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노하에서 궤메스.


아침 여섯시 반에 알람을 맞춰두었는데 좀 더 일찍 눈이 떠졌다.
잠을 잘 잔 덕에 개운하다.
짐을 챙겨 노하를 벗어날 즈음 해가 떠오른다.
잠시 배낭을 내려두고 오렌지 하나를 까서 먹었다.
오렌지 색이 저기 막 떠오르는 태양과 닮았다.
햇살이 대지를 덮듯 오렌지 과즙이 입안을 덮는다.
온 몸에 에너지가 가득차서 힘차게 걸음을 옮기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두 방울 내리다 말겠지 싶었지만, 판초를 꺼내 입었다.
판초를 쓰자마자 소나기가 엄청나게 쏟아져 내린다.
하늘에 구멍이 난 걸까?
신발과 양말까지 몽땅 젖는 데는 오렌지 한 알 먹는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휑한 도로변이라 이 물벼락을 잠시 피할 곳도 없었기에, 젖은 신발로 찌그덕 소리를 내며 걸음을 내딛는 것 말고는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궁둥이를 붙일 기회가 한참 동안 없었으나 이슬라를 지날 때 마침 허름한 버스 정류장이 눈에 띄었다.
낡은 의자 하나 덩그러니 놓인 좁은 정류장이었지만, 고마운 마음으로 지친 다리를 쉬게 했다.

한참을 걸어도 노란 화살표가 보이지 않는다.
'혹시 길을 잘못 들었나?'
세상을 살다 보면 이런 생각이 떠오를 때가 많다.
사람마다 대처하는 방식이 다를 테지만, 나는 우선 확실한 표식이 보일 때까지는 계속 간다.
잘못된 선택이었을 때도 잦지만, 중간에서 책을 덮기는 싫다.
비극일지언정 결말을 보아야 새로운 시작도 있는 법이니까.
이번엔 다행히 바레요(Bareyo)로 향하는 도롯가에 노란 화살표가 보였다.
길을 따라가니 메루엘로(Meruelo) 알베르게가 나타났고, 달걀 지단을 넣은 샌드위치와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다시 길을 나선다.
갈림길이 많이 나왔지만 고민할 때마다 지역 주민이나 신부님이 방향을 알려주어서 궤메스 알베르게에 무사히 도착했다.
알베르게엔 수프와 빵, 와인, 빠에야 등 푸짐한 점심이 기다리고 있다.
든든하게 잘 먹고 나니 비가 또 한 차례 시원하게 내린다.
비 맞으며 걷는 건 괴롭지만, 편히 앉아 듣는 빗소리는 기분 좋다.
잘 먹었으니 씻고 낮잠을 좀 자야겠다.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뜬 것 같은데 벌써 저녁을 먹을 시간이다.
밥 먹기 전에 에르네스토(Ernesto) 신부님이 궤메스에 알배르게를 세우게 된 과정을 들었다.
스페인 내전 때 가족이 칸타브리아로 이주해 와서 살다가 신부가 되기로 하고 공부해서 25살에 공부를 마치고는 칸타브리아 지방에서 잠시 신부로 지내다가 여행을 떠났다.
세계여행을 하며 여러 사람을 만나고 형제애와 사랑이 가득한 따듯한 공동체가 답이라는 생각에 알베르게를 세웠다고 한다. 순례자를 위한 알베르게는 아니었고 지역 공동체를 위한 알베르게로 지역 공동체를 운영하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어려운 나라를 돕는다. 순례자가 이 알베르게를 찾은 건 17년 전이 처음인데 그로부터 이곳을 방문하는 순례자가 계속 늘어났다고 한다.
초반엔 한 해에 200명 정도가 고작이었는데 요즘에는 한 해에 만 명 가까이 다녀간단다.
산탄데르로 가는 길에 관해서도 이야기 해 주었다.
산탄데르를 지나서 좀 가다 보면 걸어서 건널 수 없는 강이 나오는데 강 위에 다리가 하나 있단다.
다리를 건너는 건 트램 한 정거장이고 1.5유로란다. 무임승차로 걸리면 걱정하지 말란다.
산토냐 교도소에 갇혀 콩을 심으면 된단다. 그럼 그 콩을 팔아서 과테말라 학교 교육 재정지원에 쓰인다고, 좋은 일 좀 하란다. 이런 재미난 이야기를 듣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
저녁은 수프와 감자요리다.
같은 테이블에는 바스크 온드라이바(아레나 위) 에서 온 경찰관 아저씨가 앉았는데 48살 답지 않게 젊어 보였다.
스페인은 휴가가 30일인데 자기는 경찰이라 50일이란다. 그래서 여기저기 여행을 많이 다닌다고.
여행 초반에 만난 파릇파릇 독일인 20대 캠핑 커플도 다시 만났다. 산탄데르에서 여행을 마치고 발렌시아의 친구 결혼식에 간단다. 풋풋하다.

어떤 길이든 같은 방향을 향해 걷다 보면 한 번 만났던 사람들을 또다시 마주치게 된다.
어제의 추억에 오늘의 반가움을 더해 맞이하고 내일을 넘겨짚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웃으며 또 만나리라.

이정표-'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노하에서 궤메스. (Camino del Norte - Noja to Güemes)'

길-'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노하에서 궤메스. (Camino del Norte - Noja to Güemes)'

고양이-'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노하에서 궤메스. (Camino del Norte - Noja to Güemes)'

빗길-'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노하에서 궤메스. (Camino del Norte - Noja to Güemes)'

외딴 건물-'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노하에서 궤메스. (Camino del Norte - Noja to Güemes)'

농촌-'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노하에서 궤메스. (Camino del Norte - Noja to Güemes)'

돌집-'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노하에서 궤메스. (Camino del Norte - Noja to Güemes)'

meruelo 알베르게-'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노하에서 궤메스. (Camino del Norte - Noja to Güemes)'

목초지-'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노하에서 궤메스. (Camino del Norte - Noja to Güemes)'

이정표-'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노하에서 궤메스. (Camino del Norte - Noja to Güemes)'

이정표-'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노하에서 궤메스. (Camino del Norte - Noja to Güemes)'

나무와 닭-'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노하에서 궤메스. (Camino del Norte - Noja to Güemes)'

궤메스 알베르게-'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노하에서 궤메스. (Camino del Norte - Noja to Güemes)'

궤메스 알베르게 -'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노하에서 궤메스. (Camino del Norte - Noja to Güemes)'

궤메스 알베르게 도서관-'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노하에서 궤메스. (Camino del Norte - Noja to Güemes)'

궤메스 알베르게 도서관-'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노하에서 궤메스. (Camino del Norte - Noja to Güemes)'

빨래-'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노하에서 궤메스. (Camino del Norte - Noja to Güemes)'

궤메스 알베르게-'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노하에서 궤메스. (Camino del Norte - Noja to Güemes)'

궤메스 알베르게 텐트-'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노하에서 궤메스. (Camino del Norte - Noja to Güemes)'

궤메스 알베르게-'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노하에서 궤메스. (Camino del Norte - Noja to Güemes)'

궤메스 알베르게 지도-'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노하에서 궤메스. (Camino del Norte - Noja to Güemes)'

도보 여행자들의 신발-'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노하에서 궤메스. (Camino del Norte - Noja to Güemes)'

잠자는 개-'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노하에서 궤메스. (Camino del Norte - Noja to Güemes)'

잠자는 개-'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노하에서 궤메스. (Camino del Norte - Noja to Güe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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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산토냐에서 노하.


'조식 포함.'
"아침은 언제 먹을 수 있나요?"
"자정이 넘어서부턴 언제 드셔도 괜찮습니다."
이때 눈치를 챘어야 하는 건데.
새벽 여섯시에 일어나 식당으로 향했다.
식탁에 놓인 조그만 접시.
그 위에는 슈퍼에서 파는 말라붙은 빵 쪼가리.
비스킷 하나.
티백 하나.
'이게 뭐야!!'
이런 음식으로는 식사하며 사용되는 에너지도 보충해주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 살면서 식사라고 내준 것 중에 가장 형편없었다.
어릴 적 학교 급식에 햄 스테이크라고 적힌 메뉴가 생각났다.
그건 김밥용 햄을 조금 크게 썰어주는 거였다.
그건 이 '조식 포함'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속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우비라고 파는 걸 사서 입었지만, 빗물을 하나도 막아주지 못할 때 이런 기분이 들까?
세상을 살다 보면 간혹 속을 때도 있다.
이건 그저 한 끼의 아침 식사일 뿐이지만,
배신당한 믿음엔 항상 슬픔이 뒤따른다.
그 슬픔은 때론 분노로 바뀌기도 하고,
더 큰 슬픔이나 무기력으로 빠지기도 한다.
나의 슬픔은 잠시 분노로 변했으나, 화낸다고 상황이 나아질 건 아니니까 체념하고 짐을 싸 나왔다.

산토냐에서 노하는 가까운 거리다.
그래서 부씨엘로라는 산을 들렀다.
꽤 산 같은 느낌이 난다.
여기저기 울어대는 산 곤충도 많고 경사도 제법이다.
산 위에 오르면 바다가 잘 보일 줄 알았는데, 울창한 나무에 가려 바다는 잘 보이지 않았다.
산을 한 바퀴 돌고 내려올 즈음, 아래쪽에 넓게 쳐진 담장이 보인다.
무슨 건물인가 궁금해서 자세히 보았더니 교도소다.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높게 쳐진 벽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
교도소 생활을 이토록 가까이서 본 적은 처음이다.
그리고 그 교도소 옆엔 묘지가 있다.
묘지와 교도소 사이.
삶의 경계를 걷는 기분이 묘했다.
나는 오늘도.
낮과 밤사이.
냉정과 열정 사이.
그리고 삶과 죽음 그 어디쯤을 걷는다.

노하에는 2시가 안 되어 도착해서 숙소에 짐만 풀어 놓고 해변에 일광욕하러 나섰다.
오렌지 한 망과 바나나, 산미겔 맥주까지 싸 들고 어딘가 즐거운 곳으로 휴가를 떠나는 기분이다.
산미겔을 사게 된 건 길을 걷다가 바닥에 떨어진 산미겔 맥주캔을 많이 보아서다.
길바닥 마케팅이랄까.
뜨거운 태양과 모래사장.
그 아래서 즐기는 시원한 맥주.
캬~
생각만 해도 좋다.
그런데 맥주가 정말 맛없다.
이런 분위기면 대충 아무거나 마셔도 맛있을 텐데 이런 맛이라니.
아쉽다.
물놀이하려고 바다에 발을 담갔더니 물이 아주 차다.
잠깐만 놀고 나와서 기분 좋은 낮잠을 잤다.
잠에서 깨고 해변을 바라보니 엄청난 몸짱 할아버지가 물놀이를 즐기신다.
지방은 없고 뼈와 근육으로만 이루어진 사람처럼 보였다.
산 세바스티안 해변의 몸 좋은 젊은이들도 이 할아버지를 보면 고개를 절로 숙였으리라.
미켈란젤로가 저 인체의 아름다움을 보았다면 다비드상 대신 안토니오 석상을 조각하지 않았을까?!
다비드는 어렸다.

숙소로 돌아와 소금기를 씻어내고, 노하 시내 구경을 잠깐 하고 돌아와선 숙소 1층 식당에서 순례자 메뉴를 먹었다.
아로즈, 마카로니, 레드와인, 생선, 소고기, 요거트, 수박.
다양한 요리가 나왔으나, 생선 빼고 나머지는 그냥 그랬다.
음식 복은 없는 날이다.
그래도 숙소는 좋았다.
숙소는 방이 3개였는데 사람이 많지 않아 방 하나를 통째로 썼으니까.

인생에 슬픔의 골짜기를 지나면,
기쁨의 샘물로 목을 축일지어니.

아침 바다-'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산토냐에서 노하. (Camino del Norte - Santoña to Noja)'

성당-'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산토냐에서 노하. (Camino del Norte - Santoña to Noja)'

산토냐 해변-'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산토냐에서 노하. (Camino del Norte - Santoña to Noja)'

부씨에로 산 안내-'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산토냐에서 노하. (Camino del Norte - Santoña to Noja)'

민달팽이-'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산토냐에서 노하. (Camino del Norte - Santoña to Noja)'

불상-'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산토냐에서 노하. (Camino del Norte - Santoña to Noja)'

산봉우리-'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산토냐에서 노하. (Camino del Norte - Santoña to Noja)'

나무-'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산토냐에서 노하. (Camino del Norte - Santoña to Noja)'

바위-'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산토냐에서 노하. (Camino del Norte - Santoña to Noja)'

숲길-'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산토냐에서 노하. (Camino del Norte - Santoña to Noja)'

나무-'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산토냐에서 노하. (Camino del Norte - Santoña to Noja)'

나무 사이로 보이는 바다-'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산토냐에서 노하. (Camino del Norte - Santoña to Noja)'

바다-'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산토냐에서 노하. (Camino del Norte - Santoña to Noja)'

경계-'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산토냐에서 노하. (Camino del Norte - Santoña to Noja)'

교도소-'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산토냐에서 노하. (Camino del Norte - Santoña to Noja)'

묘지-'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산토냐에서 노하. (Camino del Norte - Santoña to Noja)'

Jauja 식당-'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산토냐에서 노하. (Camino del Norte - Santoña to Noja)'

바다-'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산토냐에서 노하. (Camino del Norte - Santoña to Noja)'

바다-'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산토냐에서 노하. (Camino del Norte - Santoña to Noja)'

꽃-'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산토냐에서 노하. (Camino del Norte - Santoña to Noja)'

언덕-'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산토냐에서 노하. (Camino del Norte - Santoña to Noja)'

바다-'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산토냐에서 노하. (Camino del Norte - Santoña to Noja)'

바다-'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산토냐에서 노하. (Camino del Norte - Santoña to Noja)'

소-'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산토냐에서 노하. (Camino del Norte - Santoña to Noja)'

노하 알베르게-'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산토냐에서 노하. (Camino del Norte - Santoña to Noja)'

그라피티-'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산토냐에서 노하. (Camino del Norte - Santoña to Noja)'

그라피티-'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산토냐에서 노하. (Camino del Norte - Santoña to Noja)'

호랑이 그라피티-'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산토냐에서 노하. (Camino del Norte - Santoña to Noja)'

로마 다리 옆 이름모를 천-'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산토냐에서 노하. (Camino del Norte - Santoña to Noja)'

파스타, 아로즈-'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산토냐에서 노하. (Camino del Norte - Santoña to Noja)'

소고기-'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산토냐에서 노하. (Camino del Norte - Santoña to Noja)'

생선-'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 산토냐에서 노하. (Camino del Norte - Santoña to No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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