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소리에 대하여 (On Bullshit)


내가 처음 PC 통신이라는 것을 접했을 때.
온라인 세상에는 서로에 대한 배려와 소통하고자 하는 의지.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고자 하는 마음 등이 어우러진 장소처럼 느껴졌다.
댓글 하나를 달 때도 대충 아무렇게나 던지지 않고 신중히 한 자 한 자 타이핑했던 기억이다.
그런데 요즘 온라인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목소리가 크고 개소리를 내뱉는 사람이 많다.
세상에 심각한 일은 수없이 일어나지만, 우리는 그 모든 사안에 대해 깊이 파고들 여력이 없다.
그러나 세상 돌아가는 일에 무관심한 것처럼은 보이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대충 훑어보고는 빠르게 자신이 경험한 단편적 지식을 뽐낸다.
마치 카페 모카에 올려진 휘핑크림만 대충 맛보고는 "이건 커피가 안 들어간 음료다. 내가 먹어봤다." 인증샷을 올리는 꼴이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떠들고 싶다면 그건 십중팔구 개소리가 튀어나올 수밖에 없다.
때로는 알고 싶어서 한참을 들여다봐도 알지 못하는 것들도 있다.
아리송할 땐 입을 닫아야 개소리가 튀어나오지 않을 텐데.
조금이라도 알면 여기저기 말하고 싶은 입이 방정이다.
내 입에서 튀어나오는 개소리나 좀 줄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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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소리라는 표현은 종종 꽤 느슨하게, 글자 그대로의 특수한 의미와 관계없이, 단순히 욕설을 가리키는 일반용어로 사용된다. 다음으로, 현상 자체가 매우 광범위하고 일정한 형태가 없기 때문에 뚜렷하고 명쾌한 분석은 무리한 획일화가 되기 쉽다.

협잡 : 누군가가 자신의 생각, 느낌 또는 태도에 대해 특히 허세를 부리는 말 또는 행동을 통해 기만적으로 부정확하게 진술하는 것으로 거짓말에는 미치지 못함.
협잡의 동의어 : 허튼소리(bladerdash), 쓸데없는 말(claptrap), 말도 안 되는 얘기(hokum), 실없는 소리(drivel), 헛소리(buncombe), 사기(imposture), 엉터리(quackery)등
- Max Black, The Prevalence of Humbug (Ithaca: Cornell University Press, 1985).

협잡은 의도적인 부정확한 진술이다. 만일 기만하려는 의도가 협잡의 변치않는 특징이라면, 개념적인 필욘성에 의해 협잡이라는 것의 속성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행위자의 심리상태에 따라 좌우된다.

더 오래전 예술의 시대에는
건축가들이 최고의 세심함을 기울여 공들여 만들었지
매 순간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도,
신들이 모든 곳에 계셨으므로.
- 롱펠로

The Builders
...
In the elder days of Art,
Builders wrought with greatest care
Each minute and unseen part;
For the Gods see everywhere.
...
- Henry Wadsworth Longfellow(http://www.hwlongfellow.org/poems_poem.php?pid=118)

옛 장인들은 자기 작품에서 보통은 눈에 보이지 않는 특징들에 대해서조차 사려 깊은 자기 규율을 느슨히 하지 않았다. 비록 그 특징들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더라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장인들은 양심때문에 괴로워했을 것이다. 따라서 아무것도 양탄자 밑에 쓸어 담듯 숨기지 않았다. 혹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개수작(bullshit)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부주의하게 만든 조잡한 물건이 어떤 면에서 개소리와 비슷하다고 이해하는 것은 타당해 보인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 그럴까? 개소리 자체가 항상 부주의하게 혹은 제멋대로의 방식으로 생산된다는 점, 개소리는 결코 세심하게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점, 개소리를 지어낼 때 롱펠로가 넌지시 말했던 저 꼼꼼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점 등이 비슷한가? 개소리를 하는 사람은 천성이 별생각이 없는 멍청이인가? 그의 생산물은 언제나 너절하고 조야한가? '똥shit'이라는 말은 분명히 그렇다는 걸 암시한다. 대변은 설계되거나 수공예로 만드는 게 아니다. 그것은 그냥 싸거나 누는 것이다. 그것은 다소 엉겨 붙은 모양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공들여 만든 것은 아니다.

광고와 홍보의 영역 및 오늘날 이와 밀접히 연관된 정치 분야는 개소리의 사례들로 온통 가득 차 있다. 그리하여 이들 분야는 반론의 여지 없이 개소리라는 개념의 고전적 패러다임들을 제공할 수 있다.

1914년 방언 노트 IV. 162 불bull, 목적에 부합하지 못하는 말; '더운 공기(hot air)'.

개소리의 본질은 그것이 거짓이라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이 가짜(phony)라는 데 있다. 이 차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리는 가짜 또는 모조가 어떤 측면에서는 (진짜라는 점을 제외하면) 실제의 사물에 비해 열등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또한 진짜가 아니라는 것은 어떤 다른 면에서 단점일 필요도 없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그가 진리라고 여기는 것이 부과하는 객관적 제약에 따라야만 하며, 이것은 일정 수준의 숙련도를 필요로 한다. 거짓말쟁이는 불가피하게 진릿값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거짓말이란 것을 지어내기 위해서 거짓말쟁이는 무엇이 진실인지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해야만 한다. 그리고 효과적인 거짓말을 지어내려면 거짓말쟁이는 자신의 허위를 그 진리의 위장 가면 아래에 설계해야 한다.

개소리는 꼭 허위일 필요가 없으므로, 그것은 부정확하게 진술하는 내용에 있어 거짓말과 다르다. 개소리쟁이는 사실 또는 그가 사실이라고 간주하는 것에 대해 우리를 기만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아니면 심지어 기만할 의도가 없을 수도 있다. 그가 반드시 우리를 기만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그의 기획의도(enterprise)이다. 개소리쟁이에게 유일하게 없어서는 안 될 독특한 특징은, 그가 특정한 방식으로 자신의 속셈을 부정확하게 진술한다는 사실이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과 거짓말쟁이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전자는 마지못해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다. 반면 후자는 거짓말하기를 좋아하며 거짓말하는 즐거움으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다. … 후자는 거짓말에서 기쁨을 느끼며, 허위 그 자체를 즐긴다.
- "Lying," in Treatise on Various Subjects, in Fathers of the Church, ed. R.J. Deferrari, vo. 16(New York: Fathers of the Church, 1952) 성 아우구스티누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어떤 진술이 거짓이라는 사실은, 그것이 아무리 약하고 쉽게 번복할 수 있다 해도, 그것만으로도 그런 진술을 하지 않을 이유가 된다. 반대로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순수한 거짓말쟁이에게는 그런 사실이 그 진술을 하고 싶어 할 이유가 된다. 개소리쟁이에게 그것은 그 자체로 그 말을 해야 할 이유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아니다. 거짓을 말하거나 참을 말할 때 모두, 사람들은 사태의 진상이 무엇인지에 관한 자신의 믿음에 좌우된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과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말하자면 같은 게임 속에서 반대편으로 활동한다. 그들 각각은 자신들이 이해하는 사실에 반응한다. 비록 한쪽의 반응은 진리의 권위에 따르고, 다른 쪽의 반응은 진리의 권위에 저항하며 그 요구에 맞추기를 거부하지만 말이다. 개소리쟁이는 이러한 요구를 모두 무시한다. 그는 거짓말쟁이와는 달리 진리의 권위를 부정하지도, 그것에 맞서지도 않는다. 개소리쟁이는 진리의 권위에 조금도 신경쓰지 않는다. 이 점 때문에, 개소리는 거짓말보다 훨씬 더 큰 진리의 적이다.

어떤 진술이 참이고 어떤 진술이 거짓인지를 규명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더 이상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오직 두 가지 대안만이 있을 수 있다. 첫째는 진실을 말하려는 노력과 기만하려는 노력 모두를 그만두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에 대한 어떠한 주장도 내세우기를 삼간다는 뜻이다. 두 번째 대안은 상황이 어떠한지를 기술하려는 주장, 그러나 개소리밖에는 아무것도 될 수 없는 주장을 계속하는 것이다.

어떤 주제에 대해 말할 기회나 의무들이 화자가 가진 주제와 관련된 사실에 대한 지식을 넘어설 때마다 개소리의 생산은 활발해진다.

모든 것에 대한 의견, 혹은 적어도 국가적인 사안과 관계된 모든 것에 대한 의견을 갖는 것이 민주주의에서 시민의 책임이라는 널리 퍼진 신념으로부터 이와 유사한 사례들이 발생한다. 양심적인 도덕적 행위자로서, 전 세계의 모든 분야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상황을 평가하는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믿는 이들이 있다. 이들에게는, 개인의 의견이 현실에 대한 이해와 의미 있게 연결되지 않는 현상이 말할 필요도 없이 훨씬 더 심각할 것이다.

'반실재론적' 신조는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사심없이 노력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는 확신을 무너트리고, 심지어 객관적 탐구라는 개념이 이해 가능한 개념이라는 믿음을 약화시킨다. 이러한 믿음의 상실에 대한 하나의 반응은 정확성(correctness)이라는 이념에 대한 헌신이 요구하는 규율에서 전혀 다른 규율로 후퇴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진정성(sincerity)이라는 대안적 이념을 추구할 때 요구되는 규율이다. 개인들은 주로 공동 세계를 정확하게 묘사하는데 성공하기를 추구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전달해보겠다는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촌철살인과 개소리의 경계선상에 놓인 말들을 경쟁적으로 쏟아내면서 누가누가 더 개소리를 잘 만들어내는지, 누가 더 뛰어난 개소리 예술가(bullshit artist)인지 장기 자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정치에서 말하는 프레임론과 마케팅에서 말하는 포지셔닝론 모두 개소리의 기술에 관한 이론이다. 모두가 말의 진릿값에는 관심 없고 자신들의 숨은 의도를 관철시키려는 언어조작에 전념한다. - 이 윤

민주 시민으로서 우리나라의 중대 사안 모두에 대해서 어떤 의견을 가져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감을 가진 사람은, 진정성만 있으면 된다는 것을 자기위안으로 삼고 자신이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사안에 대해서도 이러저러한 발언을 하고 또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미안한 말이지만, 그런 사람은 십중팔구 개소리를 할 수밖에 없다. 프랭크퍼트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 강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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