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철학과 神

서양 철학의 뿌리. 그리스 철학과 神.

궁금합니다.
‘옛날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을까?’
뭐가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려나 찾다가 눈에 띈 책이에요.
그리스 철학과 神.
서양 철학의 뿌리라 부를만한 그리스 철학과 신에 대해 다룬 책입니다.
‘궁금함을 풀어 볼까?’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 들었는데,
왠지 더 미궁으로 들어가는 기분입니다.
철학은 이런 복잡한 문제의 답을 찾는 학문이 아닐까요?
원래 고대부터 현대까지 철학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저서를 읽어볼까 했었는데,
그러다간 감을 잡기도 전에 영감님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도 이 책처럼 흐름을 다룬 책 위주로 보고,
그다음에 마음에 드는 철학자 저서를 추려서 봐야겠어요.

터키 셀축 에페스-'그리스 철학과 神'

그리스 철학과 神 - 책갈피

호메로스

신들은 모두 우주만물 내지 그의 몇몇 부분을 지배하는, 따라서 인간을 지배하는 힘의 현현들이다.
그들은 모두 불사적이다.
하나의 신성, 즉 오케아노스가 존제의 근원(게네시스)이라 불리는데, 그로부터 (하늘과 땅을 포함하여) 다른 모든 신들이 유래하며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헤시오도스

신들의 다섯 세대.

  • 시조 - 카오스
  • 두 번째 세대 - 땅, 에로스, 에레보스, 밤
  • 세 번째 세대 - 하늘, 바다, 오케아노스, 레아, 정의, 기억, 티탄족(크로노스도 그들 가운데 하나이다), 퀴클롭스들, 기간테스, 에리뉘에스, 아프로디테, 아이테르, 낮, 운명들, 분쟁과 망각(레테)
  • 네 번째 세대 - 강들, 님프들, 태양, 달, 여명, 스튁스, 레토, 헤카테, 헤스티아, 데메테르, 헤라, 하데스, 포세이돈, 제우스, 아틀라스, 프로메테우스
  • 다섯 번째 세대 - 평화, 카리테스(우아들), 페르세포네, 뮤즈들, 아폴론, 아르테미스, 아레스, 아테네, 헤파이스토스, 헤르메스, 디오니소스

제우스의 승리로 이어지는 세 가지 결정적 사건
하늘의 생식력이 땅의 충고로 크로노스에 의해 종식되고, 크로노스의 지배하에 티탄족이 다스린다.
크로노스가 레아와 땅 그리고 하늘에게 속아서 제우스와 다른 다섯 신들의 탄생을 허용하게 되는데, 그들은 땅의 충고로 올림포스로부터 티탄족에 대항한 전쟁을 벌이며 마침내 성공을 거둔다.
제우스의 최고 지배권이 모든 신들에 의해 인정되고, 티탄족이 추방되어 세계의 현 시대가 시작되는데, 이 시대에 제우스와 그에게 종속되어 있는 신들은 특별히 “좋은 것들을 주는 자들” 이다.

탈레스 (밀레토스 출신)

철학을 창조
물이 모든것의 신적인 근원이며 우주만물의 살아있는 실체다.

아낙시만드로스 (탈레스의 제자)

우주발생론적인 신을 무한하고 무규정적인(아페이론)제 1원인이라고, 즉 “그것에서 모든 하늘들과 그것들 내의 만물들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특징지었다. 이러한 실체는 “불사적이고 불멸적”이며, 따라서 “모든 것을 포함하고 모든 것을 조종하는” “신적인 힘(토 테이온)” 이다.
무규정적 이라는 것은 원인이 그 결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변화의 과정으로 부터 자유롭다는 것이다.

아낙시메네스

“근원은 무한하고 무규정적인 공기이다. 그로부터 현재와 과거 그리고 미래의 모든 사물들과 신들 그리고 신적인 것들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 밖의 모든 것들은 공기의 산물들로부터 생겨난다.”
신들은 최고의 신인 공기의 단순한 변형들일 뿐이다. - 신발생론

피타고라스

불을 우주발생론적인 신, 불사적인 생명의 근원, 우주만물의 실체로서 제안했다.
피타고라스는 신성을 하나에 귀속시켰는데, 왜냐하면 그가 보기에 하나는 다함이 없는 힘을 지니고 따라서 아낙시만드로스의 무한하고 무규정적인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이며, 또한 하나는 우주적 과정에서 뿐만 아니라 우주 만물이 발생되는 대로 정확히 발생되는 수들의 계열에서도 모든 규정과 제한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피타고라스가 어떻게 해서 하나가 수들의 계열에 대해 신적인 힘을 지닌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는지 우리는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나는 자기 자신 내에 홀수들과 짝수들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주만물에 대한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의 힘과 홀수들과 짝수들에 대한 신적인 하나의 힘 사이에서 유사성을 볼 수 있다. 이 수들은 대립자들은 공기와 불, 낮과 밤이 아페이론에서 분리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로부터 도출되며 “대립자들”이다. 더 나아가 이 대립적인 수들은 변화에 종속되어 있다. 공기가 불로 변화하는 것처럼 홀수는 짝수로 이행하거나 변형되는 것이다.
피타고라스의 하나는 하나의 단순한 수가 아니다. 그것은 질서 잡힌 우주 내의 변화하는 사물들의 다수성에 대립하여 정립된 신적인 원인의 통일성에 대한 긍정이다.

하나를 숭배했지만, 여전히 하나 옆에서 하나에 의해 둘러싸인 변화하는 여럿을 알아볼 수 있었다.

크세노파네스 (콜로폰 출신의 시인)

“신들은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에게 처음부터 모든 것을 밝혀 주지 않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은 시간을 두고 탐구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더 나은 것을 발견한다.”

하나인 신은 실체가 사라질 뿐만 아니라 그것이 야기하는 모든 것과 “일치한다는” 점을 제외하면 물리적 속성들 가운데 가장 미세한 것에 의해서조차 제약되지 않는 순수한 인과성과 순수한 통일로서 드러나는 지점에 도달했다. 이러한 속성들이 거의 사라짐으로써 최고의 신의 관념은 그 역사 속에서 갈림길에 도달했다.
하나인 신은 “신들과 인간들 가운데서 가장 위대”하며, 최고의 원인에 걸맞게 “그 마음의 생각으로 모든 것을 휘두른다.” 또한 하나인 신은 “모든 것을 보며, 모든 것을 생각하고, 모든 것을 듣는다.” 그는 최고로 활동적인 정신이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같은 곳에 머물러 있다.”
하나인 신이 “모든 점에서 똑같다.” 또는 “동일하다”(판타코텐 호모이온) “언제나 똑같다”(아에이 호모이온) 모든 것과 “결합되어 있다” 또는 “메어져 있다” (쉼퓌에 토이스 파신)

하나인 신을 확고하게 응시함으로써 변화하는 여럿은 단순한 현상들의 세계로, 즉 불생의 영원한 원인의 눈부신 광경 옆에 놓여 있는 탄생과 생성의 무상한 현상으로 희미해져갔다.

최고의 신으로부터 무가치한 모든 속성들을 제거함으로써 그 최고의 신을 찬양하고자 했다.

헤라클레이토스 (이오니아 철학자로 에페소스 출신)

변화는 오름길과 내림길이며, 우주만물은 이 길을 따라서 존재하게 된다. 왜냐하면 응축될 때 불은 습기가 되고, 이것은 함께 자리 잡아 물이 되며, 물은 응고되어 흙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그는 내림길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번에는 다시 흙이 용해되며 그로부터 물이 존재하게 되고, 이로부터 그 밖의 모든 것이 존재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거의 모든 상향적 변화를 바다로부터 나오는 증발기에 돌리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그는 오름길이라 부른다. 증발기들(아나튀미아세이스)은 땅과 바다 모두로부터 존재하게 된다. 바다로부터 온 것들은 밝고 순수하며, 땅으로 부터 온 것들은 어둡다.

사람들은 묶어주는 로고스를 그것을 듣기 전에도, 일단 듣고 나서도 이해하지 못함을 보인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이 로고스에 따라서 생기건만, 내가 각각의 것을 본성에 따라 구분하고 그것이 참으로 어떠한지를 보이면서 상술하는 그러한 말들과 일들을 그들이 경험하면서도, 그들은 경험 없는 사람들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깨어서 하는 모든 것들을 알아채지 못하는데, 이는 마치 그들이 자면서 하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것과 같다.

모든 것에 대해 동일한 이 세계는 어떤 신이나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있어 왔고 있을 것이며, 영원히 살아 있는 불로서 적절한 만큼 타고 적절한 만큼 꺼진다.

모든 것은 불의 교환물이고 불은 모든 것의 교환물이다. 마치 물건들이 금의 교환물이고 금은 물건들의 교환물이듯이.

불은 흙의 죽음을 살고, 공기는 불의 죽음을 살며, 물은 공기의 죽음을 살고, 흙은 물의 죽음을 산다.

너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다른 물이 언제나 흘러오기 때문이다.

대립하는 것은 통합하는 것이며, 가장 아름다운 하르모니아는 대립자들의 그것이다.

보이지 않는 하르모니아가 보이는 것보다 더 강하다.

선과 악은 같은 것이다.

오름길과 내림길은 하나이며 동일하다.

이성(로고스)은 공통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마치 자신만의 지혜를 지니고 있는 듯이 살아간다.

깨어 있는 자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의 세계가 있다. 반면에 잠들어 있는 자들 각각은 자기만의 세계로 돌아간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이성(로고스)과 지성을 갖추고 있다. 헤라클레이토스에 따르면, 우리는 이 신적인 로고스를 호흡을 통해 빨아들임으로써 정신을 갖추게 된다. 그리고 잠잘 때는 잊어버리지만, 깨어 있는 동안에는 다시 분별력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잠들 때는 감각의 통로가 닫혀서 우리의 정신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것과의 교류로부터 떨어지게 되는데, 마치 일종의 뿌리처럼 오로지 호흡에 의해서 자연적인 연결이 유지되지만, 그런 연결에서 떨어지게 되면 우리의 정신은 앞서 가지고 있는 기억력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깨어 있을 때에는 마치 창문을 통해서 내다보는 것처럼 다시 감각의 통로를 통해 내다보고, 둘러싸고 있는 것과 만남으로써 이성의 능력을 얻는다.” - 섹스투스 엠피리쿠스

프쉬케들은 그들이 물이 될 때 죽으며, 진흙은 물보다 훨씬 더 나쁘다.
“벌레들과 같은 방식에 따라 쾌락의 흐름들이라고 하는 습지와 진흙 속을 뒹굴고, 무익하고 어리석은 기쁨들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돼지 같은 사람들인데, 왜냐하면 돼지는 순수한 물보다 ‘진흙에서 쾌락을 취하기’ 때문이다.”

불이 완전하다면, 왜 모든 것은 완전하지 않은 것일까? 신은 순환하는 주기들에서 전진하고 판결하며 단죄하는 동시에 모든 시간적인 불완전성들을 하나의 불로 흡수한다.

파르메니데스 (엘레아 출신)

“있지 않음이 있다”고 가르치는 “탐구의 이 첫 번째 길”을 금지하며, 그것을 “있음과 있지 않음이 같은 것이자 같지 않은 것이며” “모든 것들이 따르는 길이 자기에게로 되돌아온다”고 가르치는 탐구의 두 번째 길에 대한 금지와 결합하고 있다.

파르메니데스의 하나인 존재는 연속적이다. 그것은 하나인 불이 나누어지는 것처럼 흩어지거나 나누어지지 않는다.

파르메니데스가 말하는 구체는 사유와 있음으로 가득 차 있는 구체이며, 이러한 구체의 바깥 둘레 내지 페라스는 순수하게 지적인 경계인바, 거기에 물질적이거나 물체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파르메니데스는 있음이 형상이며, 있음의 형상이 “둥근 구체와 같다”고 말했다.

“두 형태 가운데 하나는 이름 붙여져서는 안 된다.”
“동시에 빛과 보이지 않는 밤으로 가득 차있다.”

엠페도클레스 (아크라가스 출신)

“있는 것은 어느 때는 자라나 여럿에서 하나로 되고, 다른 때는 다시 분리되어 하나에서 여럿으로 된다네. 소멸될 수 있는 것들의 이중적 생겨남과 있는 것들로부터의 이중적 떠나감이 존재하네. 한쪽의 생겨남은 모든 것의 결합에 의해 산출되고 파괴되며, 다른 쪽의 생겨남은 모든 것이 분리되면서 길러지고서는 사라진다네. 자리바꿈의 이 과정은 결코 멈추지 않거늘. 어느 때에는 모든 것이 사랑에 의해 하나로 합쳐지나, 다른 때에는 다시 불화의 미움에 의해 제각각 따로 떨어지네. 하나가 여럿으로부터 생겨나는 법을 배운 한, 그리고 하나가 다시 나누어져 여럿이 나오는 한, 그런 한에서 사물들은 생겨나게 되고 그것들에게는 고정된 생명이 없노라. 그러나 이러한 자리바꿈이 결코 멈추지 않는 한, 그런 한에서는 그것들은 순환 속에서 부동의 것들로 늘 있노라.”

“불과 물과 흙과 한없이 높은 공기, 파괴적인 불화는 이들과 떨어져 있고 어느 면에서나 이들과 맞먹으며, 사랑은 이들 한가운데에 있고 길이와 폭에서 이들과 동등하다네.”

“동등하며 서로 같지만, 각기 서로 다른 권한의 주인이고, 각각에게는 자기만의 성향이 있거늘, 시간이 순환함에 따라 번갈아 힘을 떨치네.”

불화가 사랑과 다른 네 가지 위대한 신들의 완전한 분리를 초래하고 스파이로스의 완전성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 양식의 원천인 까닭에, 불화는 정당하게 악마와 동일시될 수 있는 인과적 힘이다.

아낙사고라스 (클라조메나이 출신)

모든 사물은 함께 있었고, 수[또는 양]에서도 작음에서도 무한했다. [이는] 작다는 것 역시 한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것이 함게 있으므로 그것들 중 어떤 것도 작음으로 인해 분명하게 식별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공기와 아이테르 둘 다 무한하게 있어서 그것들이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기와 아이테르가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었던 까닭은 모든 것들 속에 양에서나 크기로나 최대한으로 들어 있기 때문이다.

작은 것의 가장 작은 것도 없으며, 오히려 언제나 더 작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있음이 있지 않음일 수 없으니까. 그리고 큰 것의 더 큰 것도 언제나 있다. 그리고 큰 것의 양은 작은 것의 양과 같다. 각각의 것은 그 자체로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다.
(이러한 표현은 엘레아적인 논의들로부터 유래한다. 여기서 아낙사고라스는 있음의 연속성을 주장하고 있는데, 거기서 각각의 것(현상)은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인 크기를 지닌다.)

큰 것과 작은 것에 속하는 몫(부분)들의 수효가 같기 때문에, 그래서 각각의 모든 것 속에 모든 것이 있을 수가 있다. 모든 것들은 따로 떨어져 있을 수 없고, 오히려 모든 것들은 각각의 모든 것의 부분을 공유한다. [절대적으로] 가장 작은 것이 있을 수 없으므로 그것은 불리될 수 없으며, 또한 스스로 생겨날 수도 없을 것이고, 오히려 처음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모든 것은 함께 있다. 또 모든 것 속에는 많은 것이 들어 있으며, 분리되어 나오는 것들의 더 큰 것들과 더 작은 것들 속에는 같은 수효의 것들이 들어 있다.

아낙사고라스의 최고의 신은 무한하고 무규정적이면서도 한정된(호리스메노스) 공기이자 프쉬케, 즉 신들과 우주 그 자체를 포함하여 크고 작은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 내의 생명의 원인인 아낙시메네스의 최고의 신과 동일하다.

누스(정신)는 모든 변화의 원천이며, 모든 운동의 원인이다.

레우키포스 (엘레아에 있는 파르메니데스학파의 일원)

어떤 것도 아무렇게나 생겨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것은 이성(로고스)에 따라서, 그리고 필연(아낭케)에 의해 생겨난다.

“행복은 가축 때나 금에 거주하지 않는다. 프쉬케가 신성의 거처이다.”(FV, 55 B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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