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과 어울린다. 사람의 감정이 없기 때문에 시비가 몸에 붙지 않는다. 아득히 작은 것은 그들의 사람에게 속한 일들이고, 덩그렇게 큰 것은 그들이 홀로 이룩하고 있는 하늘에서 내려받은 것이다.

대종사(大宗師) - 위대한 참 스승

앎이란 것은 의거하는 데가 있은 연후에야 판단이 서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의거하는 데가 전혀 불안정된 것이다. 그러니 어찌 내가 말하는 하늘이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겠는가? 어찌 사람이 하늘이 아님을 알 수가 있겠는가?

옛날의 '참된 사람'은 삶을 기뻐할 줄도 모르고, 죽음을 싫어할 줄도 몰랐다. 세상에 나옴을 기뻐하지도 않거니와 저승으로 들어감을 거부하려 들지도 않았다. 의연히 가고 의연히 올 따름인 것이다. 그는 삶의 시작을 꺼리지도 않거니와 삶의 종말을 바라지도 않는다. 삶을 받아도 그것을 기뻐하고 그것을 잃어도 또다시 그러하다. 이것이 자기 마음으로써 도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며, 사람으로써 하늘을 돕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이를 두고 '참된 사람'이라 부른다.

만물에 통달함을 즐기는 것은 성인이 아니다. 따로 친근한 사람이 있는 것은 어짊이 아니다. 때에 앞서는 것은 현명한 것이 아니다. 이로움과 해로움이 같이 통하지 않는 것은 군자가 아니다. 명성을 좇아서 자기를 잃는 것은 선비가 아니다. 자신을 망치면서도 참되지 않는 것은 남을 부리는 사람이 아니다.

응제왕(應帝王) - 자연에 따르는 제왕

지극한 사람의 마음쓰임은 거울과 같은 것이다. 가는 것은 전송하지 않고 오는 것은 마중하지 않는다. 변화에 호응하되 감추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사물을 이겨 내면서도 상처받지 않을 수가 있는 것이다.

외편

변무(騈拇) - 엄지발가락과 둘째발가락이 붙어 있는 사람

천하에는 일정한 본연이 있다. 일정한 본연이란 것은 굽었어도 갈고리고 굽힌 것이 아니고, 곧아도 먹줄로써 곧게 한 것이 아니고, 둥글어도 그림쇠로 등글게 한 게 하니고, 모가 났어도 굽은 자로 모나게 한 것이 아닌 것이다. 붙어 있되 아교나 옻칠로써 붙인 것이 아니고, 묶여 있도 줄이나 새끼로써 묶여진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천하에 개성을 달리하여 모두가 살고 있지만 그가 그렇게 살고 있는 까닭은 알지 못한다. 다 같이 모두가 자기 모습을 지니고 있지만 그가 자기 모습을 지니게 된 까닭은 알지 못한다. 그런 것은 옛부터 지금까지 변한 것이 아니니,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도 없는 것이다.

거협(胠篋) - 남의 상자를 열고 도둑질함

상자를 열고 주머니를 뒤지며 궤짝을 여는 도적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끈으로 꼭 묶고 고리에 자물쇠를 단단히 채워야 한다. 이것이 이른바 일반 세상의 지혜인 것이다. 그러나 큰 도적이 오면 곧 궤짝을 짊어지고 상자를 둘러메고 주머니째 들고 달아나면서, 오직 끈과 자물쇠와 고리가 견고하지 않은 것만을 걱정한다. 그러니 세상에서 말하는 지혜로운 사람이란 바로 큰 도적을 위하여 재물을 쌓아 놓는 꼴이 되지 않겠는가?

어디를 간들 도가 없을 수 있겠느냐? 남의 집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을 마음대로 알아 맞추는 것은 성인이다. 남보다 먼저 들어가는 것은 용기이다. 남보다 뒤에 나오는 것은 의로움이다. 도둑질해도 되는가 안 되는가를 아는 것은 지혜이다. 고르게 나누어 갖는 것은 어짊이다. 이 다섯 가지를 갖추지 않고서 큰 도적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하나도 없다.
이로써 본다면 착한 사람도 성인의 도를 얻지 못하면 서지 못하고, 도척도 성인의 도를 얻지 못하면 행세하지 못한다. 천하에는 착한 사람은 적고 착하지 않은 사람은 많으니, 성인이란 천하를 이롭게 하는 점은 적고 천하를 해롭게 하는 점이 더 많은 자이다.

재유(在宥) - 있는 그대로 버려둠

천하기는 하지만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물건이다. 비천하기는 하지만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백성들이다. 귀찮기는 하지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일이다.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널리 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법이다. 본성과 먼 것이지만 실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의로움이다.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에 불과하지만 널리 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어짊이다. 절도(節度)에 불과한 것이지만 실천하여 쌓아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예(禮)이다. 잘 들어 맞는 것에 불과하지만 높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덕(德)이다. 일(一)에 불과한 것이지만 여러 가지로 변화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도(道)이다. 신묘(神妙)하기는 하지만 그것에 따라 행동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하늘이다.

천지(天地) - 하늘과 땅

요임금이 말하였다.
"아들이 많으면 근심이 많아지고, 부자가 되면 일이 많아지고, 오래 살면 욕된 일이 많아지오. 이 세 가지 것들은 덕을 기를 수 있는 것들이 못 되기에 사양한 것이오."
경계지기가 말하였다.
"처음에 나는 당신을 성인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지금 보니 군자에 지나지 않는군요. 하늘은 만민을 낳고 반드시 그들에게 직분을 줍니다. 아들이 많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직분이 주어지는데 무슨 두려움이 있다는 것입니까? 부자가 된다 하더라도 사람들로 하여금 나누어 갖도록 한다면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성인이란 메추라기처럼 일정한 거처도 없고 병아리처럼 부실하게 먹으면서도, 새처럼 날아다니며 행적도 남기지 않습니다. 천하에 올바른 도가 행해지면 모두와 함께 번창하지만, 천하에 도가 행해지지 않을 때에는 덕이나 닦으면서 한가히 지냅니다."

덕 있는 사람은 들어앉아 있을 적에도 아무런 생각이 없고, 행동함에 있어서도 어떠한 생각도 없습니다. 옳고 그르다거나 아름답고 추악하다는 감정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온 세상을 아울러 이롭게 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고, 온 세상을 충족시켜 주는 것을 안락이라 생각합니다. 모습은 의지할 곳 없는 듯하여 마치 어린아이가 그의 어머니를 잃은 것과 같습니다. 멍청하여 길을 가는 사람이 길을 잃은 것과도 같습니다. 쓰는 재물에는 여유가 있지만 그것이 어디에서 생기는지는 알지를 못합니다. 음식은 충분히 먹으면서도 그것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덕 있는 사람의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효자는 그의 부모에게 잘 보이려 들지 않고 충신은 그의 임금에게 아첨하지 않는데, 그것이 신하와 자식의 훌륭한 태도이다. 부모가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부모가 행한 일을 훌륭하다 여기면 곧 세상에서는 못난 자식이라고 말한다. 임금이 말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임금이 행한 것을 훌륭하다 여기면 곧 세상에서는 그를 못난 신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그런지 어떤지는 알지 못한 일이다.

천도(天道) - 하늘의 도

모두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사사로움이 없다는 것이 바로 사사로움인 것입니다. 선생은 온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생육(生育)을 잃지 않도록 하고자 하십니까? 그러면 하늘과 땅에는 본시부터 법도가 있고, 해와 달에는 본시부터 광명이 있고, 별과 성좌에는 본시부터 배열된 자리가 있고, 새와 짐승들에게는 본시부터 무리가 있고, 나무에게는 본시부터 서서 자라는 본성이 있습니다. 선생님도 그러한 자연의 덕을 본받아 행하시고, 자연의 도를 따라 나아간다면 이미 목적에 달하였을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어짊과 의로움을 애써 들고 나와 북을 치고 다니면서 잃어 버린 자식을 찾듯 하십니까? 아아, 선생은 사람들의 본성을 어지럽히고 있는 것입니다.

눈으로써 볼 수 있는 것은 형체와 색깔이다. 귀로써 들을 수 있는 것은 명칭과 소리이다. 슬프다! 세상 사람들은 그 형체와 색깔과 명칭과 소리로써 그것들의 진실을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형체와 색깔과 명칭과 소리로써는 절대로 그것들의 진실을 파악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하고 있으니, 세상에서야 어찌 그것을 알 수가 있겠는가?

수레바퀴를 깎을 때 엉성히 깎으면 헐렁해져 견고하게 되지 않고, 꼭 끼게 갂으면 빠듯해서 서로 들어맞지 않습니다. 엉성하지도 않고 꼭 끼지도 않게 하는 것은 손의 감각이 호응하여 이루어지는 것이지, 입으로 설명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법도가 존재하기는 합니다만 저는 그것을 저의 아들에게 가르쳐 줄 수가 없고, 저의 아들도 그것을 제게서 배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이 칠십의 노인이 되도록 수레바퀴를 깎게 된 것입니다. 옛날 사람과 그의 전할 수 없는 정신은 함께 죽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임금님께서 읽고 계신 것은 옛사람들의 찌꺼기일 것입니다.

천운(天運) - 하늘의 운행

제가 듣건데 친함이 없다면 사랑하지도 않고, 사랑하지 않으면 효성스럽지도 않다고 했습니다. 지극한 어짊이 효성스럽지 않다고 해도 괜찮겠습니까?
장자가 말하였다.
그렇지 않소. 지극한 어짊이란 고상한 것이어서 효성으로서는 본시 그것을 말할 만한 것이 못되오. 그것이 효성보다 뛰어난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효성이 될 수 없다는 말이오. 남쪽으로 가는 사람이 영(郢)에 이르러 북쪽을 바라보면 명산(冥山)은 보이지 않소. 그것은 어째서이겠소? 멀리 떠나온 때문이겠지요. 그러므로 '공경으로써 효도를 하는 것은 쉽지만 사랑으로써 효도를 하기는 어렵다. 사랑으로써 효도를 하는 것은 쉽지만 어버이를 잊기는 어렵다. 어버이를 잊는 것은 쉽지만 어버이로 하여금 자기를 잊게 하기는 어렵다. 어버이로 하여금 자기를 잊게 하는 것은 쉽지만 천하를 모두 잊게 하기는 어렵다. 천하를 모두 잊는 것은 쉽지만 천하로 하여금 나를 모두 잊게 하기는 어렵다'고 하는 것이요.

물 위를 여행하는 데에는 배를 사용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고, 땅 위를 여행하는 데에는 수레를 사용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배로 물 위를 여행할 수 있다고 해서 땅 위에서도 그런 식으로 밀고 가려 한다면 평생 가도 얼마 나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옛날과 지금이란 물과 육지와 같은 것이 아닙니까? 지금 주나라의 방식을 노나라에 행하려 한다는 것은 마치 육지 위에서 배를 밀고 가려는 것과 같습니다. 수고롭기만 했지 아무런 성과도 없을 것이며 반드시 자신에게 재앙이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부(富)를 좋은 것으로 아는 사람은 남에게 벼슬을 사양하지 못하며, 출세를 좋은 것으로 아는 사람은 남에게 명예를 양보하지 못하고, 권세를 친근히 하는 사람은 남에게 권력을 맡기지 못합니다. 그것들을 가지고 있자니 두렵고, 그것들을 버리자니 슬퍼질 것입니다. 전혀 도에 대하여 살핀 것이 없어서 언제나 쉬지 않고 변동하는 것들만을 바라보고 있으니, 이런 사람들은 '하늘의 처벌을 받을 백성'인 것입니다. 원한, 은혜, 취하는 것, 주는 것, 간(諫)하는 것, 가르치는 것, 살리는 것, 죽이는 것의 여덟가지는 일을 바로 잡는 기구입니다. 오직 위대한 변화를 따라서 막히는 것이 없는 사람만이 그것들을 제대로 쓸 수 있습니다.

백조는 매일 목욕을 하지 않아도 희고, 까마귀는 매일 검은 물을 들이지 않아도 검습니다. 검고 흰 소박한 바탕은 좋고 나쁨을 따질 것이 못 됩니다. 명예라는 겉보기 모양은 널리 뽐낼 것이 못 됩니다. 샘물이 마르면 그곳 물고기들은 땅 위에 함께 모여 서로 물을 뿜어 주고 서로 침으로 적셔 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강물과 호수 속에서 서로를 잊고 지내는 것만 못한 것입니다.

백역(白鶂)이란 새는 암수컷이 서로 바라보면서 눈동자도 움직이지 않는데도 정이 통하여 새끼를 뱁니다. 벌레는 수컷이 바람 부는 위쪽에서 울고 암컷이 바람 부는 아래쪽에서 호응하기만 해도 새끼를 뱁니다. 유(類)란 짐승은 자신이 암컷 수컷을 다 겸하기 때문에 정을 통하여 새끼를 뱁니다. 본성은 바뀌어질 수가 없고, 천명도 변할 수가 없습니다. 시간은 멈출 수가 없고, 도는 막히는 수가 없습니다. 진실로 도를 터득하기만 한다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없고, 도를 잃으면 뜻대로 되는 것이 없습니다.

추수(秋水) - 가을 물

우물 안의 개구리에게 바다에 대하여 얘기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공간의 구속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여름 벌레에게 얼음에 관한 얘기를 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시간의 제약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비뚤어진 선비에게 도에 관하여 얘기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가르침에 속박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을 헤어려 보면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에 비길 바가 못 된다. 그가 살아 있는 시간이란 그가 살아 있지 못한 시간에 비길 바가 못 된다. 그러한 지극히 작은 입장에서 지극히 큰 영역을 추궁하려 들고 있으므로, 미혹되고 혼란하여 스스로 안정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또한 터럭 끝을 지극히 미세한 물건이라고 결정지을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하늘과 땅이 지극히 큰 영역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을 또 어찌 알겠는가?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보면 그 전체를 다 볼 수가 없고, 큰 것에서 작은 것을 본다면 분명히 보이지 않는다. 가늘다는 것은 작은 것 중에서도 가늘다는 뜻이다. 지극히 크다는 것은 큰 것 중에서도 아주 크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다 볼 수 없고 잘 보이지 않는 등의 형편이 다른 것은 자연의 형세가 그러한 것이다. 가늘다든가 굵다든가 하는 것은 형체가 있음으로써 결정되는 것이다. 형체가 없는 것은 수로써 나눌 수가 없는 것이다. 끌어안을 수도 없이 큰 것은 수로써 크기를 추궁할 수 없는 것이다. 말로써 논할 수 있는 것이란 물건으로써 큰 것이다. 뜻으로서 인지할 수 있는 것은 물건으로서 가는 것이다. 말로써 논할 수가 없고 뜻으로써 살펴 인지할 수 없는 것은 가늘고 크다는 것을 결정지을 수가 없는 것이다.

도의 입장에서 본다면 물건에는 귀하고 천한 것이 없다. 물건 자체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은 귀하고 남은 천한 것이다. 세속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귀하고 천한 것은 자기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남이 정해 주는 것이다. 상대적인 관심에서 볼 때에 그것에 비하여 크다는 입장에서 말하면 만물에는 크지 않는 것이 없게 되며, 그것에 비하여 작다는 입장에서 보면 만물에는 작지 않는 것이 없게 된다.

들보나 기둥 재목은 성벽을 무너뜨리는 데는 유용하지만 구멍을 막는 데에는 소용없다. 그것은 기구가 다르기 때문이다. 천리마는 하루에 천 리를 달릴 수 있지만 쥐를 잡는 데에는 살쾡이만 못하다. 그것은 재주가 다르기 때문이다. 올빼미는 밤에는 벼룩을 잡고 터럭 끝도 볼 수 있지만 낮에 나와서는 눈을 뜨고도 큰 산조차 보지 못한다. 그것은 본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묻노니 어째서 옳다는 것은 존중하고 그르다는 것은 무시하며, 다스림은 존중하고 혼란은 무시하는가? 그것은 하늘과 땅의 이치와 만물의 진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하늘은 존중하면서 땅은 무시하고, 음(陰)은 존중하면서도 양(陽)은 무시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그것이 통용될 수 없는 것임은 분명한 일이다. 그런데도 그런 주장을 버리지 않고 내세우는 자들은 어리석은 자가 아니면 거짓말쟁이인 것이다.

도를 아는 사람은 반드시 이치에 통달해 있고, 이치에 통달한 사람은 반드시 임기응변에 밝다. 임기응변에 밝은 사람은 사물에 의하여 자신이 해를 받는 일이 없다. 지극한 덕을 지닌 사람은 불도 그를 뜨겁게 하지 못하고, 물도 그를 빠져 죽게 하지 못하며, 추위와 더위도 그를 해치는 수가 없고, 새나 짐승들도 그를 상하게 하는 수가 없다. 그렇다고 그것들은 가벼이 여긴다는 말도 아니다. 편안과 위험을 살피고 화(禍)와 복(福) 어느 것에나 편히 지내며, 자기의 거취를 신중히 함으로써 아무것도 그를 해칠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자연을 그의 내부에 존재케 하고, 인위적인 것은 밖으로 내보내어, 그의 덕이 자연에 있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물 속을 다니면서도 교룡(蛟龍)이나 용을 피하지 않는 것은 어부들의 용기이다. 육지를 다니면서도 외뿔소나 호랑이를 피하지 않는 것은 사냥꾼들의 용기이다. 흰 칼날이 눈앞에 맞부딪치고 있어도 죽음을 삶과 같이 여기는 것은 열사(烈士)들의 용기이다. 자기가 곤궁해진 것은 운명임을 알고, 뜻대로 되자면 시세를 만나야 한다는 것을 알아 큰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성인의 용기이다.

남방에 새가 있는데 그 이름을 원추(鵷鶵)라 부른다네. 자네도 그것을 알겠지? 원추라는 새는 남해에서 출발하면 북해까지 날아가는데,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고, 단 샘물이 아니라면 마시지 않네. 그런데 솔개가 썩은 쥐를 갖고 있다가 원추가 날아가자, 그를 우러러보면서 끽 소리를 내며 자기 것을 빼앗을 까봐 놀랐다 하네. 지금 자네는 양나라 때문에 나를 보고 끽 소리를 내는 것인가?

지락(至樂) - 지극한 즐거움

옛날에 바다 새가 노(魯)나라 교외에 와서 내려앉았다. 노나라 임금은 그 새를 맞이하여 종묘로 불러들여 잔치를 베풀고 구소(九韶)의 음악을 연주하여 즐겁게 해 주고, 쇠고기와 양고기, 돼지고기로 안주를 삼도록 하였다. 새는 눈을 멍하니 드고 걱정하고 슬퍼하면서 한 조각의 고기도 먹지 못하고 한 잔의 술도 마시지 못하고서 사흘 만에 죽어버렸다. 이것은 사람인 자기를 양육하던 방법으로 새를 양육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려 들지 않았던 것이다.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려면 마땅히 그를 깊은 숲속에서 살게 하고, 호수 가에 노닐게 하며, 강이나 호수에서 헤엄치게 하고, 미꾸라지와 송사리를 잡아 먹게 하며, 같은 새들과 줄지어 날아가다 내려앉고 멋대로 유유히 지내게 하여야만 되는 것이다. 새는 사람의 말조차도 듣기 싫어하거늘 어찌 시끄러운 음악을 견디겠는가?

달생(達生) - 삶의 진실에 통달함

삶의 실정에 통달한 사람은 타고난 본성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일에는 힘쓰지 않는다. 운명의 진실에 통달한 사람은 지혜로는 어찌 할 수 없는 일에는 힘쓰지 않는다. 육체를 보양하려면 반드시 먼저 물건이 있어야 하지만, 남아돌아가는 물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육체를 보양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삶을 지탱하자면 반드시 먼저 육체를 손상시키지 말아야 할 것은데, 육체가 손상되지 않으면서도 삶을 잃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삶이 태어나는 것은 아무도 물리칠 수가 없으며, 삶이 떠나 버리는 것도 아무도 멈추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술에 취한 사람은 수레에서 떨어져도 다치기는 할지언정 죽지는 않는다네. 몸의 뼈마디들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만 그를 손상시키는 점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것은, 술취한 사람의 정신은 완전한 상태에 있기 때문일세. 그는 수레에 타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떨어지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네. 죽음이나 삶과 놀람과 두려움이 그의 가슴 속에 스며들지 않으므로 어떤 물건에 부딪친다 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일세. 그는 술에 의하여 완전한 정신 상태를 얻고 있으므로 이와 같을 수 있는 것이네. 그러니 하물며 자연에 의하여 완전한 정신 상태를 얻은 사람이야 어떻겠는가?

질그릇을 내기로 걸고 활을 쏘면 잘 쏠 수 있지만, 띠 고리를 내기로 걸고 쏘면 마음이 켕기게 되고, 황금을 내기로 걸고 쏘면 눈이 가물가물하게 된다. 그의 기술은 언제나 같지만 아껴야 할 물건이 있게 되면 밖의 물건이 소중히 여겨지게 된다. 누구나 밖의 물건을 소중히 여기게 되면 자기 속 마음은 졸렬해지는 것이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양생을 잘하는 사람은 양을 치는 것과 같은 것이어서, 그 중 뒤지는 놈을 발견하여 채찍질을 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노 나라에서 선표(單豹)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바위 굴 속에 살면서 골짜기 물을 마시고 지냈습니다. 백성들과 이익을 다투지 않고, 나이가 칠십이 되어도 어린아이 같은 얼굴빛이었습니다. 불행하게도 굶주린 호랑이를 만나 그 굶주린 호랑이가 그를 잡아먹어 버렸습니다. 또 장의(張毅)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부잣집이건 가난한 집이건 어디에나 뛰어다니며 사귀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이 사십 세에 열병에 걸려 죽어 버렸습니다. 선표는 그의 속마음을 길렀으나 그의 외형을 호랑이가 잡아먹어 버렸습니다. 장의는 그의 외부의 사귐을 잘하였으나 그의 안에서 병이 그를 공격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모두가 그 중 뒤지는 놈에 채찍질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마음 속에 엉긴 기운이 흩어지기만 하고 되돌아오지 않으면 곧 정신 상태가 불안전하게 됩니다. 기운이 올라가기만 하고 내려오지 않으면 곧 사람을 쉽사리 성내게 만듭니다. 내려가기만 하고 올라오지 않으면 사람으로 하여금 잘 잊도록 만듭니다. 올라가지도 않고 내려오지도 않아서 몸 속에 담겨 심장에 가득 차면 곧 병이 됩니다.

산목(山木) - 산 속의 나무

배를 나란히 하고 황하를 건널 적에 만약 빈 배가 와서 자기 배에 부딪쳤다면 비록 마음이 좁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성을 내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한 사람이라도 그 배 위에 있다면 곧 소리쳐 배를 저리로 저어 가라고 할 것입니다. 한 번 소리쳐 듣지 못하면 두 번 소리치고, 그래도 듣지 못하면 세 번 소리치면서 반드시 나쁜 소리가 거기에 뒤따르게 될 것입니다. 앞에서는 성내지 않다가 지금은 성을 내는 것은 앞의 것은 빈 배였는데 지금 것은 사람이 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텅 비게 하고서 세상에 노닌다면 그 누가 그를 해칠 수가 있겠습니까?

동해에 새가 있는데 이름을 의태(意怠)라 부릅니다. 그 새의 성질은 푸덕푸덕 더디게 날아다녀 아무 능력도 없는 것 같습니다. 다른 새들이 이끌어 주어야 날며, 다른 새들에게 밀려 내려 앉게 됩니다. 나아갈 적에는 감히 다른 새보다 앞서지 않고, 물러석 적에는 감히 다른 새보다 뒤지지를 않습니다. 음식은 감히 다른 새보다 먼저 먹지 않으며 반드시 다른 새가 먹고 남긴 것을 먹습니다. 그러므로 그 새는 다른 새들 무리에서 배척 당하지 않고 밖의 사람들도 끝내 해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환난을 면하고 있습니다. 곧은 나무는 먼저 잘리고 단 샘물은 먼저 말라붙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렇지 못하고 지식을 꾸며 어리석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몸을 닦음으로써 남의 더러움을 밝혀 내며, 밝게 해나 달이 내걸려 있듯이 자기를 드러내는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환난을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가나라 사람이 도망친 얘기를 듣지 못하셨습니까? 그 나라의 임회(林回)는 천금의 구슬을 버리고 어린아이를 업고서 달아났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를 보고서 '그 값으로 말할 것 같으면 갓난아이의 값은 얼마되지 않고,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말하면 갓난아이가 훨씬 더 거추장스럽습니다. 천금의 구슬을 버리고 갓난아이를 업고 도망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이 때 임회는 '그 구슬이란 이익 때문에 나와 맺어진 것이고, 이 아이는 하늘에 의하여 나와 맺어진 것이오. 이익으로 맺어진 것이란 궁지에 몰리거나 환난을 당하거나 해를 보게 되면 서로 버려지게 마련이오. 하늘에 의하여 맺어진 것은 궁지에 몰리거나 환난을 당하거나 해를 보게 되면 서로 거두어 주어야만 하는 것이오'하고 대답했습니다. 서로 거두어 주는 사이와 서로 버리는 사이란 먼 것입니다. 또한 군자의 사귐이란 담담하기 맹물과 같고, 소인들의 사귐이란 달콤하기 단술과 같습니다. 군자들의 사이는 담담하지만 더욱 친해지고, 소인들의 사이는 달콤하지만 결국 끊어지게 됩니다. 이유 없이 맺어진 것들이란 이유 없이 떨어지게 마련인 것입니다.

잡편(雜篇)

제게 지혜가 없으면 사람들은 저를 어리석다고 말할 것이고, 지혜가 많으면 도리어 저 자신을 걱정하게 될 것입니다. 어질지 않으면 곧 남을 해치게 될 것이고, 어질고 보면 도리어 제 몸을 걱정하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의롭지 않으면 남에게 해를 가할 것이고, 의롭고 보면 도리어 저 자신을 걱정하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저는 어떻게 하면 이런 처지를 면할 수 있게 되겠습니까? 이상의 세 가지 문제가 제가 걱정하는 점입니다.
노자가 말하였다.
조금 전에 나는 당신의 두 눈썹 사이를 보고서 당신의 문제를 알아 맞히고 있었소. 당신은 골똘히 생각하며 근심하기를 자기 부모를 여읜 듯하고, 장대를 들고서 바다 깊이를 재려는 사람같이 하고 있소. 당신은 자기 본성을 잃은 사람이오. 멍청하니 당신은 당신의 참된 본성으로 되돌아가려 하지만 어떻게 할는지를 모르고 있소. 가련하오.

삶을 보양하는 방법이란 위대한 도 하나를 지니는 것이며, 자기 본성을 잃지 않는 것이오. 점치는 것에 의하여 자기의 길흉(吉凶)을 판단하려 들지 않아야 하고, 자기 분수를 지킬 줄 알아야 하고, 인위적인 행위를 그만둘 수 있어야 하오. 남에 대한 관심을 버리고 자기를 충실히 지닐 수 있어야 하오. 행동이 자연스러워야 하고, 마음은 거리낌이 없어야 하며, 아이처럼 순진할 수 있어야 하오. 아이는 하루 종일 울어도 목이 쉬지 않는데, 그것은 지극히 자연과 조화가 되어 있기 때문이오. 또 하루 종일 주먹을 쥐고 있어도 손이 저려지지 않는데 그것은 자연의 덕과 일치되어 있기 대문이오. 하루 종일 보면서도 눈을 깜빡거리지 않는데, 밖의 물건에 대하여 치우쳐져 있지 않기 때문이오. 길을 가도 가는 곳을 알지 못하고, 앉아 있어도 할 일을 알지 못하오. 밖의 물건에 순응하고, 자연의 물결에 자기를 맡기오. 이것이 삶을 보양하는 방법이오.

시험삼아 '옮겨가는 것'에 대하여 논하여 보기로 한다. 그것은 자기 삶을 근본으로 삼고, 자기 지혜를 스승으로 모시기 대문에 시비를 따지게 되고 결과적으로 명분과 내용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를 위주로 하여 남들로 하여금 자기의 명분을 따르게 하려 들게 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죽음으로써 명분을 보상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쓸 데 있는 일을 하는 것은 슬기롭다 하고 쓸데없는 일을 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한다. 뜻이 통하는 것을 명예롭다고 하고, 궁지에 몰리는 것을 욕되다고 한다. '옮겨가는 것'이란 지금 사람들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시장에서 남의 발을 밟으면 잘못을 사과하지만 자기 형의 발을 밟았다면 '아아' 소리 정도만 내고, 크게 친한 사이면 아무런 표시도 않는다. 그러므로 "지극한 예는 자기와 남의 구별을 두지 않고, 지극한 의로움은 자기와 물건을 구분하지 않고, 지극한 슬기는 꾀하는 일이 없고, 지극한 어짊은 각별히 친한 이가 없고, 지극한 신의는 금전이 개입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도라는 것은 덕을 늘어놓은 것이다. 삶이란 것은 덕의 빛인 것이다. 본성이라는 것은 삶의 바탕인 것이다. 본성이 움직이는 것을 행위라고 말하는데, 행위가 인위적이면 그것을 본성을 잃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앎이란 물건과의 접촉에서 생겨난다. 앎이란 생각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나 슬기로운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이 있는 것은, 곁눈질로써 물건 전체를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행동을 하되 자연을 따라 부득이하게 움직이는 것을 덕이라 말한다. 행동을 하되 자기 본성을 잃는 일이 없는 것을 다스림이라 말한다. 명성을 추구하는 것은 사람의 본성과 반대가 되지만 실제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은 자연에 순응하는 것이 된다.

당신은 월나라의 유배당한 사람 얘기를 듣지 못했습니까? 나라를 떠나가다 며칠 지나서는 그가 전에 알았던 사람을 보기만 하여도 기뻤습니다. 나라를 떠난 지 수십 일이 되자, 전에 자기 나라에서 만난 일이 있는 사람을 보기만 하여도 기뻤습니다. 일 년이 넘자 자기가 아는 사람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보기만 하여도 기뻤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떠난 지가 오래될수록 사람을 더욱 깊이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텅 빈 인적 드문 고장으로 도망하여 잡초가 족제비나 다닐 듯한 좁은 길을 막고 있는 고장에서 오랜 동안 외로이 있게 되면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터벅터벅 들리기만 하여도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형제나 친척들이 웃고 얘기하는 소리가 그의 곁에서 들릴 적에야 어떻겠습니까? 오랜 동안 참된 사람의 말로써 웃고 얘기하는 소리가 우리 임금님 곁에는 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천하를 다스리는 일이 말을 먹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역시 말의 본성을 해치는 것들을 제거해 주기만 하면 그뿐일 것입니다.

개는 잘 짖는다고 좋은 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말을 잘 한다고 현명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물며 위대함이야 말과 상관이 있겠습니까? 스스로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정말로 위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스스로 내세우는 것이야 덕이 되겠습니까? 위대함이 갖추어져 있기로는, 하늘과 땅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추구하여 위대함이 갖추어진 것이겠습니까? 위대함이 갖추어진 것에 대하여 아는 사람은 추구하는 것이 없고, 잃는 것도 없고 버리는 것도 없어야 하며, 밖의 일이나 물건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본성을 바꾸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자기 본성으로 되돌아옴으로써 자연스럽게 막히는 일이 없고, 옛 방법을 따르되 옛 방법에 합치시키려 들지 않는 것이 위대한 사람의 진실한 모습입니다.

이 세상에는 남의 말을 잘 따르는 사람들이 있고, 일시적인 안락을 꾀하는 사람들이 있고, 세상 일에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이른바 남의 말을 잘 따르는 사람들이란 한 선생의 이론을 배우기만 하면 얌전히 그것을 따라 자기의 학설로 받아들여 만족하는 자들이다.
일시적인 안락을 꾀하는 사람들이란 돼지 몸에 붙은 이와 같은 자들이다.
세상 일에 애쓰는 사람들이란 순인금과 같은 자들이다. 양고기는 개미를 좋아하지 않지만 개미들은 양고기를 좋아하여 모여드는데, 양고기가 노리기 때문이다. 순은 어짊과 의로움이라는 노린내 나는 행동을 하여 백성들은 그를 좋아한다.
신 같은 사람(神人)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로 모여드는 것을 싫어한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도 이들과 친근히 지내지 않는다. 친근히 지내지 않으면 이익을 기대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매우 친한 사람도 없고, 매우 관계가 먼 사람도 없다. 덕을 지니고 조화된 마음을 기르면서 천하에 순응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대로 물건을 보고 귀에 들리는 대로 소리를 들으며, 마음의 본성으로 되돌아가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자연스러움으로써 인간을 대하지, 인위적인 행위로 자연의 변화에 참견하지 않는다.

만물의 근원이 하나라는(大一)을 알고, 만물의 근원이 지극히 고요하고 움직임이 없다는 대음(大陰)을 알고, 만물을 분별없이 하나로 보는 대목(大目)을 알고, 자연의 조화가 균등히 작용한다는 대균(大均)을 알고, 자연에는 일정한 법도가 있다는 대방(大方)을 알고, 자연이란 진실하다는 대신(大信)을 알고, 자연이란 안정된 것이라는 대정(大定)을 알면, 지극한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사람들은 자연으로부터 도망을 치고 그의 본성을 떠나 타고는 성정을 망치고 그의 신명을 잃고서 여러 가지 세상 일에 종사한다. 그러므로 그의 본성을 거칠게 함부로 다루는 사람은 욕망과 증오의 움이 터서 그의 성격을 이룬다. 갈대 같은 잡초들이 자라나, 처음 싹이 틀 적에는 나의 몸에 도움을 줄 듯이 보이지만 곧 나의 본성을 뽑아 버려, 위션은 무너지고 아랫편은 새면서 장소를 가리지 않고 모든 곳에 파탄이 생긴다. 그래서 종기와 부스럼이 생기고 열병에 걸리고 당뇨병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시간에는 시작과 끝이 있고 세상에는 변화가 있다. 화(禍)와 복(福)은 유행하는 것이기 대문에 어떤 사람에게는 좋지 않은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 되는 수도 있다. 모두가 제각기 따르는 성향이 다르기 때문에 한편에서는 바르다고 인정되는 것이 한편에서는 잘못된 것이 될 수도 있다. 큰 택지에 비유하면, 갖가지 동식물이 한데 어울려 살고 있는 것과 같다. 큰 산에 비추어 본다면, 나무나 바위들이 다 같이 자리잡고 있는 것과 같다. 이것을 고을의 여론이라 말하는 것이다.

나무와 나무를 마찰시키면 불이 붙는다. 쇠가 불 속에 오래 있으면 녹는다. 음과 양의 기운이 엇섞여지면 하늘과 땅이 크게 놀라 움직인다. 그래서 이에 번개와 천둥이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빗속에도 벼락이 쳐서 느티나무를 불태우기도 하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이로움과 해로움이라는 매우 큰 우환이 있는데 두 가지 중 어느 편에 빠져도 그 피해로부터 도망칠 곳이 없는 것이다. 언제나 두려워함으로써 아무 일도 이룩하지 못하게 되며, 그의 마음은 하늘과 땅 사이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불안하다. 또 고민이 마음에 엉겨 근심에 잠기게 되며, 이로움과 해로움이라는 생각이 서로 마찰을 일으켜 너무 과다한 불 같은 욕망을 낳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마음 속의 화기(和氣)를 불태우게 된다. 마음이 달처럼 맑고 고요해도 본시 사람은 불 같은 욕망을 이겨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모든 것이 무너져 올바른 도리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내가 어제 이곳을 오는데 도중에 나를 부르는 자가 있었습니다. 내가 돌아다보니 수레바퀴 자국 가운데의 붕어였습니다. 내가 붕어에게 물었습니다. '붕어야, 너는 무얼 하고 있는 거냐?' 붕어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동해의 물결 속에 노닐던 놈입니다. 선생께서 한 말이나 몇 되박의 물이 있거든 제게 부어 살려 주십시오.' 내가 말했습니다. '그러지. 내 남쪽으로 가서 오나라와 월나라의 임금을 설복시켜 서강(西江)의 물을 끌어다가 너를 마중하도록 하겠다. 괜찮겠느냐?' 붕어는 성이 나서 얼굴빛이 변하며 말했습니다. '저는 제가 늘 필요한 물을 잃고 있어서 당장 몸 둘 곳이 없는 것입니다. 저는 한 말이나 몇 되박의 물만 있으면 사는 것입니다. 선생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하다가는 차라리 저를 건어물전에 가서 찾는 편이 옳게 될 겁니다.'

유학자가 <시경>과 <예기>를 근거로 하여 남의 무덤을 도굴하였다. 함께 간 큰 선비가 무덤 위에서 아래쪽에 대고 말하였다.
"동녘이 밝아온다.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느냐?"
작은 선비가 속에서 말하였다.
"시의(尸衣)를 아직 다 벗기지 못했는데, 입 속에 구슬이 물려 있습니다."
"<시경>에도 본시 이르기를 '푸른 보리가 무덤가에 자라고 있네. 살아서 은혜를 베풀지도 못했는데, 죽어서 어찌 구슬을 물겠는가?'라고 하였네. 그 놈의 머리카락을 잡고, 그의 턱수염을 누른 다음 쇠망치로 그의 턱을 쳐서 천천히 그의 볼까지 벌린 다음, 입 속의 구슬이 다치지 않도록 잘 꺼내거라."

혜자가 장자에게 말하였다.
"자네의 말은 쓸데가 없네"
장자가 말하였다.
"쓸데가 없음을 알아야만 비로소 쓸 곳을 얘기할 수가 있는 것일세. 땅은 넓고 크기 짝이 없지만, 사람들이 걸을 때 쓰는 것은 발로 밟는 부분뿐일세. 그렇다고 발을 재어 가지고, 그 밖의 땅은 땅 속 황천에 이르기까지 깎아내려 버린다면 사람들이 그대로 땅을 쓸 수가 있겠는가?"
혜자가 말하였다.
"쓸 수 없지."
장자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쓸데없는 것의 쓰임도 잘 알게 되었을 것일세."

통발이란 것은 물고기를 잡는 기구이지만,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을 잊게 된다. 올가미란 것은 토끼를 잡는 기구이지만 토끼를 잡고나면 올가미를 잊게 된다. 말이란 것은 뜻을 표현하는 기구이지만 뜻을 표현하고 나면 말을 잊게 된다. 우리는 어쩌하면 말을 잊은 사람들과 더불어 얘기할 수 있게 되겠는가?

삶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은 비록 존귀하고 부하다 하더라도 몸을 보양하는 수단을 위하여 자신을 손상케 하지 않는다. 비록 가난하고 천하다 하더라도 이익을 위하여 육체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높은 벼슬과 존귀한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도 모두가 생활 수단을 잃는 것을 중시한다. 그래서 이익을 보기만 하면 가벼이 그 자신을 파멸시키고 있으니, 어찌 미혹된 것이 아니겠는가?

수치를 모르는 자가 부자가 되고, 말이 많은 자가 출세합니다. 큰 명예와 이익이란 거의 수치도 모르고 말만 많은 자들에게로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명예란 관점에서 보든가, 이익으로 계산하든가 말 많은 것이 가장 좋은 것이 됩니다. 만약 명예와 이익을 내버리고 마음에 돌이켜 생각해 본다면 선비의 행동으로서는 그의 천성을 간직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평범한 것이 행복이 되며, 남음이 있으면 해가 된다는 것은 모든 사물이 다 그러한데, 재물에 있어서는 더욱 심하다. 지금 부자들은 귀로서는 종·북·저·피리의 소리를 들으며 즐기고, 입으로는 짐승 고기와 맛있는 술 맛을 실컷 봄으로써 그의 뜻을 만족시키는 한편 그의 할 일은 잊고 있으니, 혼란이라고 할 만한 일이다. 자기의 성한 기운에 빠져들어가 무거운 짐을 지고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고통이라고 할 만한 일이다. 재물을 탐하여 병에 걸리고, 권세를 탐하는 데 정력을 다 쓰며, 고요히 지낼 때면 정욕에 빠지고, 몸이 윤택해지면 정력을 낭비하니, 이것은 질병이라고 할 만한 일이다. 부를 바라고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마음에 담을 둘러친 것처럼 장애가 생기지만 그것을 피할 줄은 모르고 그대로 정력을 사용하기만 하니, 이것은 치욕이라고 할 만한 일이다. 재물이 쌓여봤자 쓸데가 없는데도 재물을 모을 생각을 품은 채 버리지 않아 마음 번뇌로 가득 차는데도 이익을 추구하기만 하니, 이것은 우환이라 할 만한 일이다. 집안에 있으면 강도가 들지나 않을까 걱정하고, 밖에 나가면 도적들의 해를 받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여 집에는 둘레에 망루와 내다보는 창을 만들어 놓고 밖에는 감히 홀로 다니지 못하니, 이것은 두려워하는 것이라 할 만한 것이다. 이 여섯 가지 것은 지극한 피해인 것이다.

자기가 할 일이 아닌데도 그 일을 하는 것을 외람된 짓이라 합니다.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데도 나아가 가까이 하는 것을 간사한 짓이라 합니다. 남의 뜻에 맞도록 말을 이끌어 나가는 것을 아첨하는 짓이라고 합니다.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얘기하는 것을 알랑거리는 짓이라고 합니다. 남의 약한 점을 얘기하기 좋아하는 것을 모함하는 짓이라 합니다. 사귀던 사람을 떨어지게 하고 친한 사람을 멀어지게 하는 것을 해치는 짓이라 합니다. 남을 칭찬하고는 속임으로써 남을 악에 떨어뜨리는 것을 간악한 짓이라 합니다. 좋고 나쁜 것을 가리지 않고 두 가지를 다 받아들이며 얼굴빛을 적응시키고, 그가 바라는 목적을 이루는 것을 음험한 짓이라합니다. 이상의 여덟가지 흠이란 것은, 밖으로는 사람들을 어지럽히고 안으로는 자신을 손상케 하는 것입니다.
큰 일을 해 내기 좋아하고 변혁을 잘 시켜 일정한 것들까지 바꾸면서 공명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을 참람된 짓이라 합니다. 자기만 아는 지식을 가지고 일을 멋대로 하며 남의 것을 침범하여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것을 탐욕스러운 짓이라 합니다. 잘못을 알고도 고치지 않고 간하는 말을 들으면 그 나쁜 행동을 더 심하게 하는 것을 포악한 짓이라 합니다. 남이 자기에게 찬성하면 괜찮지만 자기에게 찬성하지 않으면 비록 좋은 일이라도 좋지 않다고 하는 것을 교만한 짓이라고 합니다. 이상이 네 가지 환난입니다. 이 여덟가지 흠을 버리고 네 가지 환난을 행하지 않아야만 비로서 가르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충성스럽고 곧은 것은 공로가 위주가 되며, 술을 마시는 것은 즐거움이 위주가 되며, 상을 치르는 것은 슬픔이 위주가 되며, 부모를 섬기는 것은 부모의 마음에 들게 하는 것이 위주가 됩니다. 일의 공로를 훌륭하게 이룩하는 데 있어서 그 방법이 일정해서는 안 됩니다. 부모를 섬겨 마음에 들도록 해 드리는 데 있어서는 방법을 논할 일이 아닙니다. 술을 마심으로써 즐기는 데 있어서는 술그릇을 이것저것 고를 것이 없습니다. 상을 당하여 슬퍼함에 있어서는 예의를 따질 일이 아닙니다. 예의라는 것은 세속적인 행동 기준입니다. 진실함이란 것은 하늘로부터 타고난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한 자연은 변경시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도를 알기는 쉽지만, 그것을 말하지 않기는 어렵다.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 것이 자연으로 나아가는 방법이다. 알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인위로 나아가는 근거가 된다. 옛날 사람들은 자연스러웠지 인위적이 아니었다.

주평만(朱泙漫)은 용 잡는 방법을 지리익(支離益)에게서 배웠는데, 수업료로 천금이 나가는 집을 세 채나 팔아 올렸다. 그러나 기술을 습득한 다음에는 그 기술을 쓸 곳이 없었다.

성인은 꼭 그러한 것도 꼭 그렇다고 고집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력에 의존하는 일이 없다. 보통 사람들은 꼭 그렇지 않은 것도 꼭 그렇다고 고집한다. 그래서 흔히 무력을 써서 문제를 해결하려 든다. 무력을 따르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에는 추구하는 것이 있게 된다. 이처럼 무력에 의지하여 행동하면 멸망하게 되는 것이다.

지혜가 뛰어나면 많은 비난을 받게 되고, 용기와 힘이 있으면 많은 원한을 사게 되며, 어짊과 의로움을 내세우면 많은 책망을 듣게 된다. 삶의 실정에 통달해 있는 사람은 위대하나 지식에만 통달해 있는 사람은 작은 사람이다. 위대한 천명에 통달해 있는 사람은 자연을 따라 자유롭지만 세상의 작은 일에 통달해 있는 사람은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

제자들이 말하였다.
"저희들은 까마귀나 솔개가 선생님을 먹어 버릴까 두렵습니다."
장자가 말하였다.
"땅 위에 놓아 두면 까마귀와 솔개가 먹을 것이고, 땅 아래에 묻으면 개미들이 먹을 것이다. 이쪽 놈이 먹는다고 그것을 빼앗아 딴 놈들에게 주는 셈이다. 어찌 그렇게 편벽되게 생각하느냐?"

여섯가지 경서
《시경(詩經)》《서경(書經)》《예기(禮記)》《악기(樂記)》《역경(易經)》《춘추(春秋)》

<시경>은 사람들의 뜻을 서술한 것이고, <서경>은 사건들을 서술한 것이며, <예경>은 행동에 대하여 서술한 것이고, <악경>은 조화에 대하여 서술한 것이다. <역경>은 음양의 변화를 서술한 것이고, <춘추>는 명분에 대하여 서술한 것이다.

나나니벌 : 배추벌레를 물어다 놓고 거기에 알을 낳아, 거기에서 새끼들이 영양을 취하도록 한다. 옛 사람들은 그것을 잘못 알고 배추벌레가 나나니벌로 변한다고 믿었다.

한단은 조나라의 도읍지인데, 그 도읍의 걸음걸이를 멋지게 여기고 연나라 시골뜨기가 걸음걸이를 배우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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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겨울, 따끈한 피자 한 판. 가회동 대장장이 화덕 피자집.

이 집 피자가 맛있다는 소리를 듣고,
꼬불꼬불 길을 돌아왔습니다.
안국역에서는 2번 출구로 나와서 쭉 올라가다가 왼쪽 카페 두루 쪽으로 길을 건너면 바로인데,
삼청동 쪽에서 오다가 헤맸네요.^^;

간판-'가회동 대장장이 화덕 피자집'

심지어 간판을 못 보고 지나치기도 했어요.
간판이 아주 작게 붙어 있어서 초행길이라면 지나치기 쉽겠더라고요.

입구-'가회동 대장장이 화덕 피자집'

자. 이게 가회동 대장장이 화덕 피자집 입구입니다.
눈 크게 뜨고 보지 않으면 이게 피자집인지 선술집인지 알기 어렵겠지요?
아무튼, 여길 지나쳐서 헤매던 중 극적으로 귀인(?)을 만났습니다.
추운날 밖에서 고생하시는 서울시 관광 안내원이 친절하게 안내해주셔서, 무사히 가회동 대장장이 화덕 피자집에 도착했어요.

상차림-'가회동 대장장이 화덕 피자집'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건물에 군더더기 없는 상차림.
촛농이 잔뜩 묻은 나무 촛대가 마음에 듭니다.

마르게리타 피자-'가회동 대장장이 화덕 피자집'

마르게리타 피자를 시켰어요.
거기에 루꼴라를 잔뜩 올려 먹으니 향긋하니 맛이 참 좋습니다.
가회동 대장장이 화덕 피자집은 다양한 종류의 토핑을 취향대로 추가해 먹을 수 있거든요.
씬피자라고 하기엔 약간 두껍고, 크기는 조금 작아요.
다른 데선 마르게리타피자에 치즈가 좀 빈약하게 들어간 편인데,
가회동 대장장이 화덕 피자집은 치즈가 듬뿍 올려져서 좋았어요.
피자 맛있습니다!

가회동 대장장이 화덕 피자집 위치


큰 지도에서 월풍 맛집 지도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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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옆 산책로. 석파정.

운보 김기창 화백 탄생 백 주년 기념전을 보러 서울 미술관에 간 김에, 석파정에 들렀습니다.
석파정은 흥선대원군이 별장으로 쓰던 곳이라네요.
산책로를 걷는 재미가 쏠쏠해서 즐겁게 석파정을 둘러봤습니다.

부암동 풍경-'부암동 석파정'

우선 부암동의 아기자기한 모습이 보이네요.
부암동엔 분명 건물은 많은데, 지나다니는 사람은 별로 없어서 동네가 참 조용하더라고요.
날이 추워서인지 헐벗은 조각상이 유독 추워 보였어요.

옷 입은 나무-'부암동 석파정'

겨울을 나려고 나무도 짚으로 옷을 해 입었습니다.

한옥-'부암동 석파정'

건물을 요란하진 않지만 참 견고하게 잘 지었습니다.
나무도 아주 튼튼해 보이고, 잘 짜인 한옥이에요.

소나무-'부암동 석파정'

석파정에 멋진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데,
이 나무 한 그루를 보는 것 만으로도 석파정에 들른 보람이 있습니다.
제멋대로 뻗은 가지가 예술이에요.

통나무 의자-'부암동 석파정'

산책로를 걷다 보니, 앉아 쉬기 좋게 통나무 의자를 놓아두었습니다.
한겨울엔 앉기엔 너무 차가워 보여요.
앉자마자 치질이 걸릴듯합니다.

바위-'부암동 석파정'

커다랗고 널찍한 바위가 눈에 띄는군요.
바위가 판판한 게 여름에 와서 착! 하고 달라붙으면 시원하게 더위를 식혀줄 것 같아요.
물론 지금 달라붙으면 입이 돌아가겠죠.

겨울 길-'부암동 석파정'

겨울이라 손이 시리고 코도 시렵지만,
눈 쌓인 석파정 산책로를 따라 걸음을 옮기는 즐거움은 다른 계절에 맛보지 못하겠지요.
언제 또 서울 미술관에서 좋은 전시를 한다는 소식이 들리면,
그 핑계로 다시 석파정에 들러야겠습니다.

서울 미술관 - 석파정 가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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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블로거에서 블로그 글 목차 보여주기.

블로그를 시작한 지 어느덧 팔 년.
그동안 1,000개가 넘는 글을 썼습니다.
글이 많아지니 전에 썼던 글을 찾을 때, 한참 헤매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얼마 전 월풍서가라는 메뉴를 만들었습니다.
블로그에 썼던 글을 좀 편하게 찾아보려는 의도에서였지요.
레이블(태그)별로 RSS를 받아와서 자동으로 목차를 만들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구글 블로거엔 레이블 간 계층을 지원하지 않아 제가 원하는 목차를 만들기 어려울 듯 했습니다.
그래서 수동으로 정리를 시작했어요.
읽었던 책에 대한 글을 한참을 걸려 정리하고 나니, 다른 글을 정리할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글을 새로 쓸 때마다 목차를 갱신해야 한다는 점도 큰 부담이었어요.
거의 반년 동안 목차 페이지를 반쪽짜리로 남겨두었더니 자꾸만 눈에 밟힙니다.
좀 제대로 된 목차를 만들어 보고 싶었어요.

그러던 중 아주 좋은 정보를 얻었습니다.

http://www.dorajistyle.pe.kr/feeds/posts/summary/-/A/B/C
식으로 피드를 받아오면 A,B,C 레이블을 모두 포함한 포스트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죠.
이거다 싶어서 코드를 짜다 보니 한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너무 많은 요청(Request)를 보내야 하는 것인데요.
결국 1차 레이블만 요청해서 받아온 결과를 클라이언트 단에서 처리해주는 방식으로 코드를 작성했습니다.
페이지를 읽는데 시간이 조금 걸리긴 하지만, 이정도면 만족스럽습니다.

월풍서가(月風書架)


목차를 만들며 레이블 정리를 새로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전 글을 좀 읽게 되었는데요.
정말 유치한 글도 보이고, 지금 봐도 마음에 드는 글도 있습니다.
나중엔 마음에 드는 글 목록도 만들어서 월풍서가에 넣고 싶어요.
이번에 글을 정리하다가 알게 된 한가지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가 미국의 문화식민이었다는 건데요.
블로그에 쓴 영화 감상평을 보면 미국 영화가 대다수더라고요.
한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 영화를 모두 합쳐야 미국 영화를 본 수에 겨우 미칩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미국 문화에 크게 노출되어있던 거죠.
물론 앞으로도 미국 영화를 볼 때가 많겠지만,
미국 영화라는 것을 의식하고 보고,
다른 나라 영화도 두루 보아야겠습니다.

혹시 구글 블로거에 목차 페이지를 만들고 싶으신 분을 위해 코드를 공유합니다.
필요하신 분은 가져다 쓰세요.

구글 블로거에 목차 페이지를 생성해 주는 스크립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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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동향이 한눈에 보이는 서울 바이크쇼 2014.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서울 바이크쇼에 다녀왔습니다.
자전거를 많이 타는 편은 아니지만,
도대체 바이크쇼에서는 뭘 보여주나 궁금해서 가 보았어요.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3일 동안 열리는 행사였는데,
저는 토요일에 갔습니다.
사전등록을 해서 금방 들어갈 줄 알았는데, 줄을 서서 등록을 하고 들어가야 하더라고요.
전국에서 자전거에 관심 있는 사람은 죄다 왔는지 엄청나게 붐볐습니다.
전시장은 그리 크지 않아서 둘러보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어요.
자전거 용품을 조금 저렴하게 판매하는 이벤트 부스에 특히 사람이 많았습니다.
저도 한번 쓱 돌아보며 괜찮은 물건이 있나 보았는데,
딱히 눈에 띄는 게 없더라고요.

강의-'서울 바이크쇼 2014'

지나가다 프로 선수가 자전거 강의를 하는 걸 잠시 지켜봤습니다.
휠 사이즈에 따른 신체 포지션과 자전거 주행에 대한 강의였는데,
조교(?)님의 웨이백 자세 시범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는 자전거를 타고 산을 넘어본 적이 없어서 웨이백 자세를 써볼 일이 없었는데요.
잘 기억해 뒀다가 혹시 산악 주행을 하게 되면 써먹어야겠습니다. :D
옆엔 자전거를 구석구석 씻어주는 세차장이 보였는데,
이런 이벤트 때 말고도 샵에서 필요할 때 세차를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안전 용품을 전문적으로 파는 부스도 보였는데,
험한 길에서 타거나, 겨울철 미끄러운 길을 달려야 할 땐 보호대를 착용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사이클링과 승마를 결합한 운동기구가 있어 한번 타봤는데 재미있더라고요.
집에서 나가기 싫은데 운동은 하고 싶다면, 괜찮은 운동 기구가 될 듯합니다.
그리고 카본 제품을 전시한 부스도 좀 보였습니다.
카본 휠을 돌려보니까 정말 가볍더라고요.
카본차를 타보면 정말 지름신의 유혹에 빠질듯하겠습니다.
국내 양궁 활을 제작하는 회사가 카본 자전거를 만들기 시작했다는데,
잘 되어서 좋은 가격에 좋은 제품을 내놓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자전거를 그리 자주 타는 게 아니라 카본차는 부담스러운 가격이지만,
일주일에 1Mm정도 탈 정도로 자주 타게 되면 한번 고민해 볼까요?
음. 1Mm는 너무 열심히 타는 거 같고, 적어도 500Km는 타야 카본차를 타도 활용을 잘할 것 같아요.
그리고 사실 카본차 살 돈이 있다면, 바이크 프라이데이 티킷을 사고 싶습니다.^^;

오르트립-'서울 바이크쇼 2014'

아.
그리고 또 제 눈을 끈 곳은 오르트립 부스입니다.
오르트립 패니어와 캐리어를 달고 여행 준비를 마친 자전거가 눈을 끄네요.
40대가 되기 전에 대륙 한번 자전거로 종횡무진 누벼보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D

얼바인(Ulivne)-'서울 바이크쇼 2014'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는 곳은 얼바인이라는 자전거 의류 브랜드입니다.
런칭한지 4개월 정도밖에 안 된 신생브랜드인데 디자인이 좋더라고요.
자전거 의류는 평소에 입고 돌아다니기 좀 민망한 경우가 많은데,
여기 옷은 일상생활에서도 충분히 입고 다녀도 될만한 수준이었습니다.
조만간 패드 바지 하나 사려고 했는데,
마침 얼바인이 바이크 쇼에서만 30% 세일 하길래 저지와 패드 바지 하나 구입했어요.
얼바인(Ulbine)은 원래 노스페이스나 언더아머등 아웃도어 의류를 OEM으로 생산하던 회사라고 합니다.
그동안 아웃도어 제품을 만들며 노하우가 쌓였다니, 제품의 품질도 괜찮겠지요?
일단 디자인은 마음에 드니, 옷이 내구성이 너무 약하거나 불편하지만 않다면,
앞으로 자주 애용하게 될 것 같습니다.
서울 바이크쇼.
내년에도 시간 되면 와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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