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는 삶의 즐거움. 지적 생활의 즐거움.


길게 늘어선 읽어보고 싶은 책 목록에서 그 우선순위를 정하는 일이 쉽지 않다. 마음 같아서는 다 읽고 싶지만, 책만 읽고 사는 삶은 아니기에 더 신중하게 책을 고르곤 한다.
그러나 때로는 이렇게 전혀 계획에 없던 책을 집어 드는 것도 좋다.
계획 따라 산다면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며, 때론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행운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지적 생활의 즐거움.
이 책을 전혀 알지 못했으며, 그저 지적 생활을 풍성하게 즐기지 못하는 자로서 대리 만족을 바라며 집어 들었다.
책은 적당한 책 두께와 가벼운 무게도 그 결정에 한몫했다.
P.G.해머튼.
그가 쓰는 단어 하나 하나에 힘이 실려있으며, 적절한 비유와 인용이 책을 읽는 즐거움을 더해주었다.
영국에 사는 H.D.소로를 만난 기분이다.
이 둘은 삶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졌다는 점에서 닮았다.
비슷한 시대를 살았으며, 글도 재미있게 잘쓴다.

책에서 이 말이 제일 마음속 깊이 들어왔다.
'매일같이 열심히 공부한다고 해서 지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지적인 삶과는 거리가 먼 지식노동에 회의감을 느껴 교양으로부터 멀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지식을 활용하는 기술만 늘어나는 것입니다. 지성과 교양의 궁극적 목표인 개인의 완성과 성취감, 행복은 사라지고 오직 지식이 재물로 변환되는 물질적 성과에 급급하게 되어 지식인임에도 지성인이 되지 못하는 사람도 우리 주변에는 많습니다.'

실제로 내 삶에서 지적 생활보다는 지식노동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흥미 있는 무언가를 깊이 탐구하는 시간보다는, 지금 당장 써먹을 만한 것을 익히는데 더 많은 시간을 쓴다. 이것이 지식노동자로서 제공해야 하는 노동의 의무이긴 하지만, 깊은 탐구가 결여된 지식은 본질에 접근하기 어렵다.


지적 생활의 즐거움 - 책갈피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름에 2주일 넘게 휴가를 즐기며 1년 간의 건강을 축적해두려고 계획을 세우지만, 그보다는 한 주간의 건강유지를 위해 2시간의 산책과 운동이 훨씬 더 효과적입니다.

지적 생활은 결국 신경조직에서 행해지는 활동입니다. 신경조직이 건강하게 유지되려면 운동은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는 몸을 움직여야 됩니다. 육체를 단련하는 일련의 과정들을 우리가 참아내고 수용할 수 있다면 그 효능은 지금껏 발견된 그 어떤 진정제보다 강력하게 작용합니다.

지적 생활은 육식동물의 생태와 닮은 점이 많습니다. 맹수는 간격을 두고 사냥에 나섭니다. 눈앞에 먹잇감이 뛰어다닌다고 해서 무조건 쫓지는 않습니다. 휴식을 취해야 될 때는 먹으라고 고기를 던져줘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휴식이야말로 지친 두 다리에 생기를 불어넣고, 힘줄을 끊는 데 사용한 턱 근육을 이완시켜주며, 다시금 사냥의 목적, 즉 굶주림이라는 욕망을 발생시킨다는 것을 맹수는 알고 있습니다. 휴식을 통해 맹수는 전투력을 유지합니다.

칸트는 새벽 다섯 시에 차와 담배 한 대로 아침식사를 마친 후에 강의준비와 집필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여덟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일했습니다. 일이 끝난 오후 1시에 단골식당에 가거나, 꼭 만나야 되는 사람들과 점심을 먹었습니다. 이후로는 음식을 일절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칸트는 의식적으로 두뇌를 사용해야 하는 일들, 예를 들어 독서라든가, 사색, 집필, 고민 등은 반드시 잠들기 15분 전에 끝마쳤습니다. 그에 따르면 잠들기 전에 머리에 휴식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머리가 휴식하지 못하면 제대로 잠들지 못한다는 주장입니다. 잠을 자도 숙면이 아니라고 합니다. 비단 칸트뿐 아니라 우리도 흔히 경험하는 이야이기입니다. 오늘의 지적 생활은 어젯밤 숙면했느냐와 직결됩니다.

식이요법은 다른 게 아닙니다. 채소를 다량 섭취하고, 고기를 피하고, 물을 많이 마시는 건 아무런 소용도 없습니다. 진정한 식이요법은 생활개선입니다. 나에게 맞는 생활습관을 찾아내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감이 단언하건대 지적 생활에서 요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지적 생활에 종이와 인쇄, 펜이 차지하는 비중 그 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선의 지적 생활은 무엇을 먹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요리는 지적 생활의 기초를 이루는 일종의 과학입니다. 우리 목적에 적합한 음식을 만들고, 적당량을 섭취하는 일련의 습관은 우리가 익혀야 될 과학 중의 과학이며, 인류를 현재와 같은 형태로 만들어낸 어머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와인 애호가는 날카롭지만 쉽게 흥분합니다. 맥주 애호가는 둔중하지만 그 둔중함 속에 평화가 있습니다. 충실하고 다스리기 쉬우며, 금방 화내는 법이 없고, 폭력에 호소하지 않는 침착함이 있습니다.

담배를 지나치게 많이 피우는 사람은 쉽게 불안감을 느낍니다. 그 불안감을 담배로 진정시키는 습성이 몸에 배어버린 탓입니다. 적당한 흡연은 지력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나친 흡연은 사람의 의지를 나약하게 만듭니다. 중독입니다. 종류에 상관없이 중독은 인간의 의지를 공략합니다. 의지가 있는 자는 무엇에도 중독되는 법이 없습니다.자신의 의지에 기대지 못하는 사람들이 뭔가에 중독됩니다. 지나친 흡연자의 특성은 의지부족입니다. 그 증거로 그들은 실천하기 전에 말이 많습니다. 끝없이 이야기합니다. 노력보다는 입으로 해결하려는 태도가 역력합니다.

인간에게는 두 종류의 생활이 있습니다. 동물적 생활과 지적 생활입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이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동물적 생활과 지적 생활을 적당히 융합해 더욱 건강하게 생활하라고 한다면 이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가 됩니다. 우리는 늑대도 아니고 여우도 아닙니다. 사람입니다. 그런데 늑대와 여우처럼 환경에 적응해나가라고 하는 건 우리를 지금 이 자리로 끌어올려준 지적인 강박증에서 벗어나라는 이야기입니다. 똑똑해지는 동시에 보다 강해지라는 요구는 받아들이기 쉬운 조건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기나긴 시간의 연속입니다. 지금 손해인 듯 보이는 운동이 한평생을 두고봤을 때 크나큰 이익이 되는 것입니다. 지적 생활은 건강이 오랫동안 유지되어야만 가능합니다. 건강도 실력입니다. 건강이 뒷받침되지 않는 지적 노동은 죽음과 직결됩니다. 신체를 건강하게 유지하고자 운동이라는 희생을 지불하는 것은 최상의 투자인 것입니다.

지적 생활에서 신문의 최대 결점은 항상 색다른 것만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2200년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지난밤에 찰스 다윈이 어디를 다녀왔는지는 그리 중요한 사건이 아닙니다. 언제 발견했는가는 사건의 핵심이 아닙니다. 그 같은 진실에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더욱 중요합니다. 헌데 신문은 이를 채워주지 못합니다. 색다른 사사리을 신문이 강조할수록 사건의 올바른 관계는 잘못 전달됩니다. 랜턴은 빛의 콘트라스트로 배경을 어둠 속에 가라앉혔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곳밖에 비추지 못합니다.

신문은 문명화된 세계에서 그날그날 가족끼리 주고받는 대화와 비슷합니다. 신문이 있기에 우리는 매일 서로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고, 불길한 고독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지적 생활에는 따로 계급이 없습니다. 지적 생활에도 급이 있다는 생각은 편협입니다.

지적 생활을 꾸준히 추구하려는 정신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똑똑한 반항아일지라도 자기 세계를 구축하지 못합니다. 같은 이유에서 전 세계에서 시험성적이 제일 좋은 사람이더라도 부여되는 지적 활동에 끌려가는 자는 결국 스스로를 잃고 맙니다.

훈련을 시작하는 근본적인 동기는 소망입니다. 타고난 능력뿐 아니라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지식욕, 이를 밑천 삼아 마음껏 지적 활동에 나서보고 싶다는 강력한 소망이 젊은이를 지적 훈련으로 인도합니다. 훈련을 쌓을수록 늘어나는 지식의 총량에 즐거워하고, 그 즐거움이 비로소 자신감이 되어 나를 세상으로 인도합니다.

작가라는 직업만큼 자기훈련에 나약해지는 분류는 없을 겁니다. 문학은 매우 보편적이어서 장벽도 없고, 자격증도 필요 없습니다. 음악과 미술처럼 소질에 덧붙여 이를 개발하고 만개시키는 일련의 교육과정이 수반되지 않습니다. 문학은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예술장르입니다. 수십 년 책을 읽고 문학 언저리에서 재능을 갈고 닦은 사람이 글을 써서 책을 내고 작가가 되듯, 수십 년간 시장에서 좌판을 깔고 채소를 팔던 장사꾼이 오늘 당장 글을 써서 책을 내면 작가가 됩니다.

아서 헬프스. 그의 글에는 한마디로 부적절한 말꼬리가 없습니다. 간결한 표현, 기억에 남을 만한 개성적인 비유, 더 이상 합당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 정확한 언어구사 능력, 이 모든 것들은 그가 앞세우는 사상의 가치를 떠나 젊은 시절 어떤 지적 훈련을 경험했는지 짐작케 해주는 대목입니다.

생트 뵈브.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조사를 완벽하게 끝마쳤다는 확신이 서지 않는 한, 뵈브는 함부로 펜을 들지 않습니다. 자료를 수집하고, 그것들을 배열하고 분류해서 숨겨진 상호관계를 발견하는데 뵈브는 일가견이 있었습니다.

산해진미의 재료가 갖춰졌더라도 적당한 양을 순서에 맞게 사용하지 못한다면 죽보다도 못한 음식이 나옵니다.
지적 활동, 특히 글을 쓴다는 건 준비된 자료와 나의 생각을 하나로 융합해 새로운 무엇인가를 창출해내는 과정입니다. 작품에 통일성이 이어져야 하며, 현실과 이상은 적절한 균형을 이뤄야 합니다. 그런데 지적 훈련이 부족한 작가는 지식은 부족하고 사상은 지리멸렬합니다.

"영감과 평소의 노력은 형제다. 자연을 구성하는 수많은 대립적 존재들이 그러하듯이 영감과 인위적인 로겨 사이에는 배척도, 배반도 찾아볼 길이 없다. 공복과 소화와 수면이 그랬던 것처럼 영감은 평소 생각했던 데서 찾아온다. 나는 그것이 부끄럽지 않다. 오히려 최대한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일 해야 될 일을 고민하는 것은 훈련이다. 내일의 나를 기대하는 것은 노력이다. 그것이 영감의 원천이다." - 샤를 보들레르

지적 훈련이 중요하기는 해도 한 가지 유념해야 될 사항이 있습니다. 우리들 인간의 정신은 즐겨 수용하는 부분이 있고, 반대로 인내 없이는 수용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는 점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좋고 싫음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이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좋고 싫다는 감정은 타고난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내적인 욕망을 따라가는 데 우리는 필연적으로 거부감을 느낍니다. 정신의 거부반응입니다. 특별히 선천적으로 정신이 무능력해서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몸에 밴 일상이라는 습관, 나날의 고민들에 짓눌려 거부감을 느끼게 되었을 뿐입니다. 이런 종류의 거부반응에는 주의해야 합니다. 만약 이런 기분에 휩싸였다면 자기 반성과 충분한 검토가 필요합니다.

"자기 힘을 함부로 낭비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은 없다. 그런 행위는 정열을 방해하는 짓이다. 10년만 그렇게 살아보라 의지는 찾아볼 수가 없고, 생각하는 것마다 시금떨떨한 뒷맛이 따라다닌다. 마음속에 감추고 있던 근성도 시들어버린다. 좌절은 덤이다. 젊은이는 이를 깨닫지 못한다. 무엇인가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구실만 믿고 마음 가는대로 행동한다. 이런 경험이 쌓여 젊은이는 인생을 배우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보게 되었을 때, 정력은 쇠잔하고 열정은 사라졌으며, 행동하는 법은 까맣게 잊어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서른 살의 일개 노동자, 단순한 호사가를 자처하는 자기 모습에 실망하게 될 것이다. 이도 아니라면 부모가 물려준 재산을 탕진한 채 돌아오지 않는 청춘을 그리워하는 패배자가 될 것이다." - 임폴리트 텐

세상엔 수없이 많은 요리가 있지만, 음식을 만드는 방법만 놓고 본다면 결국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재료끼리 주고받는 맛의 뒤섞임을 알고 있을 것, 둘째는 재료에 따른 화력의 사용법이라고 합니다.

그분에게 명성을 안겨준 요리는 '갸또 드 푸아(Gateau de Foie)'라는 이름의 음식입니다. 이 메뉴는 뛰어난 풍미로 유명합니다. 맛의 중심이 되는 주재료는 닭고기입니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닭은 간(肝)'입니다. 두 번째 핵심재료는 파슬리입니다. '갸또 드 푸아'는 닭의 간에 파슬리의 풍미를 더하는 것이 기술이며, 파슬리를 생략하거나, 파슬리 대신 다른 잎채소를 쓰면 특유의 풍미가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 파슬리를 지나치게 많이 쓰면 풍미가 짙어지기는 커녕 입도 못 댈 만큼 쓴맛이 난다는 것입니다.

주의할 점은 인간은 자신과 관련이 없는 것들에 간혹 의문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의문으로 그쳐야 되는데 의문이 확신이 될 때까지 추구하다보면 정작 관심을 가져야 될 것들에 소홀해지기도 합니다.

선천적으로 자신과 맞지 않는 분야에 관심을 돌리는 것은 쓸데없는 낭비입니다. 이는 뿔을 찾으러 떠났다가 귀를 잃어버린다는 유대인 속담에 나오는 어리석은 낙타를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는 지식과의 대면에서 옛날 사람들이 겪었던 흥분을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의 지적 수준은 과거보다 확장되었을지 몰라도 지적 감수성은 과거에 비해 분명 퇴화해버렸습니다.

이 시대의 청년들이 방황하는 이유는 지나치게 많이 배워서입니다. 얕은 깊이로 너무 많은 학문을 거쳤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지적 유산은 그리 풍부하지 못합니다. 현대인이 지적 생활을 계획하면서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피할까, 고민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고뇌는 쓸데없습니다. 우리는 본능으로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 무엇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 길로 망설임 없이 떠나면 되는 것입니다.

조상들은 하나를 공부했고, 여기에 정통해질 때까지 최선을 다했습니다. 우리는 여섯 가지를 공부하고, 그중 단 한 분야에도 정통하지 못하는 실패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조상들은 배움을 실천에 옮겨 자기만의 사상을 갖추려고 노력했다면, 우리는 배우는 과정에 집착하여 '배웠다'는 과거형을 자랑삼고 있습니다.

요즘 시인들은 문학상을 받기 위해 시를 씁니다. 상을 받기 위해 만들어진 시에는 열광이 없습니다. 그런 시는 안전을 추구합니다. 안전한 시어, 안전한 시상, 안전한 시제, 안전한 묘사뿐입니다. 그 시를 읽고 수상자를 결정하는 권한을 지닌 문단의 어른들에게 잘 보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규범을 벗어나지 않는 무난한 시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해할 수 있어야 되므로 독창성은 피해야 합니다.

교사는 단지 전문기관을 수료한 졸업생일 뿐입니다. 가르치는 과목에 무지합니다. 그들에게 배운 어린 학생들이 혼란을 겪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리스어를 가르치는 교사는 그리스어뿐 아니라 그리스 문화, 역사, 철학에 정통해야 합니다.

"메모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해두세요. 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쓰는 단계가 되면 메모를 보지 마세요. 기억에 남아 있는 걸 끄집어내야 합니다. 메모는 과연 이 장면이 내 머릿속에 남을 만큼 인상적인지를 시험하는 단계에 불과해요. 당신이 메모한 것이 정말 중요한 가치가 있다면 그걸 꺼내보지 않더라도 필요할 때 기억날 테니까요. 그러니 잊어버렸다고 아쉬워해서는 안 됩니다. 기억할 가치가 없었기 때문에 잊어버린 거라고 생각하면 편해집니다. 잊어버린 게 많다는 건 그만큼 지워야 할 것들을 미리 삭제한 것이에요. 수고를 덜게 되어 다행이라고 여기십시오."

좋은 기억력이란 많은 것을 기억하는 게 아닙니다. 선택 기억이든, 합리적 기억이든 본질은 '연계'입니다. 관련이 있는 것들 사이에서 개인의 연상력이 작용하고, 머릿속에 하나의 질서가 새롭게 생성되는 창의성이 핵심입니다. 지성의 올바른 작용과 조화는 기억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기억력은 연마할수록 확장됩니다. 제대로 된 연마법을 익힌다면 누구든지 남보다 뛰어난 기억력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기억력은 그런 의미에서 일종의 지적 근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간을 절약하는 가장 유용한 방법은 뭔가를 배우거나 연구하는 등의 지적 활동에 임할 때 의지를 갖고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을 완전히 나의 것으로 만들겠다, 나라는 존재로 가득 채우겠다, 라는 강한 기개를 드러내야 합니다. 그런 날들이 차곡차곡 쌓이다보면 어느 순간 도저히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할 것 같은 장벽에 부딪히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진실한 마음으로 자기를 돌아봐야 합니다. 과연 나는 지금보다 더 성장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에 확신이 든다면 좀더 매진합니다. 성장할 수 있다는 확신은 들지 않더라도 그 무엇보다 내가 이 분야를 연구하고 공부하는 데 기쁨을 느끼고 있다면, 그래서 도저히 포기할 수 없다는 마음이 생긴다면 마찬가지로 좀더 매진합니다.
반대로 이 한계가 넘을 수 없는 장벽처럼 보일 때 깨끗이 인정하고 돌아섭니다. 어떤 지식과 기술에 익숙해질수록 시점이라는 것이 보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점이란 습득한 지식과 기술이 일상에서 자연스레 발휘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도달하기까지 많은 장벽들이 있습니다. 시간도 적잖게 필요합니다. 흥미를 갖고 배우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꽤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는 수준에 도달하기까지 인내만 있다면 누구든지 가능합니다. 그러나 습득한 지식과 기술이 나의 일생을 좌우하는 데 이르기 위해서는 시간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시간과 더불어 재능과 열의가 필요합니다. 그간 내가 쌓아올린 시간에 어느 정도로 열정과 재능을 담아냈는가가 중요합니다.

누구에게나 불완전하게 습득한 지식이 몇 가지 있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실제로는 도움이 되지 않는 지식과 기술입니다. 예를 들어 제대로 된 대화가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몇 개 나라의 외국어를 조금은 할 줄 알며, 기초가 습득되어 있지 못한 과학 지식도 알고 있습니다. 또 타인도 나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변변찮은 기술도 있습니다. 이처럼 불완전한 습득에도 적잖은 시간이 소모됩니다. 헛되이 사라진 시간들입니다. 배우려는 노력만으로도 정신은 일정 수준의 연마가 가능합니다. 따라서 이 시간들을 무조건 헛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최소한 정신의 연마는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낭비로 몰아가는 시각도 부적절합니다.
그러나 결과물, 즉 습득된 지식과 기술의 편차를 놓고 말한다면 극히 낮은 수준입니다. 이 같은 불완전한 정신노동이 현대사회에서는 꽤나 유용한 활동으로 장려되고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현재의 시간을 철저하게 절약하고 싶다면 지금 몰두하고 있는 일들을 리스트로 작성해보는 건 어떨까요. 각각의 일에 정직하게 불완전한 정도를 기입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그 일들에 어느 만큼 집중하고 있는지, 또 그 일들이 당신의 생활에서 얼마나 큰 의미를 차지하고 있는지, 앞으로 지속적인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을 때 그 일에서 기대할 수 있는 성과가 어떤 것인지 차근차근 정리해보기를 권합니다. 이렇게 하면 몇 가지 지적 활동 중에서 실현 가능한 것, 다시 말해서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분야가 보입니다. 그 분야에 집중하십시오. 나머지 활동은 비록 흥미가 있고 개인적으로 소중하더라도 내려놓습니다. 단념입니다. 단념하는 대신 귀중한 시간이 주어집니다. 단념하지 않고서는 시간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지적 활동에 앞서 이 같은 기초지식의 한계설정을 등한시하고 있습니다. 나는 꽃을 좋아하니까 당장 정원으로 뛰어나가 꽃을 심겠다는 사람은 있어도, 나는 꽃을 좋아하니까 우리 집 정원에 꽃을 심기 전에 식물학 표본 등을 공부해 우리 집 정원 토양에 적합한 꽃을 어떻게 키워야 되는지 조사해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전자의 활동은 육체노동, 혹은 치미생활이며 후자는 지식이 동반되는 지적 생활입니다.

서로 보충하는 연구를 동시에 진행하는 것도 효과적인 시간절약입니다. 풍경을 그리는 화가에게 자신이 일하고 있는 지방의 식물을 안다는 건 매우 큰 도움이 됩니다. 왜냐하면 식물에 관한 지식이 있으면 모든 종류의 식물을 가능한 한 정확하고 세밀하게 기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풍경화가가 만약에 과학을 연구하려 한다면 그림에는 전혀 무관한 화학이나 수학을 공부하는것보다는 그림을 그린다는 지적 활동에 도움을 주는 식물학을 공부하는 편이 좋습니다. 전문적으로 하고 있는 연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지적 활동은 쉽게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인내는 우리가 가진 최고의 재능이자 최선의 기능입니다. 물러서는 대신, 후회하는 대신 그 자리에 꿈쩍 않고 서서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당신에게 부족한 것이 시간인지, 재능인지, 아니면 자신을 기다리지 못하는 불신인지 헤아려보십시오. 정답은 당신 안에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인생은 짧고 시간은 화살보다 빠르므로 현재라는 시간은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건 당연한 소리입니다. 그러나 좀 더 개인의 구체적인 생활 속으로 침잠해들어간다면 일상의 내면에서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되는지, 또 무엇부터 시작해야 되는지를 결정하는 권한은 우리에게 있으며, 격언의 가르침을 듣고 깨우쳐 이를 선택하려면 우리에겐 보편적인 지혜를 말하는 격언과 달리 특별하고 개인적인 지혜가 준비되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현대인에겐 시간이 지연되는 것을 참지 못하는 나쁜 습성이 있습니다. 기다림과 미뤄짐을 무조건 손해로 여깁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지연되었기에, 미뤄졌기에 위험을 피하게 되는 상황이 종종 벌어집니다. 그런 경험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런 행운은 그저 행운일 뿐입니다. 어쩌다 보니 재수가 좋아 한 번쯤 이런 일도 있구나, 하고 넘어가버립니다. 보편적인 나타남은 일시적인 행운이 아닙니다. 실제를 갖춘 지혜입니다. 우리는 늦어짐의 지혜에 대해 생각해봐야 되는 것입니다.

책은 좋은 지적 도구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전업 작가이거나, 정말 책을 좋아해서 인생에 독서 외에는 의미 있는 활동이 없다고 굳게 믿는 사람이 아니라면 굳이 독서라는 지적 활동에 얽매여 반드시 많은 책을 읽어야 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대학교의 방식을 참고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대학교는 최고의 지식교육기관이지만 그 실상을 살펴보면 그리 많은 책을 광범위하게 읽도록 강요하지 않습니다. 전공에 특화된 소수의 책을 완벽하게 섭렵하라고 요구합니다.

지적 생활은 시간을 먹이로 삼습니다. 따라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지적 생활의 핵심입니다. 탐욕스런 인간의 본능은 시간에 대해서도 비슷한 행위를 나타내려고 노력합니다. 우리는 휴식이라는 이유로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할 때가 아주 많습니다. 그 시간들을 절약하지 않고서는 지적 생활에 필요한 기본 토대가 마련되지 않습니다.

남보다 오래 공부한다고 해서 그들보다 더 나은 성적을 받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단지 시간을 들인다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시간을 들이지 않으면 남보다 나은 성적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마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시간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약속해주지 않지만, 또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약속해줍니다.

기억의 형성에는 두 가지 조건잉 씨습니다. 첫째, 감정적 충격입니다. 선명한 감정적 충격이 뇌리와 마음에 깊게 새겨져 기억할 의사가 없음에도 저절로 기억되는 경우입니다. 두 번째는 반복입니다. 시간을 들여 반복적으로 주입시킨 기억입니다.

지적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대여섯 개의 다른 분야에 관심ㄴ을 갖고 있습니다. 이에 적잖은 시간을 소요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대여섯 개의 분야 중에 제대로 만족스런 성과를 얻게 되는 것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시간 절약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것만으로 능률은 향상됩니다. 그러나 시간을 절약한다는 것은 고무줄을 늘이는 것과는 다릅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가죽끈을 늘이는 것과 비슷합니다. 즉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시간을 절약할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이 한 시간에 어느 정도나 일할 수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어리석음에는 어리석음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걸 잊은 채 살아가는 사람과 뭔가를 찾아내 기억하며 살아가는 사람의 미래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시간의 다른 이름은 기억입니다. 젊은 날 우리는 자신의 가능성을 과대평가한 대가로 오늘은 비참해졌고 , 내일을 두렵게 만든 잘못을 저지른 바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겠지요. 희망이 없어 보이지만, 희망이 없다고 여겨지는 삶이기에 우리는 희망을 찾고 싶다는 열망을 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오늘이 기억해야 될 현명한 꿈이 아닐는지요.

환자와 건강한 사람의 차이가 뭘까요? 환자는 침대에 누워 있고, 건강한 사람은 자신의 두 발로 걸어다니고 있는 걸까요? 맞는 이야기에요. 그렇다면 환자와 건강한 사람의 차이는 '걷다'가 되겠지요. 환자는 걷지 못하고 건강한 사람은 걷고 있다, 이말인 즉 계속 걸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곧 환자라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자신의 길을 중단한 사람이 곧 환자라는 이야기입니다. 시간이 없다, 돈이 없다는 이유로 잠시라도 그 걸음을 멈추었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지금 아파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 나이팅게일

중단된 독서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습니다. 당신이 중단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전깃줄을 다시 이어붙이면 전류는 다시 통하지만, 사람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적인 상상력이 끊어진 뒤로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끊어진 자리에서 재생되는 지적 감동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찢어진 명화를 다시 붙인들 과거의 명작이 되지 안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이 부족하므로 여유가 생겼을 때 띄엄띄엄 책을 읽고 필요한 만큼의 지적 생활을 이어나가겠다는 산술적 계산으로는 당신이 기대하는 지적인 삶은 건설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돈은 지성의 토양과 같습니다. 토양이 충분하고 물을 넘치게 흘려주면 싹은 저절로 피어납니다. 그 이점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게 슬퍼질 따름입니다. 토양이 메말라 모래와 같은 곳에 씨를 뿌려봐야 싹이 틀 리 없습니다. 사상도 현실의 일부입니다. 자본이 다스리는 현실 사회에서는 돈이라는 토양을 거부하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지적 생활도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매일같이 열심히 공부한다고 해서 지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지적인 삶과는 거리가 먼 지식노동에 회의감을 느껴 교양으로부터 멀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지식을 활용하는 기술만 늘어나는 것입니다. 지성과 교양의 궁극적 목표인 개인의 완성과 성취감, 행복은 사라지고 오직 지식이 재물로 변환되는 물질적 성과에 급급하게 되어 지식인임에도 지성인이 되지 못하는 사람도 우리 주변에는 많습니다.

과거의 나는 기회의 중요성을 믿었습니다. 기회가 주어져야 노력이 가능한 것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헌데 이 나이게 될 때까지 살아보니 정말로 간절한 것은 시간과 건강입니다. 시간과 건강이 허락하는 한, 기회는 쉬지 않고 찾아옵니다. 우리를 찾아오지 않더라도 내가 찾애닐 수 있습니다.

"율법은 확실히 무거운 짐이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게나. 전쟁터에 나간 군인들에게 총과 탄약은 생명보다 값진 것이네. 아무리 무거워도 총을 버리고 전쟁터에 나가진 않을 게야. 배낭이 쓸데없이 큰 것 같아도 그 안에는 모포며, 식량이며, 물과 약품들로 가득하네. 이 또한 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것들이지. 내가 만약 군인이라면 그것들이 무거워도 함부로 버리지는 않을 걸세." - 어느 늙은 랍비 랍비

인생은 정직해져야 합니다. 누구보다도 나 자신에게 정직해져야 합니다. 현재 나는 본래의 내가 가진 능력보다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그 평가에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생활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식인들은 나는 그것을 모른다, 라고 말하기 보다는 그것은 애초부터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라고 말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인종입니다. 이런 변명으로 자신들의 신분이 유지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의 비루한 처지가 설명된다며 득의양양해합니다.

고통과 즐거움은 같은 길에 놓여 있습니다. 기쁨의 끝에 고통이 있고, 고통 끝에 기쁨이 있습니다. 당신을 괴롭히려고 운명이 시련을 주는 건 아닙니다.
확신하십시오. 진정한 생명은 당신의 슬픔으로 심어진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 열매가 당신 소유가 되지 않을지라도 당신은 충분히 행복했다는 것을.

목숨이 붙은 것들은 언젠가 떠나야 합니다. 그것이 나를 부끄럽게 합니다. 언젠가는 떠나야 할 이 삶에 나는 왜 그리도 미련을 갖고 살아가는지, 생각할수록 부끄럽습니다. 언젠가는 나를 떠나게 될 그 무엇에 왜 그리도 초조해하는지, 뒤돌아볼수록 부끄럽기만합니다. 가구 하나, 책 한 권도 나의 것이 아닙니다. 이것들도 제 나름대로 목숨을 갖춘 존재들입니다. 문짝이 썩고, 책갈피의 수명이 다해지면 나를 떠날 것입니다. 나의 그리움과 애증 따위엔 동정을 배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나는 이것들이 나의 것이라며, 내가 허락하지 않는 한 제 마음대로 나를 떠나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하며 살아왔던 것은 아닌지요. 그 편협한 애증이 나를 부끄럽게 만듭니다.

두려움은 믿음이 약해졌다는 신호입니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믿음밖에 없습니다. 인생이 두려운 까닭은 나 자신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고, 사람이 두려운 까닭은 그를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을 믿기만 한다면 인생은 두려울 이유가 없습니다. 상대방을 믿어주기만 한다면 그의 말과 행동이 나를 괴롭히지 않습니다.

건강은 두말할 것도 없이 큰 축복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남보다 오래 살고 싶다는, 즉 그들보다 빨리 죽고 싶지 않다는 미혹된 마음으로 건강한 삶을 추구한다면 머지않아 그토록 아끼고 애달프게 여기는 건강을 잃게 될 것입니다. 건강은 육체의 강건함만으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정신과 감성이 올바를 때 건강도 유지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인간을 괴롭히는 질병 중 태반이 피폐된 정신과 감성에서 싹트고 있습니다. 육체적인 건강에 유념하느라 정신과 감성을 상실한다면 가장 두려운 결과, 즉 건강한 몸으로 속절없이 사라져야 하는 참담한 운명과 맞닥뜨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으며, 무슨 이유로 인생이 고단해졌는지도 묻지 않고 살아갑니다. 왜 그런 일을 할 수 없는지 원인을 궁금해하지도 않고, 불가능한 일에 매달려 아까운 세월만 허비하고 있습니다.

"돌진하라!"
이것은 명령이었습니다. 나의 사회적 위치와 눈앞의 과제를 모두 뛰어넘는 무소불위의 권력이었습니다. 그 명령이 손가락질함는 곳엔 항상 내가 있었습니다. 내가 돌진해야 할 상대는, 넘어뜨려야 할 적은 항상 나 자신이었습니다.
나를 비굴하게 만드는 적도 나였고, 나를 허약하게 만드는 적도 나였으며, 나를 무기력하게 만든 적도 언제나 나 자신이었습니다. 인생은 나 자신과의 승부였습니다. 승자는 항상 나였고, 패자도 항상 나였습니다. 나는 인생의 모든 고비에서 승리와 패배를 동시에 맛봐야 했습니다. 그 반복적인 경험에 익숙해지면서 나는 승리를 기뻐하지 않게 되었고,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철학의 학문적 특성은 보편적 세계관의 표출입니다. 제아무리 위대한 사상가의 철학도 출발은 개인적 세계관의 수립입니다. 이 개인적인 세계관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을 때, 우리는 그의 이름을 위대한 사상가의 반열에 올려놓습니다.

철학이 권위를 덧입게 되면 그것은 더 이상 철학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상적 폭력이며, 군림이고, 구속입니다. 철학은 지극히 개인적인 자기표현입니다.

위대한 사상이 위대한 철학자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위대한 생애만이 그를 위대한 철학자로 만들어줍니다. 요즘 등장하고 있는 사상가들은 철학적인 생에보다 철학의 결실에 더 매진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철학을 멀리하는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인간은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인간은 자유를 쟁취해야만 합니다. 인간은 자유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명예와 호화로운 저터개이 당신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이 공허하고 따분하게 생각된다면 당신의 삶이 억눌려 있다는 증거입니다. 당신에게 자유가 필요하다는 증거입니다. 당신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애꿎은 사람들에게 분노하고 실망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실 당신 삶에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나이듦이 고통시러운 까닭은 어떻게 늙어야 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한 번도 늙어본 적이 없으므로 그 과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모릅니다. 그 무지가 노년의 생에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곤 합니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지혜가 무엇이냐고 한다면, 어떻게 늙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인간의 최후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지혜는 없습니다. 이 지혜는 젊었을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고 어렵습니다.
노인답게 자연스럽고 현명해진다는 것은 러렵기만 합니다. 아름다운 노년은 서쪽 하늘을 물들이는 노을입니다. 노을이 아름답기 위해서는 새벽부터 대지를 달궈야 합니다. 아름다운 노년은 결국 아름다운 청춘을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주어진 인생에 최선을 다했다는 뜻입니다.

당신이 어떤 직업을 통해 행복해지고 싶다면 다음 세 가지를 유념해야 합니다. 첫째, 그 일에 필요한 능력을 갖출 것, 둘째, 지나치게 많이 일하려고 하지 말 것, 셋째, 그 일을 사랑한다고 당신 자신을 속이지 말 것.



by


Tags : , , , , , , ,

  • 재미있게 읽으셨나요?
    광고를 클릭해주시면,
    블로그 운영에 큰 도움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