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가 느낀 삶이란 무엇인가? 인생론.

아직 그 유명한 전쟁과 평화도 한 번 안 읽어봤습니다.
그럼에도 톨스토이를 멋진 작가라고 기억한 건,
그의 단편인 ‘바보 이반’을 참 재미있게 읽은 덕이지요.
이번엔 그가 삶을 논한 인생론을 읽어 보았습니다.
제가 삶에서 느끼는 것과 몇 가지 닮은 부분이 보여 반가웠지만,
그가 내놓은 해결책은 제가 추구하는 방향이 아닙니다.
한 사 년 전에 이 책을 접했다면, 톨스토이의 말에 깊이 공감했을지도 모르겠군요.
지금은 그때와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으니까요.
그가 느낀 것은 그의 인생이고,
저는 저대로 살아갑니다.

Leo Tolstoy in His Study

톨스토이가 말한 인생

가난한 자가 얻는 모든 지식은 오직 자기 자신의 행복을 더하는 데만 필요하다. 부유한 자가 얻는 모든 과학과 예술의 지식은 과학 및 예술의 의의에 관한 모든 고상한 말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그저 권태를 정복하고 유쾌히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만이 필요하다.

대체로 죽음의 공포는 그 육체의 죽음과 동시에 삶의 행복이 상실된다는 공포로부터 생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장래의 사랑이란 있을 수 없다. 사랑은 그저 현재에서의 활동이다.
현재에서 사랑을 나타내지 않는 자는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이다.

인생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사랑이라 부르고 있는 것은, 자기의 개인적 행복의 어떤 조건을 다른 조건보다 낫다고 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자기의 생명을 줄 수 있는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첫째로 자기 생활의 행복을 위해서 남에게서 빼앗고 있는 쓸데없는 것을 버리고 다음에는 또 한가지 불가능한 일, 즉 사람들 중에서 누구에게 자기의 생명을 바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톨스토이의 자기 탐구
1. 도박에 대한 열성은 차츰차츰 맹렬한 감각에의 습관으로 옮겨가는 사욕에서 온 열정이다.
2. 정욕은 육체적인 욕망이다. 상상으로 말미암아 움직이는 육체, 그것의 욕망인 것이다. 이것을 억누르려고 하면 할수록 도리어 점점 강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이 욕망과의 싸움이란 매우 어려운 것이다. 이것을 물리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육체와 정신을 괴롭게 하는 일을 하는 것 뿐이다.
3. 허영심 - 이것은 타인에겐 가장 해가 적고 내겐 가장 해를 많이 끼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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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편집자는 쇼펜하우어를 모르고 인생론을 얘기할 수는 없다고 합니다. 쇼펜하우어는 어떻게 세상을 해석했을까요?

염세주의자로 유명한 쇼펜하우어.
이 책에서 그의 흥미로운 인생론을 엿볼 수 있습니다.
사실 저는 지나치게 낙천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어요.
"모두가 잘 될 거야."
하지만 이제 더는 낙천주의자가 아니에요.
그렇다고 쇼펜하우어처럼 염세주의자도 아니죠.
낙천주의자든 염세주의자든 죽으면 자연으로 돌아갈 뿐이에요.
저는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습니다.
by 月風

쇼펜하우어 인생론 에세이. 사랑은 없다.

쇼펜하우어

여자들은 미남에 호감을 표시하지만 남자들이 여자의 미모를 따지는 것만큼이나
남자들의 외모를 그다지 중요시 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자녀의 형태는 여성 쪽의 유전적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자의 환심을 사는 것은 무엇보다 남자의 체력과 용기이다.
그 다음으로 여자가 남자에게 바라는 조건은 남자의 성격이나 심리적 특성이다.
그러나 남자의 지능이 뛰어나다는 것은 여자에게 별다른 매력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녀의 지능은 어머니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여자가 성격이 좋다는 것은 남자에게는 매력의 조건이 못 된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소크라테스 같은 남자들이 악처로 소문난 크산티페 같은 여자와 함께 살고 있다.

우리가 왜 사랑은 하는가 좀더 깊이 생각해보고 그 본질을 깨닫게 되면
사랑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힘을 얻게 될 것이라고 본다.

돈을 벌어서 써보지도 못하고 유산으로 남겨주기 위해 귀중한 인생을 낭비했다면
그는 참으로 허망한 일을 했으며 미친 생애를 살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남으로부터 찬사나 아부 받기를 좋아하거나 남의 비난에 대해 지나치게 반응이 심한 사람들,
예컨대 남이 자기를 판단해주는 기준에 따라 사는 사람들은 결국 이웃의 노예에 불과하다.

"이 못난 죄수들은 영혼을 구제받기 위해 허용된 몇 시간을 단두대의 사다리 위에서
군중들에게 무슨 멋진 말을 하고 죽을까 궁리하는 데 모두 허비한다." - 마테오 알레만

더럽고 추한 정치 지도자가 다스리게 되는 것은 그런 사람을 뽑을 수밖에 없었던
국민들의 착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들의 수준에 맞는 인물을 골라 낸 것일 뿐이다.

철학자나 작가나 교회주의자들의 비위에 맞는 말이나 해주고 자기들의 주문에 맞는 논리를
발표해 주기를 바라는 거지 근성을 나에게마저 적용하려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철학자는 기존의 학설을 끝없이 의심하고 뒤집는 재미가 없으면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여러 의미에서 식물은 크게 만족한 삶을 살고 있고,
짐승은 인간보다 훨씬 단순한 삶에 만족하며 살고 있고,
인간 중에도 지적 수준이 낮을수록 삶에 대한 만족도가 크다.

우리는 본래 없었던 것인데 잠시 존재하다가 다시 없는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잃는 것이 없다.
생각해보라. 우리가 죽음으로 부터 무엇을 잃었단 말인가.

우리는 쾌락 대신 지혜를, 행복 대신 깨달음을 추구해야 한다.

악서는 아무리 적게 읽어도 결코 적다고는 말할 수 없고,
양서는 아무리 많이 읽어도 지나친 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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