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함이 담긴 대승경전. 실상묘법연화경(實相妙法蓮華經).

법화경은 널리 알려진 대승경전의 하나로, 다양한 비유가 특히 재미있는 경전입니다.
이 경전을 읽으며, 어떻게 이 경전이 유명세를 떨치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어요.
법화경은 너무나 중생적인 경전입니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
‘믿어라.’
‘널리 퍼뜨려라.’
이 세 가지를 주로 설하거든요.
대승불교가 출현한 시점엔, 기존 불교 승단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개혁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거에요.
불교에 등을 돌린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을 파격적인 가르침이 필요했을 겁니다.
그것이 이 법화경입니다.
이 경전을 읽다 보면 그 간절함이 절로 느껴져요.
‘우리는 모두 수행하는 보살이고, 부처님이 될 것이니 믿어주세요!’
법화경을 쓰며, 온 힘을 기울였을 한 사상가의 모습이 떠오르는군요.
불교를 널리 퍼뜨린 덕분에, 불교의 가르침을 오늘날 우리가 접하기 쉽도록 한 점은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다만 새로운 사상을 불교에 ‘편승’시켜 대승이라 이름 지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네요.
법화경에서 굳이 불제자를 성문, 독각, 보살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은,
글쓴이의 사상을 대중에게 이해시켜야 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딱히 소승이라고 부를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수행을 통해 자신을 알게 되면, 자연히 세상에 이롭도록 살게 되는데 말이에요.
‘소승. 걔들은 지들만 알아.’
자기도 모르는 이가 어떻게 남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돕겠습니까?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한 불교 사상가의 책.
법화경은 확실히 파격적이고, 흥미로운 사상을 담은 대승경전입니다.

중국 보자흑의 연꽃-'대승 경전 법화경'

법화경 속의 가르침

세 가지 고통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오는 괴로움
사물이 변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
좋아하는 것을 잃게 되는 괴로움

세 가지 탈것의 구별은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중생들이 각자 다르게 행동하기 때문에 세 가지 탈것이 마련된 것이다.

모든 존재는 환상이나 꿈과 같으며 파초의 줄기처럼 심이 없으며 메아리와 같다고 아는 사람. 또 삼계에 속하는 모든 것은 환상이나 꿈과 같아서 속박된 것도 아니며 해탈한 것도 아니라고 알고 열반도 식별하지 않는 사람. 또 모든 존재는 평등하고 공이며 서로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대상화하지 않고 어떤 실체도 보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이야 말로 위대한 지혜를 지닌 분이시며 남김없이 존재의 전체를 보는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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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의 대표 경전. 금강경과 화엄경.

중국 운남 보자흑 불상 동굴

두 불교 경전을 읽었습니다.
금강경(金剛經)은 대한불교 조계종의 소의 경전이고,
화엄경(華嚴經) 또한 잘 알려진 대승불교 경전으로 화엄종의 소의 경전이죠.
금강경은 내용이 축약적이나 좋은 가르침을 잘 담았다고 느꼈고,
화엄경은 말이 좀 길어 약간 지루했는데, 불법을 풀어서 쉽게 이해시키기 위함인 듯합니다.
그중 중생의 상태에 따라 올바른 법을 설하는 방법.
그리고 세간과 출세간에 대한 설명을 특히 재미있게 잘 보았어요.
불교가 중국을 걸쳐 우리나라로 전파될 때,
어떠한 가르침을 주로 설했는지 발자취를 보는 것도 즐겁네요.:D


금강경[금강반야바라밀경]의 흥미로운 가르침.

수보리여 구도자는 자기집착이 전혀 없이 보시 행을 해야 하니 보시하는 물건이나 보시 받는 사람에게 집착하는 마음을 없앨지니 이와 같은 보시 행이 참다운 보시이다. 이와 같은 보시 행을 하더라도 보시하여 오는 결과를 바라지 말지니 생각 두어 바란다면 시장상인과 똑같으니 사고파는 그 행위와 무엇이 다르리오?

생사열반은 본래 평등하니 멸도가 없다.
사상이 있으면 중생이요 사상이 없으면 부처이다.

사상(四相)

  • 아상(我相) - 나라는 생각
  • 인상(人相) - 너라는 생각 (상대적인 존재)
  • 중생상(衆生相) - 다른 존재로부터 상대적인 이득과 만족감을 얻고자 하는 생각
  • 수자상(壽者相) - 좀 더 오래 살려는 생각 또는 이미 일어난 일을 담아두는 생각(다음 인과를 가져 옴)

밥을 먹어 주린 창자를 달랠 줄 알면서도 법을 통해 어리석은 마음을 고칠 줄 모른다. 행과 지혜를 갖춤에는 수레의 두 바퀴와 같다. 자기도 이롭고 남도 같이 이롭게 하는 것은 새의 두 쪽 날개와 같다.

화엄경[대방광불화엄경]의 흥미로운 가르침.

젖은 나무에는 불이 잘 피지 못하는 것과 같이 불법 안에서 게으른 자 또한 그와 같습니다.
한편 불을 피울 때에도 자주자주 쉬게 되면 불길은 약해지고 이윽고 꺼져버립니다. 게으른 자도 이와 같습니다.
게으른 자가 불법을 구한다고 하는 것은 눈을 감고 빛을 보고자 하는 것과 같습니다.

탐욕 하는 중생에게는 보시를 가르치고, 바른 생활을 하지 않는 중생에게는 지계를 가르치며, 성 잘 내는 중생에게는 인욕을 가르치고, 게으른 중생에게는 정진을 가르치며, 마음이 혼란하기 쉬운 중생에게는 선정을 가르치고, 어리석은 중생에게는 지혜를 가르치며, 사랑이 없는 중생에게는 자애를 가르치고, 사람을 상해하는 중생에게는 자비를 가르치며, 마음이 괴로운 중생에게는 기쁨을 가르치고, 애욕이 강한 중생에게는 버리는 마음을 가르칩니다.

지혜가 없는 곳에서는 지혜가 날 수 없으며 세간은 항상 어두워서 지혜가 나올 수 없습니다. 빛과 빛 아닌 것이 하나가 될 수 없으니 지혜와 무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간은 스스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며, 다른 이가 이룬 것도 아니지만 이루어짐이 있으니 역시 파괴도 있는 것이고, 세간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세간이 파괴도 하거니와 세간을 분명히 통달한 이는 이 둘을 말하지 않습니다.
어떤 것을 세간이라고 하고 어떤 것을 세간이 아니라고 하지만 세간과 세간 아닌 것은 이름만 다를 뿐이며 삼세와 오온을 말하여 세간이라 하고 그가 멸한 것을 세간이 아니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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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라는 질문을 잊고 사는 사람들에게. 어린 왕자.

안토니 드 생텍쥐페리가 쓴 어린 왕자는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책이죠.
저도 이 책을 몇 번 보았습니다.
하지만 기억에 남는 건 보아 뱀과 코끼리뿐이었어요.
그것은 아마 책을 읽었던 시기가 어정쩡했던 것이 큰 이유였겠지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서야 읽었던 걸로 기억하거든요.
어린 왕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정도로 순수하지도 않았고,
세상을 제대로 겪지도 못한 어린이.
코끼리를 잡아먹은 보아 뱀 그림을 보고도,
이건 암만 봐도 중절모라고 생각하던 어린이였습니다.
그 그림을 기억한 건 누가 이런 그림을 보여주었을 때 아는 척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아! 그건 보아 뱀이잖아요.’
보아 뱀을 실제로 본 적도 없으면서,
감수성이 풍부한 어린이인척하고 싶었던 거죠.

Le Petit prince

그 후로 한참이 지나서 이 책을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어릴 땐 제가 마치 어린 왕자인 양 책을 보았으나,
이번엔 사막에 불시착한 생텍쥐페리가 더 가깝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뱀 말고 다른 등장인물들에 더 눈길이 가네요.
생택쥐베리가 사랑했던 어떤 여인은 장미란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나는 그녀의 서투른 속임수 따위에도 애정이 녹아 있단 걸 짐작 해야 했어.’
‘하지만 그녀를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알기엔 너무 어렸었지.’
그리고는 이웃 행성에 사는 이들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책에선 ‘어른’이라고 표현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엔 그들은 그저 나이만 먹었을 뿐. 어른으로 성장하진 못했습니다.
권력, 돈, 지식, 허영, 후회에 집착하거나, 아무런 방향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
어린 왕자가 세상에 나온 지 근 칠십 년이 흘렀습니다.
많은 사람이 어린 왕자를 읽었고,
그 얼간이 이웃 중의 하나를 본보기로 삼아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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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의 대표작. 오만과 편견.

제가 이 책을 처음으로 읽었던 건 이십 대 초반으로 기억합니다.
책보다 영화를 먼저 봤는데, 참 재미있게 봤었어요.
어느 날 친구네 집에 놀러 갔을 때, 책장에 꽂힌 오만과 편견 양장본을 보았죠.
“오! 나 이거 빌려줘~”
그때 빌려다 읽었는데 역시 영화보단 책이 재미있더군요.
책을 돌려주며 말했습니다.
“정말 재미있게 잘 읽었다.”
친구는 책을 받아 들며 저에게 말했어요.
“그래? 이런 통속 소설은 널리고 널렸는데.”
저는 책은 단지 재미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무협지나 판타지 같은 재미 위주의 책을 주로 읽었죠.
인문, 사회, 고전은 왠지 교과서 같아서 읽기 싫었습니다.
현대문학도 가뭄에 콩 나듯 읽었어요.
저는 친구의 말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뭐 통속적이면 어때. 보는 동안 즐거우면 되지.”
지금은 그때랑 생각이 좀 다릅니다.
책엔 작가의 이상이 잘 녹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이상을 얼마나 재미있게 풀어나가느냐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재미가 책의 기본이라는 건 변함 없어요.
펼치기조차 싫은 책이라면, 아무리 멋진 이상이 숨어 있으면 뭘 합니까?
우선은 재미가 있어야 읽죠.
아래는 저의 책 취향입니다.

재미도 없는 책 < 재미만 있는 책 < 재미도 있는 책

제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재미도 있고, 영혼을 울리게 하는 책입니다.
이런 부분이 책 속에 단 한 구절이라도 있다면, 멋진 책으로 기억에 남아요.
재미는 있지만, 알맹이가 없는 책은, 다 읽고 나면 허무합니다.
그래도 읽는 동안 삶에 즐거움을 주니, 괜찮아요.
재미도 없는 책은 읽지 않습니다.
그런 책은 읽는 속도도 더디고, 설령 끝까지 읽어도 제 삶에 도움될 게 하나도 없거든요.

베넷가의 여인들

오랜만에 오만과 편견을 다시 읽으니 예전 같지 않아요.
그땐 분명 중간은 갔는데,
이젠 그때만큼 재미도 못 느끼겠군요.
입맛이 변하듯 독서 취향도 변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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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짜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했다.

감탄이 나옵니다.
저와 전혀 다른 방향에서 진리에 접근했던 니체를 존경합니다.
제가 만약 그와 같은 방향에서 진리에 접근했다면 저는 진작 미쳐버렸을 거에요.
만일 신이 아직 살아있다면, 이 책을 뒤늦게 저의 눈에 띄게 한 신에게 고개 숙여 고마움을 표하고 싶습니다.
이 책을 머리로 이해하기는 분명 어려워요.
이십 대 초반에 만났다면 책하고 씨름을 하려고 했을 겁니다.
마치 파이의 정확한 값을 구하듯 파고들었겠죠.
그건 무리수입니다.
독일인 친구가 말하더군요.
“니체의 짜라투스트라? 그건 공부를 많이 해야 하는 책이야.”
제가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봤자 뭐가 달라질까요?
머리로는 죽을 때까지 니체의 뜻을 이해하기 어려웠을 거에요.
하지만 구도자의 측면에서 본다면, 한결 이해가 수월합니다.
니체는 진리를 탐구했고, 저 또한 진리의 길을 가니까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마치 소가 씹다 만 풀을 뱉어 놓은 모양입니다.
자신이 다 소화하지 못한 걸 토해 놓은 것이란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좀 아쉽지만, 대체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특히 적절한 성경 풍자가 큰 웃음을 주네요.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이 유명한 마태복음 4장 4절을 니체는 아래처럼 풍자합니다.
인간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좋은 새끼 양의 고기로도 산다.
자신의 배를 채우는 데 급급한 신앙인은 이 부분을 읽고 뜨끔하겠더라고요.
혹시 독일어를 공부하게 된다면, 원서로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짜라투스트라와 니체. 그리고 나의 교차점.

악마도, 지옥도 없습니다. 당신의 영혼은 당신의 육체보다 더 빨리 죽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나는 강가에 있는 난간이다. 나를 붙잡을 수 있는 사람은 나를 붙잡아라! 그러나 나는 그대들의 지팡이는 아니다.

착한 자들이 고귀한 자를 착한 자라고 부르더라도 그들은 이와 같이 부름으로써 고귀한 자를 제거하려고 하는 것이다.

고귀한 자는 새로운 것, 새로운 덕을 창조하려고 한다. 착한 자는 옛 것을 원하고 옛 것을 간직하려고 한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만조를 부끄러워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간조를 부끄러워한다.

자, 보라, 이 남자들을. 그들의 눈은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이 지상에서 여자와 자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을 전혀 알지 못한다고.

우리가 더 잘 즐길 줄 알게 될 때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거나 고통을 꾸며 내려는 생각을 가장 잘 잊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아는 것도 별로 없고 잘 배우지도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거짓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제발, 이 ‘위해서’를 잊어버려라, 그대를 창조하는 자들이여. 그대들의 덕은 그대들이 ‘위해서’, ‘목적으로’, ‘때문에’ 어떤일을 하는 일이 없도록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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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에 보는 자본주의. 맑스의 자본. 자본을 넘어선 자본.

썩은 음식이 흰 보자기에 싸여 있습니다.
굳이 들춰보지 않아도 썩었다는 걸 알지만,
보자기를 들추면 확실히 실감이 납니다.
코를 찌르는 냄새 하며,
제멋대로 문드러진 모양이 눈에 확 들어오죠.
이 책은 자본주의 위에 덮인 보자기를 들춰냅니다.
잘 지어낸 픽션도 아닌데,
저의 감정을 요동치게 하더군요.
책을 읽는 동안 답답해서 가슴을 치기도 하고,
입 밖으로 욕설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중 제가 수행이 덜 된 인간이란 걸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 남을 굶게 하는 사람.
돈을 벌기 위해 남을 기계 속 부품처럼 이용하는 사람.
자신이 꿈이 없다고, 남까지 꿈꾸지 말기를 강요하는 사람.
이런 연민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에게 몇 번이고 화가 치밀어 올랐거든요.
네 압니다. 그런 사람들이 사실은 불쌍한 사람들이란 거.
하지만 저는 아직 그 사실을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수행을 계속하다 보면 가슴속에서 연민이 우러나오는 때가 오겠죠.
뭐 어쨌거나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이 자본주의가 제 마음에 안 든다고 불평불만 해봤자 마땅한 수가 생겨나는 건 아니지요.
투덜거리는데 시간을 쓴다면, 변화를 간절히 바라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그만큼 행동할 시간이 줄어드니까 말이에요.
최선은 행동하는 것이고,
차선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Capitalism

눈길을 잡아끈 문장 - 자본을 넘어선 자본

친구들이여, 우리는 살기 위해 너희들을 무척 필요로 한다. 시간이 지나면 우리들이 이 ‘지구 어머니’ 속으로 들어가서 무언가를 자라게 할 것이다. 그러면 너희 동물들도 그것을 먹고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의 순환이며 교환이다. 그렇게 해서 모든 생명이 연결된다.
- 베어 하트, 인생과 자연을 바라보는 인디언의 지혜

사회공동체가 통째로 곤경에 빠져들지만 않는다면, 개인들은 굶어죽을 염려가 없었다. 예를 들면 카피르(Kafir) 족의 크랄 토지제도 아래서는 ‘결핍이란 있을 수 없다. 원조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그것을 받는다..’ 콰키우틀(Kwakiutl)족은 ‘일찍이 굶주리게 되는 위험에 직면한 적이 전혀 없었다.’ 마찬가지로 16세기 초엽까지 유럽의 거의 모든 사회조직에서도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조건이 인정되고 있었다.
- 폴라니, 거대한 변환

한평생 그는 주께서 그의 손에 부치신 인디언 98명을 죽였다. 그는 삶이 끝나 그의 본향에서 주의 팔에 안겨 잠들기 전에 100명을 채우길 바랐다.
- 인디언의 복음

고통을 참고 견디는 노동의 훈육이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이 일과 함께 하는 삶의 꿈, 사람들의 활동이 소유의 말뚝에 막혀 멈추고 갇히지 않는 그런 세계의 꿈. 나와 타인, 아니 나와 다른 모든 것이 대립하지 않고 공존하는 세계의 꿈, 사물과 사람이 흐름이 서로 어울리는 상생적 세계의 꿈, 아마도 그러한 꿈들이 서로 만나고 증식되며 거대한 횡단선을 타고 흐를 때 ‘과학’은 그 꿈과 현실을 연결하는 강력한 끈이 되어 줄 것이다.
- 이진경, 자본을 넘어선 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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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으로 가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화. 신약 성경.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누가복음 (4:1~13)

만약 저렇게 굶는다면, 그냥 마귀가 아니라 마왕의 시험을 받는 기분일 것 같아요.
말이 사십 일이지, 저는 일주일만 굶어도 힘이 쫙 빠지더라고요.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는 말은 탐욕에 관한 말입니다.
헛된 물질적 욕구를 멀리하라는 말씀이죠.
두 번째 시험은 선택에 관한 가르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어떤 이득을 취하기 보다는 올바른 방향을 선택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신념을 지니고 살아야 해요.
세 번째 시험은 객기와 용기를 구분하여 행동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뜨거워도 문제없다며 기름을 들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건 객기고,
뜨겁지만 불을 끄기 위해 물 양동이를 들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건 용기입니다.
이 구절이 신약성경의 핵심이 아닐까 생각하네요.
우리나라의 삼일신고에서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습니다.
여섯 가지 경계인 기쁨, 두려움, 슬픔, 노여움, 탐냄, 싫어함을 멈추고(지감 - 止感), 좋은 냄새, 나쁜 냄새, 차고 더움, 건조하고 습함을 잘 조절하며(조식 - 調息), 올바르지 못한 소리, 빛깔, 냄새, 맛, 음탕함, 접촉을 끊으라(금촉 - 禁觸).
불교에서는 그칠 줄 모르는 욕심(탐욕 - 貪欲)과 노여움(진에 - 瞋恚)과 어리석음(우치 - 愚癡)을 멀리하라고 해요.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르코 복음 (2:15~17)

예수께서 건강한 이들에게 의사가 필요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병든 이들에겐 종교처럼 의지할 곳이 필요하지만,
튼튼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겐 굳이 종교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하였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4:3~9)

우리의 마음속엔 여러 씨앗이 있습니다.
언짢은 일이 생겼을 때, 그것에 대해 계속 생각하면 언짢은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죠.
행복에 대해 자꾸 생각하면 행복 나무가 자라고,
자유로움을 떠올린다면 마음속에 자유의 숲이 자리 잡습니다.
어떤 씨앗이 자라도록 물을 주시겠습니까?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이로소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나누어 주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나누어 주더라 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는지라 이에 축복하시고 명하사 이것도 나누어 주게 하시니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으며 사람은 약 사천 명이었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흩어 보내시고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시니라
마가복음 (8:5~10)

예수 그리스도께선 이처럼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가장 훌륭한 기적일까요?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으로 사천 명을 먹인 기적인가요?
혹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기적일까요?
그도 아니면 바디메오의 눈을 뜨게 하는 기적일까요?
가장 훌륭한 기적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마음을 사랑으로 가득 채운 것입니다.
게다가 이 기적은 어떤 차별도 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마음먹고 꾸준히 수행하면 이룰 수 있나니,
이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 있을까요?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0:38~42)

사람이 살면서 이리저리 바쁘게 살 필요 없습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진정 중요한 가치를 따라간다면,
그것이 느리던 빠르던,
혹은 다른 이의 눈에 어리석게 보이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이르되 내가 욥바 시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환상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네 귀에 매어 하늘로부터 내리어 내 앞에까지 드리워지거늘
이것을 주목하여 보니 땅에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보이더라 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내가 이르되 주님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하지 아니한 것은 결코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니 또 하늘로부터 두 번째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 하더라
사도행전 (11:2~9)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편 가르기를 좋아합니다.
내 기분을 상하게 하거나,
우리를 비난한다고 해서 악이 아닙니다.
진정 삿된 것은 내가 만든 기준에 따라 남이 살아주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날이 새어 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에게 음식 먹기를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오늘까지 열나흘인즉 음식 먹기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 하고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그들도 다 안심하고 받아 먹으니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칠십육 명이더라
사도행전 (27:33~37)

이주를 굶었다면 정말 배가 고팠을 것 같아요.
아무것도 먹지 않은 단식인지, 물만 마신 금식인지는 설명이 없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굶은 다음에 된 음식을 곧바로 먹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제가 하고 있는 밥따로 물따로 식사법과 일치하는군요.
예전 사람들은 굶다가 첫 음식을 된 음식으로 먹었던 것일까요?
또 이 구절을 읽으며,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응? 스무 명은 뭐지? 버근가? 왜 256명이 아니라 276명인거야?’
같은 직종에서 오래 일하다 보면, 생각이 굳는 걸 실감합니다.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요한복음 (3:28~30)

세례요한을 보면 왠지 불교 일화 속의 산자야 벨랏티뿟따가 떠오릅니다.
세례요한은 사도 요한과 안드레의 선생님이었고,
산자야 벨랏티뿟따는 부처님의 두 상수 제자인 사리뿟다 존자와 목갈라나 존자의 스승이었죠.
이 성경 구절은 부처님의 상수 제자가 된 두 존자와 전 스승의 대화를 생각나게 합니다.
그들이 찾아갔을 때 산자야 벨랏티뿟따는 이렇게 물었어요.
“세상에 어리석은 자가 많은가? 지혜로운 자가 많은가?”
어리석은 자가 많다는 존자들의 대답에 이렇게 덧붙입니다.
“지혜로운 이들은 붓다께 갈 것이고, 어리석은 자들은 나에게 남을 것이다.”
세례요한과 닮지 않았나요?

예수님 주변 인물 중 또 눈에 띄는 인물이 한 명 있습니다.
가롯 유다.
잠시 돈에 눈이 멀어 스승을 팔아먹는 실수를 저질러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배신을 알고 유다에게 차갑게 말씀하십니다.
“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야! 내가 널 어찌 가르쳤는데! 스승을 팔아 먹냐? 이 악마 같은 놈아!ㅠㅠ)
결국 유다는 그 일이 너무 마음에 걸려서 괴로워하다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가롯 유다를 보면 고타마 부처님 시대에 말썽을 피우던 육군 비구가 생각나요.
단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위대한 스승을 이용하는 제자.
무협지였으면 그런 제자는 무공을 폐하고 내쫓겼을 거에요.
부처님이나 예수님은 엉뚱한 제자 덕에 고생을 많이 하셨지만,
물리적인 제재를 가하진 않으셨어요.

Jesus

성경속 예수님은 분명 수행자에요.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통해 많은 이들이 깨달음을 얻길 바라셨지만,
사람들은 그를 이용하기 바쁩니다.
예수께서 하신 좋은 말과,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말을 적당히 섞었습니다.
그것으로 대중을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자 종교를 만들었어요.
부처님은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이름이라도 남아있지,
예수님은 마땅히 이름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철저하게 신격화 되어야 했습니다.
그 시대에 진리를 설할 때 비유를 들기 좋은 것은 분명 구약 성경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선 우선 사랑과는 거리가 먼 야훼를 먼저 끌어안으셨어요.
신을 빼놓고 진리를 설했다면 그 시대의 대중은 이해하기 어려웠을 테니까요.
그러나 이 위대한 선생님은 그 과정에서 사람들의 어긋난 신봉으로 신의 아들이 되어버렸어요.
사람들은 깨달으려는 노력은커녕, ‘이거 좀 써먹을 수 있겠다’싶어 종교를 만들었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기반으로 하는 신앙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맹목적으로 그가 신의 자식이고 기적을 행하는 이라고 믿습니까?
혹은 자신에게 이득이 되기 때문에 신앙인 행세를 하는 건 아닙니까?
사랑으로 마음을 가득 채운 위대한 스승으로서 그를 존경 한다고요?
진정 존경한다면, 그처럼 사랑의 길을 걷는 것이 마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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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된 사람과 다를 게 없는 야훼의 판타지. 구약 성경.

시커멓고 두꺼운 성경책.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내려간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몇 번이고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죠.
구약을 펼쳐 창세기를 읽고 나면, 더는 읽고 싶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 오디오 북으로 구약을 들었습니다.
중간마다 구약 성경책을 찾아보며 읽으니 재미가 쏠쏠하더군요.
구약 성경엔 정말 놀라움이 가득했어요.
첫째로 놀란 건 지금 세상에 야훼와 같은 사람이 넘쳐 난다는 겁니다.
어떻게 신과 같은 존재가 넘쳐 나느냐고요?
인간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신이기 때문이죠.
만약 그를 인간이라고 가정한다면,
티끌만큼의 존경심도 우러나오지 않습니다.
이런 망나니가 따로 없는걸요.
자기가 가진 힘으로 다른 사람을 부리려 들고,
수틀리면 죽여버립니다.
그가 유일하게 잘하는 건 당근과 채찍을 이용해 사람을 부리는 일입니다.
‘내 말을 들으면 상을 내리리라.’
‘너 내가 시킨 대로 안 했네? 그럼 죽어라.’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가 이제 시혼과 그의 땅을 네게 넘기노니 너는 이제부터 그의 땅을 차지하여 기업으로 삼으라 하시더니 시혼이 그의 모든 백성을 거느리고 나와서 우리를 대적하여 야하스에서 싸울 때에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우리에게 넘기시매 우리가 그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모든 백성을 쳤고 그 때에 우리가 그의 모든 성읍을 점령하고 그의 각 성읍을 그 남녀와 유아와 함께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진멸하였고 다만 그 가축과 성읍에서 탈취한 것은 우리의 소유로 삼았으며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모든 땅을 우리에게 넘겨주심으로 아르논 골짜기 가장자리에 있는 아로엘과 골짜기 가운데에 있는 성읍으로부터 길르앗까지 우리가 모든 높은 성읍을 점령하지 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으나 오직 암몬 족속의 땅 얍복 강 가와 산지에 있는 성읍들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가기를 금하신 모든 곳은 네가 가까이 하지 못하였느니라
신명기 (2:31~37)

이 신명기의 구절을 읽을 땐 한 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인간은 기본적으로 양심을 가졌다고 생각해요.
그 양심의 목소리에 기울이자니 차마 못 할 짓을 정당화하기 위해 야훼를 만들어 낸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와 사상이 다르다고 아이까지 잡아 죽이고 약탈하는 걸, 야훼의 이름으로 정당화 시켰으니까요.
야훼의 이름으로 거인 족도 멸망시키고, 참 많은 사람을 죽였어요.
‘내 앞을 막는 것은 무엇이든 쓸어버리겠어!’
욕심쟁이들의 행동을 정당화해주는 수단으로 신을 만든 건 아닐까요?

마온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의 생업이 갈멜에 있고 심히 부하여 양이 삼천 마리요 염소가 천 마리이므로 그가 갈멜에서 그의 양 털을 깎고 있었으니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남자는 완고하고 행실이 악하며 그는 갈렙 족속이었더라 다윗이 나발이 자기 양 털을 깎는다 함을 광야에서 들은지라 다윗이 이에 소년 열 명을 보내며 그 소년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갈멜로 올라가 나발에게 이르러 내 이름으로 그에게 문안하고 그 부하게 사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평강하라 네 집도 평강하라 네 소유의 모든 것도 평강하라 네게 양 털 깎는 자들이 있다 함을 이제 내가 들었노라 네 목자들이 우리와 함께 있었으나 우리가 그들을 해하지 아니하였고 그들이 갈멜에 있는 동안에 그들의 것을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나니 네 소년들에게 물으면 그들이 네게 말하리라 그런즉 내 소년들이 네게 은혜를 얻게 하라 우리가 좋은 날에 왔은즉 네 손에 있는 대로 네 종들과 네 아들 다윗에게 주기를 원하노라 하더라 하라
사무엘상 (25:2~8)

이 구절은 골리앗과 싸워 이긴 다윗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큰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나발과 다윗 모두 잘한 게 없어 보이니까요.
개인이 자원을 움켜쥐고 있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씨를 뿌리면 나무가 자라 모두가 풍족할 것을,
창고 속에 씨를 왕창 넣어두고 썩히면 세상이 황폐해질 수 밖에 없으니까요.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가 각박한 것은 다수 부자들의 습관 때문이라고 봐요.
돈 벌고 먹고 자고 노는데 약간의 돈을 돌릴 뿐, 나머지는 꼭꼭 쌓아두고 있습니다.
대대손손 물려줘서 자기 식구가 굶지 않고 살길 원하기 때문이에요.
‘내가 번 건데?’
돈을 낼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돈을 벌 수 있을까요?
자본가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이 큰 배를 타고 바다를 지날 때,
난파된 배를 발견했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물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면,
그들을 건져내어 배에 태우겠습니까?
아니면 저들의 운명이라 생각하고 그냥 지나가겠습니까?
자본을 움켜쥐고 있는 것은,
물에 빠져 죽는 사람을 모른 체하고 지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다윗은 자본가인 나발에게 협박을 합니다.
‘내가 맘만 먹으면 다 죽여버릴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으니, 좋은 말로 할 때 먹을 것을 내놓으시오.’
협박은 옳지 못합니다.
하지만 자본이 한 곳으로 집중되어,
저 역시 빵 한 조각 못 먹을 상황이 되면,
다윗처럼 자본가를 찾아가 아쉬운 소리를 할 것 같군요.
자원이 잘 돈다면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겠지요.
오늘날처럼 문명이 발달한 세상에도 사람이 굶어 죽는다는 건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기돈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들었더니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웃사가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으니라
역대상 (13:9~10)

야훼가 정말 망나니라는걸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내가 만든 궤를 감히 만져?
네가 안 잡아도 내 힘으로 안 떨어지게 할 수 있거든?
지금 날 무시하냐 니가?
그리고 쳐 죽였죠.

Who Killed more people in the bible?

야훼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누가 이런 통계까지 내 두었더라고요.
오직 하나뿐인 절대자이기 때문에 그래도 된다고요?
그럼 교황은 어떤가요?
대통령은 어떻고요.
어떤 자리도 행동을 정당화할 순 없습니다.

정오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이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더라
열왕기상 (18:27~28)

야훼의 대리자가 남을 비꼬고 조롱하는 걸 보니, 정말 그가 믿는 야훼를 쏙 닮았습니다.

휴.
한숨이 나오네요.
하지만 성경을 약간 유쾌한 시각으로 보면 꽤 재미있습니다.
판타지적인 요소가 많아요.

선지자 엘리야는 강력한 화염계 마법사였습니다.
메테오 스트라이크를 쓰고, 불새와 불말을 소환하기도 했거든요.
제자 엘리사는 스승과 다른 길을 택하였습니다.
정신계 마법의 일종인 블라인드로 사람의 눈을 멀게 하더라고요.

나이 사십에 죽게 된 히스기야가 기도를 하자,
야훼는 친절하게 데스노트에 그의 이름을 적습니다.
‘히스기야. 너는 십오 년 후에 죽는다.’

구약 성경에 어떻게 성경(聖經)이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이런 상스러운 막장 드라마를 어찌 성스럽다고 할까요?
구약 성경은 추악한 것을 집대성해 놓았으므로,
우리는 이를 거울삼아 내면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내가 혹 망나니 야훼처럼 살고 있는건 아닌가?'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도록 도와줍니다.
그래서 성경이라 불리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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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틱낫한 스님의 사랑의 가르침.

두 번째 읽는 틱낫한 스님의 책입니다.
전에 읽었던 책은 ‘첫사랑은 맨 처음 사랑이 아니다.’ 인 데요.
그 책은 설법을 그대로 옮겨 적은 책이라고 한다면,
이번 책은 처음부터 글로 쓰인 느낌을 받습니다.
짜임새가 있고, 내용에 와 닿는 부분도 많았어요.
여러 스승의 깨달음에 관한 책을 읽을 때면,
이런 생각이 들곤 합니다.
어떤 사진가는 기다란 망원렌즈를 선호하고,
누구는 광각렌즈를 즐겨 쓰기도 하잖아요?
깨달음에 접근하는 방식도 이와 다름없다고 봅니다.
고수가 된 다음에는 어떤 렌즈로도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지만,
하수일땐 아무리 대단한 렌즈를 써도, 렌즈의 성능을 다 뽑아내지 못해요.
우선 자신의 취향을 고려해 렌즈를 선택하고, 그것을 익히는 것이 현명합니다.
그러다보면 뭘로 찍더라도 사진에 감동을 담는 고수가 되는거죠.
사진가의 내공을 쌓으려면 많이 찍어봐야 하듯이,
깨달음을 얻으려면 자신을 끊임없이 지켜봐야 합니다.

사랑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구절.

불경 해설자들은 행복은 몸과 마음 모두와 관계가 있는 반면, 기쁨은 근본적으로 마음에 관계된 것이라고 말하는데, 그 예로 흔히 이러한 비유를 들곤 한다.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이 시원한 물줄기를 보고 기쁨을 느낀다. 그리고 그 물을 마시면서 행복을 느낀다.

한 브라만 교도가 붓다에게 물었다.
“스승이시여, 이 세상에 죽여도 괜찮은 것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붓다가 대답했다.
“그렇다. 그것은 분노다. 분노를 죽이면 평화와 행복이 온다. 세상의 모든 현자들이 죽여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유일한 적이 바로 분노이다.”

분노는 하나의 에너지일 따름이다. 모든 에너지는 변환시킬 수 있다. 명상이란 하나의 에너지를 이용하여 다른 에너지를 변형시키는 기술을 말한다.

우리는 행복을 만들어내는 기술을 익혀야 한다. 함께 산다는 것은 기술이다. 마음 한가득 호의와 선의를 품고 있으면서 상대방을 몹시 불행하게 할 수도 있다. 호의만으로는 부족하다. 상대방을 행복하게 하는 기술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기술은 우리 삶의 기본 요소다. 말과 행동을 기술적으로 하라. 그 기술의 본질은 충만한 의식이 있다. 의식이 충만하면 기교도 좋아진다.

마음에 와 닿는 구절.

우페크샤(평정)가 없는 사랑은 소유욕을 불러일으킨다. 여름날 부는 한 줄기 바람은 참으로 상쾌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깡통 속에 넣어 영원히 자신만의 것으로 간직하려 든다면 바람은 죽어버린다. 우리가 사랑하는 존재 또한 마찬가지다. 참된 사랑은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자유를 그대로 지켜가게 해준다.

‘오늘 나는 나의 이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하루를 살았는가?’ 이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발걸음을 두세 걸음 걸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사회는 깊이 병들어 있다. 아무런 방비 없이 젊은이를 이런 사회 속에 집어넣는다면 그는 날마다 폭력과 증오, 두려움, 불안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차츰 병들어갈 것이다. 우리는 내면에 일종의 진공 상태를 느끼며 그것을 먹고, 읽고, 이야기하고, 담배를 피우고, 마시고, TV를 보고, 극장에 가는 것으로, 그리고 심지어는 과로까지 해서 채우려 든다. 이런 것들 속에서 피난처를 구하는 것은 우리를 점점 더 허기지게 하고 불만스럽게 할 뿐이다.

다섯 종류의 사람을 만났을 때.

  1. 상대의 말이 아니라 행동이 우리를 화나게 할 때.
    - 그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고 행동은 무시하라.
  2. 독사와 같은 사악함을 담아 말을 하지만 그 행동은 친절하고 도움이 될 때.
    - 그의 행동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내뱉는 말들은 무시하라.
  3. 말과 행동 모두가 불쾌감을 주는 사람의 경우.
    - 당장 눈에 띄진 않더라도 그에게 어떤 긍정적인 면이 없나 찾아보도록 하라.
  4. 말과 행동, 생각 모두가 싫은 사람의 경우.
    - 그 모두가 불쾌감을 주는 사람을 만나면 그가 고통으로 가득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 우리가 그를 사랑하지 않고 돕지 않는다면 누가 그러겠는가?
  5. 말과 행동, 생각 모두가 건전하고 유익한 사람의 경우.
    - 그처럼 맑은 호수와 같은 사람을 만나면 곁에서 시간을 보내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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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청춘을 누리는 흰머리 친구. 희랍인 조르바.

‘저 조르바처럼...’
‘나비에 따듯한 입김을 불어...’
도대체 어떤 책이길래 자꾸 인용되나?
재미있게 읽은 책 중 상당수에 조르바가 등장합니다.
궁금해서 언젠가 읽으리라 마음에 품었어요.
‘과연!’
책장을 펼쳐 들자마자 푹 빠져들었습니다.
알렉시스 아저씨는 참 재치 넘치는 사람이라,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이 아저씨와 지내면서 참 심심할 일은 없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요즘 행복에 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래전부터 꿈꿔오던 프로젝트를 실체화하며,
더욱 행복에 대해 숙고하게 되었죠.
어떤 행동이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가.
나는 내 행복을 위해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나?
행복하기 위해 시작한 이 프로젝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던 어느 날 생각했습니다.
‘이게 다 뭐야. 그냥 지금 행복하면 되는 거지. 내일의 행복을 위해 지금을 희생할 순 없어!’
조르바 아저씨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지향하는 제가 크게 공감하는 책이에요.
다만 이 책에는 한 가지 함정이 있습니다.
작가가 마음에 드는 사람 이야기를 썼다는 거죠.
마음에 드는 사람에 대해선 콩깍지가 씌어서 잘못이 잘 드러나지 않는 법이잖아요?
책을 읽는 동안 저 역시 조르바 아저씨의 재치 있는 입담에 빠져들었지만,
안타까운 부분이 눈에 자꾸 밟혔습니다.
젊었을 때 살인, 약탈, 강간 등의 경험을 통해 그게 나쁜 건 줄 알았다는 부분이에요.
‘사람을 죽여보니 이건 아니더라.’
꼭 사람을 죽여보지 않아도 그건 알 수 있잖아요?
조르바처럼 열린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 꼭 나쁜 경험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하는 행동이 무얼 기반으로 일어나는지 알아보는 건 간단해요.
탐욕을 채우기 위한 것인지, 행복을 누리려는 건지 알아보는 방법인데요.
윤리적인 문제를 떠나서 이야기 할게요.
스포츠로 사냥을 즐긴다고 예를 들어 봅니다.
단순히 기쁨을 느끼기 위해 살아있는 생명을 쏴 죽이는 놀이 말이에요.
우선 마음속에 나와 똑같은 사람을 여럿 만들어 모아 둡니다.
저기 십 미터 앞에 또 다른 내가 서 있습니다.
갑자기 씨익 웃더니 총을 꺼내 저를 쏘는 거죠.
그때.
‘굿샷! 저 친구 참 행복하겠구먼. 나도 덕분에 즐겁네.’
하고 죽을 수 있다면, 사냥은 나의 진정한 행복일 거예요.
하지만 내가 쏘는 건 즐겁고, 맞는 건 괴롭다면? 그저 욕심일 따름입니다.
저는 자유롭게 행복을 누리고 싶습니다.

산투리(Santur)

나를 웃게 만든 조르바

오른쪽 다리로 엉덩이를 받치고 있는 그의 앉은 모양은 동양인 특유의 안락한 자세였다.
(이때 마침 이 자세로 책을 읽고 있었어요.:D)

이빨도 하나 없는 늙은이라면 ‘안된다, 얘들아 깨물면 못써’ 하고 소리치긴 쉬워요.

내가 사람을 믿는다면 하나님도 악마도 믿을 거요.

동생은 약아빠진 토박이 고리대금 업자이고 위선적인 교인이며 이를테면 사회의 기둥 같은 사람인데...

우리 사내들에게 하느님이 좀더 분별력을 주셔야 해요. 아니면 수술을 시켜 버리든지. 내 말 믿어요. 그렇지 않다면 우리 사내들은 끝나는 거에요.

“조르바, 일어나서 마을로 산보나 같이 갑시다.”
“기분이 좋은 모양이군요, 하지만 비가 와요. 혼자 좀 가면 안 돼요?”

“산다는 것 자체가 말썽이오. 죽으면 말썽이 없지. 당신, 산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아시오? 허리띠를 풀고 말썽거리를 만드는 게 바로 사는 거요!”

내가 언젠가 사람에겐 모두 자기 나름의 천당이 있다고 한 적이 있을 겁니다. 아마 당신의 천당은 책이 잔뜩 쌓이고 잉크가 됫병으로 가득 놓인 방일지도 모르겠군요. 포도주, 럼, 브랜디 병이 가득한 방을 천당으로 놓인 방을 천당으로 아는 놈. 돈이 잔뜩 있는 곳을 천당으로 아는놈... 사람들은 모두 각양각색이지만, 내 천당으로 말하자면 바로 이런 곳입니다. 벽에는 예쁜 옷이 걸려 있고, 비누 냄새가 나고 푹신푹신한 침대가 있고, 옆에는 여자가 누워있는 아늑한 방 말입니다.

세상에는 미치는 방법이 일흔일곱 가지가 있다고 하더군요. 이건 일흔여덟번째의 방법인 모양이에요.

인생의 신비를 직접 경험하는 사람들에겐 시간이 없고, 시간이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몰라요.

혹시 암양을 네뎃 마리 상대하고 난 숫양 본 적 있어요? 침을 질질 흘리고 눈깔에는 눈물과 눈곱 투성입니다. 기침까지 켁켁 해대는 꼴을 보면 정말 안쓰러울 정도지요.

나는 날마다 죽음을 생각해요. 죽음을 마주하지만 두렵지는 않아요. 그러나 그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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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다운 나이의 줄리안 소렐이 겪는 파란만장 라이프. 스탕달의 적과 흑.

젊고 잘생긴데다가 머리까지 좋은 청년. 줄리안 소렐.
그는 자기가 머리가 좋다는 걸 압니다.
어떻게 하면 이 좋은 머리로 좀 잘 살아볼까 고민고민해요.
부와 권력을 가지는 것이 잘 사는 거라 생각하고 그 길을 향해 열심히 달려갑니다.
만나는 사람들을 성공을 향한 수단으로 삼고,
최대한 이용하려고 애쓰는 줄리안 소렐.
하지만 감정을 가진 인간으로 태어나서 그게 쉽지 않네요.
‘나의 성공을 위해 이 여자를 어떻게 써먹을까?’
고민하던 소렐은 바로 그 여자에게 푹 빠져 버립니다.
하지만 여전히 성공은 하고 싶군요.
...

The Red and the Black

이 책을 읽는 동안 참 씁쓸했습니다.
겨우 19살의 청년 줄리안 소렐이 부와 권력을 성공이라고 생각 할 수밖에 없었던 건 왜일까요?
어려서부터 그런 사람들에게 많이 노출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돈 좀 더 벌어볼까?’
‘남들 위에 올라서는 권력을 가질까?’
이런 생각 투성의 어른들 틈에서 자란 아이가 달리 어떤 생각을 할 수 있겠어요.
어른들이 자주 하는 이야기가 있죠.
“요즘 것들은 못 쓰겠어.”
어린아이는 맑은 물과 같아서 쉽게 물이 들 뿐입니다.
게다가 요즘엔 미디어가 발생해서 더욱 나쁜 것을 접하기가 쉽습니다.
책이나 방송을 통해 아주 쉽게 접할 수 있죠.
어른들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섹스 비디오 따위가 정말 아이들을 나쁘게 만들까요?
설령 그것이 나쁜 것이라고 해도,
‘독하게 살아라.’
이런 걸 충고랍시고 들려주는 어른이나,
세상을 각박하게 살아가도록 조언하는 책보단 못할 겁니다.
19세기 소설 적과 흑에서 일어나는 일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존재해요.
아이들이 탐욕에 찌들어 살지 않길 바란다면,
어른이 먼저 바뀌어야 합니다.

모두가 돈에 대해 생각했다. 그들은 돈을 벌어서 쌓아두길 원했다. 사람들은 부자라면 존경을 받았다. 그리고 부자가 되는 좋은 방법은 땅을 사는 거다. 모두가 돈과 땅을 가진 사람을 존경했다. 그래서 부자들은 끊임없이 땅을 사서 넓히고 정원을 만들어 그 주위에 높은 벽을 쳐 놓았다.
- 스탕달의 적과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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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읽고 싶었던 불교 경전. 대불정수능엄경(大佛頂首楞嚴經).

불교 경전은 어마어마하게 종류가 많습니다.
저처럼 기억력이 부족한 사람은 설령 오랜 시간이 걸려 경전을 모두 읽는다 해도,
처음에 읽었던 경전의 제목을 보고 가물가물 할거에요.
‘내가 이걸 읽었던가?’
그리고 세상엔 깨달음에 대한 서적이 차고 넘칠뿐더러,
책 말고도 가르침을 주는 것은 천지에 널려 있습니다.
그렇지만 삶은 한정되어 있으니, 모든 것을 접할 순 없죠.
그러니 선택을 해야 합니다.
깨달음의 가르침이 담긴 능엄경은 제가 가장 읽고 싶었던 경전이었어요.
책장을 펼치니 우선 피식 웃음이 나옵니다.
권위적인 말투와 붓다에 대한 신격화가 많이 보이기 때문이에요.
자신의 깨달음을 직접 적더라도, 전달이 쉽지 않은데,
주워들은 이야기로 경전을 만들고,
그것이 여러 번의 편집과 번역을 거쳐 제 손에 잡힌 것이니.
분명 잡소리가 많이 들어갈 수밖에요.
그중 한글로 적어 놓은 ‘대불정시다다반다라무상보인시방여래청 정해안’ 같은 부분은 저에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합니다.
마치 으후루꾸꾸루후으후루꾸꾸루후으후루꾸구 처럼 글씨의 나열로 보일 따름이에요.
하지만 능엄경엔 제 마음에 드는 내용도 많이 담겨 있습니다.
특히 매듭과 감각대상에 관한 비유와 능엄경 8권의 부록으로 들어있는 유가수련증험설이 좋았어요.

중국 운남 보자흑 - Puzhehei

마치 방 안에 등불을 켜 놓으면 그 등불이 반드시 방 안을 먼저 비추고 난 뒤에 방문을 통하여 뜰과 마당을 비추는 것과 같습니다.
- 아난다

고타마 싯타르타의 가르침

문수야! 하나의 달만이 참된 것이라면 그 중간에는 자연 ‘달 이다. 달이 아니다.’라고 할 것이 없느니라.

물의 힘은 불보다 열세이면 맺혀서 높은 산이 된다. 이면 돋아나서 풀이나 나무가 된다. 그러므로 숲과 늪이 타버리면 흙이 되고 쥐어짜면 물이 된다.

보리를 얻은 자는 잠을 깬 사람이 꿈 속의 일들을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마음에는 비록 꿈 속의 일이 분명하지만 무슨 수로 꿈 속에 물건들을 취할 수 있겠느냐?

여래의 상(常), 낙(樂), 아(我), 정(淨)과 계합하기를 바라거든 먼저 마땅히 나고 죽는 근본부터 골라 버리고, 나고 죽지 않는 맑고 원만한 성품에 의해서 이룩해야 하리니 맑음으로써 허망하게 났다 죽었다 하는 것을 돌이켜서 이를 항복받아 본래의 깨달음으로 돌아가서 본래의 명각(命覺)인 나고 죽음이 없는 성품을 얻어 인지(因地)의 마음을 삼은 다음에야 과지(果地)를 닦아 증득함을 원만하게 이루는 것이 마치 흐린 물을 맑게 할 적에 고요한 그릇에 담아서 흔들리지 않게 오래 두면 모래와 흙은 저절로 가라앉고 물만이 앞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것은 처음으로 객진번뇌(客塵煩惱)를 항복 받았다고 이름할 것이요, 앙금을 버리고 순수한 물만 남게 한 것과 같은 것은 근본무명(根本無明)을 영원히 끊었다고 이름할 수 있으니 밝은 모양이 정밀하고 순수하면 일체가 변하여 나타나도 번뇌가 되지 않아서 모두가 열반의 청정하고 오묘한 덕과 부합하나니라.

상낙아정((常樂我淨) : 열반의 공덕은 생멸의 변천이 없어 어디서든 자유자재 하고, 생사의 고통을 여의어 즐겁고, 나라는 집착 대상을 여의고, 모든 더러움을 여의어 청정한 상태.

대상을 보는 것은 밝음을 인해야 하고 어두우면 볼 수 없거니와 밝지 않더라도 스스로 발하면 모든 어두운 현상이 영원히 어둡지 않으리니 감각기관과 그 대상이 이미 소멸되면 어찌하여 밝은 깨달음이 원만하고 오묘함을 이루지 못하겠느냐?

듣는 가운데 소리가 저절로 생겼다 없어졌다 할지언정 네가 듣는데 있어서 소리가 생기고 없어짐이 너의 듣는 성품으로 하여금 있었다 없었다 하게 되는 것은 아니니라.

맺히고 풀림이 원인한 바가 같아서 성인과 범부가 두 길이 아니라네.
너는 어우러진 마음 속의 성품을 보아라. 허공과 실체 이 두 가지가 다 아니니, 혼미하여 어두우면 곧 무명이요 밝게 열리면 곧 해탈이니라.
맺힌 것을 푸는데는 차례를 지켜서, 육(六)이 풀리면 일(一)도 따라서 없어지리라. 감각기관 가운데 원만한 놈을 선택하면 흐름에 들어가서 바른 깨달음을 이루리라.

여섯 개의 매듭이 같지는 아니하나 근본 원인을 따져보면 하나의 수건으로 된 것인데 섞이게 한다는 것은 마침내 성립될 수 없나니라.

곧 너의 여섯 개의 감각기관도 역시 이와 같아서 필경에는 같은 가운데 마침내 다른 것이 생기나니라.

만약 큰 거짓말을 끊지 못한 사람은 마치 사람의 똥을 깎아 전단의 형체를 만들려는 사람과 같으니 향기를 구하고자 하여도 그렇게 될 리가 없나니라.

 

 


  

처음에 단량법에(壇場法) 들어가 공부를 시작하여 정욕과 애욕이 다 끊어지고 계율이 정결해지면 삼경(三庚) 때에 이르러 금꽃이 발생하고 봄 기운이 화창해지면서 황홀하고 아득하여 마음과 그 대상들이 모두 고요하게 되리니 이는 처음 간혜지의 징험이니라. 그 다음은 심장의 경락(心經- 심경)이 넘치고 솟아올라 입에 단 침이 생기고 다음은 음과 양이 서로 치고 받아서 배에서 우레소리 같은 것이 울려오며, 다음은 혼백이 안정되지 못해서 꿈에 놀래거나 두려움이 많아지고 다음은 지니고 있던 질병이 치료하지 않아도 저절로 나으며, 다음은 단전이 따뜻해지고 얼굴 모습이 맑고 수려해지고 다음은 깜깜한 방에 있어도 원만한 빛이 일산 같이 비치며, 다음은 꿈 속에 용기가 솟구쳐서 다른 물건이 해칠 수 없고 다음은 관문이 잠겨 굳게 봉해져서 몸 밖으로 새어나가는 정기가 저절로 끊기며 다음은 우레 소리가 한 번 울림에 뼈 마디가 모두 통하여 이어지고 다음은 습기가 저절로 사라져서 탐욕이 움직이지 않나니 이는 십신 누진통의 징험이니라.

다음은 침이 가공되어서 치즈처럼 엉기게 되고 다음은 점점 비린내 나는 것으로 입과 배를 채우는 것을 싫어하며, 다음은 참 기운이 차츰 가득차게 되어 음식 먹는 것이 줄어들고 다음은 근골이 가볍고 건장해져서 그 몸이 나는 듯이 가볍고 다음은 눈동자가 그린 듯이 선명해지고 또 번개처럼 빛나며, 다음은 백 걸음 밖에 있는 가을 털처럼 작은 것도 볼 수 있게 되고 다음은 오래전에 있던 흉터나 주름살이 저절로 없어져서 흔적이 없이 되며, 다음은 눈물 콧물이나 땀이 나오지 않고 다음은 삼시(三尸)와 구충(九蟲)이 모두 없어지며, 다음은 도태가 원만해지고 참 기운이 가득해져서 음식을 끊게 되나니 이는 십주 사다함의 징험이니라.

다음은 온 몸의 붉은 피가 다 흰 연고처럼 변하고 다음은 입과 코에 저절로 오묘한 향기가 나며, 다음은 백발이 다시 검어지거나 빠진 이가 새로 나게 되고 다음은 내부가 명랑하게 밝아져서 장부를 환하게 볼 수 있으며, 다음은 다른 사람의 병을 입으로 불어서 치료하며 수은을 입김으로 말리고 다음은 추위와 더위가 침입하지 못하고 죽고 삶이 간섭하지 못하며, 다음은 손으로 반석 위에 그리면 글자가 완전하게 새겨지고 다음은 혼백이 돌아다니지 아니하여 꿈과 잠이 없어지며, 다음은 신비한 광채가 명랑해져서 다시 낮과 밥이 없이 되고 다음은 자태는 옥수와 같고 살은 금색처럼 투명해지나니 이는 십행 아나함의 징험이니라.

다음은 속 뜻이 맑고 높아서 큰 허공과 합해지고 다음은 양정(陽精)이 체를 이루어서 신부(神府)가 견고해지며, 다음은 고요한 중에 이따금 하늘 음악 소리가 맑게 들려오고 다음은 안으로 항상 화엄국토에 노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다음은 안의 성품이 출현하고 밖의 신이 찾아와 조회하게 되고 다음은 천시(天時)와 사람의 일을 다 미리 알 수 있게 되며, 다음은 용맹스런 힘이 매우 화창하여 항상 위로 올라가게 되고 다음은 공덕과 수행이 원만하여 부처님의 도록(圖錄)을 받게 되며, 다음은 붉은 노을이 눈에 가득하고 금빛이 몸을 감싸며, 다음은 채색 구름이 둘러 싸서 형체와 정신이 모두 오묘하게 되나니 이것은 십회향 아라한의 징험이니라. 대장부의 도가 이루어지고 덕이 세워지는 일이나 그러나 이 뒤에도 다시 위로 향하여 공부해 나갈 일이 있나니라.
- 유가수련증험설(瑜伽修煉證驗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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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기 무협지. 고수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의 꿈.

만약 이 책이 아시아에서 쓰였다면 다양한 무협용어가 등장했을 법합니다.
‘아니 조 대협! 그것은 이형환위(以形換位) 가 아니오!’
이런 말이 나온다 해도 어색하지 않을 소설이에요.
작가 리처드 바크가 어떤 깨달음을 얻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보편적 진리에 대한 확신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 글을 쓰기까지 몇 번이나 해변에 나가 갈매기를 바라보았을까?
대중의 습성을 관찰하기 위해 얼마나 시간을 들였을까?
치앙이나 설리번 같은 스승에게 어떤 가르침을 받았을까?
그리고 얼마나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습니다.

하늘의 갈매기 무리

‘모여드는 갈매기의 수는 매일같이 늘어났는데
그들은 질문하러 오고, 숭배하러도 오고, 또 비웃으려고 오기도 했다.’

얼마 전 간디 자서전을 읽으며 느꼈던 실망감을, 이 구절을 통해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걷는 사람을 보면 숭배하거나, 비난하려고 드는 대중의 습성을 말이에요.
분명 그들이 가는 방향이 좋은 쪽이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직접 걸을 생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껏 누리던 편리함과는 다른 방향이니까요.
그래서 그 길을 꿈꾸지만,
지금의 편리함을 버릴 수 없는 사람은 길을 가는 사람을 숭배하는데 그칩니다.
지금 자신이 누리는 것을 단 하나도 놓고 싶은 마음은 없는 사람.
게다가 걷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하고 싶어하는 욕심이 많은 사람은,
목적지에 가까이 다가간 사람에게 질투심을 느껴 비난하기까지 합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길.
길을 걸으면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걸 알지만,
발에 흙 좀 묻고, 똥 좀 밟는다고 길 걷기를 포기합니다.
단지 길을 걷는 이의 사진을 찍어 숭배하고 부러워할 뿐.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이는 음식을 앞에 두고 먹지는 않으며,
영양의 중요성에 대해 떠들기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아주 평범한 말을 했다.
즉, 난다는 것은 갈매기들의 정당한 권리라는 것.
자유는 그 존재의 본질이라는 것.
자유를 방해하는 것은 의식이든 미신이든 또 어떤 형식의 제약이든 파기해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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틱낫한(釋 一行) 스님이 들려주는 사랑 이야기. 대승 경전 법문 모음집.

이 책을 읽으며 참 고마운 마음이 많이 들었습니다.
저와 상성이 맞지 않는 책이었거든요.
틱낫한 스님이 연애한 이야기 말고는 별 흥미로운 이야기가 없었어요.^^;
그런데 왜 고마움을 느꼈느냐면,
이번이 처음 불교 관련 서적을 읽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불교에 흥미를 붙이도록 도와준 책은 정말 제 취향이었어요.
다섯 번을 더 읽어도 질리지 않는 책이었으니까요.
같은 불교 가르침을 전하는 데도 방식이 전혀 다릅니다.
모든 사람에게 만족을 주는 건 역시 어려운 일이라고 다시 한 번 느끼네요.
틱낫한 스님이 이 책에서 하신 말씀 중 공감 가는 부분이 두 곳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정부와 대통령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에요.
그들이 우리의 사고방식과 생활양식, 이 나라의 현실을 그대로 비춰주고 있으니까요.
우리 대통령이 ‘우리 대통령’이 아니고 바로 우리임을 알 때 비로소 우리는 다시 그를 비난하거나 탓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 주장은 예전에 쇼펜하우어의 인생론 에세이를 읽을 때 공감이 가던 부분과 일치합니다.
대통령이 강이나 파헤치고 자기 배를 채우는 데 힘 쓰는 건 물론 마음에 안 들지만,
자신이 만약 대통령의 입장이라면 어떨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봅니다.
만약 저에게 돈이 아주 큰 가치를 두고 있다면, 저 역시 그 자리를 이용해 돈을 긁어모으려 애쓰겠죠.
전 지금 대통령이 당선될 수 있었던 요인은 하나라고 봅니다.
‘경제를 확실히 살리겠습니다.’
즉 ‘여러분 돈 벌게 해 드리겠습니다.’
이 사회의 사람들이 얼마나 물질적인 가치에 의미를 두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에요.
이번 총선과 연말 대선에선 단지 ‘저 정당 사람이 마음에 안 들어서’  안 뽑던가,
‘이 사람은 내 욕심을 채워줄 것 같아서.’ 뽑지 않고,
우리나라가 건강하게 일어서도록 힘쓸 사람에게 투표했으면 합니다.

머리를 쥐어짜는 일은 장애만 자꾸 만들어낼 뿐이지요. 머리를 쓰지 말고 귀를 기울이세요.

아무리 머리를 굴려봤자 머리만 아프다는 걸 느끼던 차에, 이 글을 보니 와 닿더라고요.
현대인들은 쓸 데 없는 곳에까지 머리를 굴리다보니 지칩니다.
그래서 진정 필요한 곳엔 머리를 쓰지 못하는게 아닐까요?

이 책에서 틱낫한 스님께선 대승경전을 가지고 설법을 하십니다.
적어도 여기 소개된 경전은 읽어야 틱낫한 스님과 말이 좀 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금강경, 화엄경, 법화경을 읽고 싶은 불교 경전 목록 2,3,4에 올려놓았습니다.

목마른 이에게 사람들이 그에게 강으로 가라고 알려주었다.
그는 강으로 가서 물이 많은 것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
“저 많은 물을 어떻게 다 마시란 말인가?”
그는 물 마시기를 거부하고 강둑에 앉아 죽어간다.

- 백유경(百喩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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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시화 시인의 삶 속에서 건져 올린 몇 편의 이야기. 삶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들.

저는 류시화 시인의 시를 참 좋아합니다.
그의 수필을 읽을 때면 항상 실망하게 되는데,
그것은 시만큼 감동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시를 쓰지 않았다면, 이런 아쉬움은 없었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는 훌륭한 이야기꾼이기도 해서,
그의 경험 속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냅니다.
아무런 소득이 없어도 절망하지 않고 언제나 행복에 넘쳐있던 도둑이
이슬람교 신비주의자 하산에게 큰 가르침을 내렸다는 이야기나,
죽은 뒤에도 친구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옷 속에 폭죽을 넣고 다녔다는 친구의 유언
“친구여. 내가 죽으면 입고 있는 옷 그대로 입혀서 화장해 주게.”
등의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들어있는 책이에요.

류시화 시인의 시를 읽을 때면,
‘사람은 뭔가 타고난 능력이 있긴 한가보다.’라고 생각하게 되요.
제가 가끔 시를 끄적인 시를 보면,
다람쥐가 알맹이를 빼먹은 밤껍질 처럼,
보잘것없는 껍데기의 느낌을 받습니다.
스스로 그렇게 느끼니 남에게 보일 수도 없죠.
하지만 류시화 시인의 시는,
밤나무에서 막 떨어져서 언덕을 굴러 내려가는 밤송이 같아요.
신선한 힘이 느껴지거든요.
혹 모르죠.
저도 한 이십 년 시를 쓰다 보면.
시구에 생명을 담아내는 내공이 쌓일지도 말에요.
지금의 저는 아름다운 시를 쓸 수도 없고,
소설처럼 잘 짜인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도 없기에,
투박한 수필을 써 나갈 뿐입니다.

나메오 가는길 - 라오스

류시화 시인이 들려주는 옛 이야기

“언제,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프란치스코는 아무런 말없이 눈이 쌓인 산꼭대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아마 저 산에 눈이 녹고 꽃이 필 때쯤이면.”
그 말이 끝나자 갑자기 눈이 녹고 산마다 꽃이 피었다.
-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글라라의 사랑 이야기.

“시간이 없어서 명상할 수 없다는 것은 변명이다. 명상하지 못하는 진짜 이유는 마음이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 어느 한 선사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사람이란 말인가?”
“뭐? 그럼 내가 사람이 아니고 대체 뭐란 말인가?”
“부처지. 하하.”
- 일본 메이지시대 진언종 운쇼와 황실대학의 철학교사 탄잔의 대화

공감하는 류시화 시인의 한마디

명상을 잃어 버린 종교는 맹목적이 되며 종교 없는 명상 또한 무목적인 것이 되리라.

류시화 시인의 시 한 편 - 길 위에서의 생각

집이 있는 자는 빈 들녘의 바람을 그리워한다.
나 집을 떠나 길 위에 서서 생각하니
삶에서 잃은 것도 없고 얻은 것도 없다.
모든 것들이 빈 들녘의 바람처럼
세월을 몰고 다만 멀어져갔다.
어떤 자는 울면서 웃을 날을 그리워 하고
웃는 자는 또 웃음 끝에 다가올 울음을 두려워 한다.
나 길가에 피어난 꽃에게 묻는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았으며
또 무엇을 위해 살지 않았는가를
살아 있는 자는 죽을 것을 염려하고
죽어가는 자는 더 살지 못했음을 아쉬워한다.
자유가 없는 자는 자유를 그리워하고
어떤 나그네는 자유에 지쳐 길에서 쓰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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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잡이로 근근히 살아가는 키노 가족 이야기.

판잣집에서 옥수수빵으로 허기를 달래는 키노 식구는,
가난하지만 단순함 속에서 행복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진주잡이를 갔다가 엄청나게 커다란 진주를 발견하게 되죠.
‘오. 이건 엄청난 진주야. 이걸 팔면...!’
키노는 그때부터 꿈을 꾸게 돼요.
우선 아내에게 속삭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근사한 결혼식을 올리자.”
그리고 가지고 싶은 물건을 생각해 보는군요.
“우리 옷도 좀 사자.”
“난 사냥 총도 한 자루 장만하고 싶어.”
요람에서 세상 모르게 자는 아기를 보며 다짐을 합니다.
‘내 자식은 학교에 갈 거야.’
“우리 자식은 책을 펼치고 그것을 읽을 수 있게 될 거야!”
헌데 꿈을 꾸는 건 키노만이 아니군요.
소식을 전해 들은 이웃들도 꿈을 꾸기 시작합니다.
‘교회가 낡았는데, 키노는 분명 지붕 수리비를 내 줄 거야.’
마을 성당의 신부가 꿈을 꾸고,
‘그 녀석의 아들에게 적당한 약을 처방하고 한 몫 챙겨야지!’
탐욕스러운 의사도 꿈을 꾸며,
‘전에 벼락부자가 된 아무개씨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베풀었지.’
길거리의 거지들도 꿈을 꿉니다.
아름다운 진주는 모든 이의 꿈이 되어버렸죠.
키노는 알고 있었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계획한 이에겐 나쁜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을.
그렇지만 한번 세운 계획을 포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진주.
그저 반짝이는 돌멩이 하나가 사람을 얼마나 미치게 할 수 있는지 잘 보여주네요.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작가 존 스타인백(John Steinbeck)이 궁금해 찾아보니 노벨 문학상 수상자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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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의 오두막 생활을 담은 한 권의 편지.

게으름과 사치는 버려야 할 악덕이고, 부지런함과 검소함은 익혀야 할 미덕이다.

법정 스님께선 게으름과 사치를 묶어서 말씀하시고,
부지런함과 검소함을 묶으셨지만,
저는 관점이 좀 다릅니다.
멈추어야 할 땐 게으르고, 행동할 땐 부지런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올바른 방향으로 한걸음 내딛는 것을, 무턱대고 열 걸음 내 딛는 것보다 선호합니다.

중생은 부처를 제도하고 부처는 다시 중생을 제도한다는 말이 있다. 모든 부처와 보살은 오로지 중생이 있기 때문에 불도를 성취한다. 따라서 중생이 없다면 부처와 보살은 할 일이 없어져 끝내 불도를 이룰 수 없다.

불교에 깊은 관심이 있지만, 항상 마음에 걸리던 부분을 법정 스님께서 이 책에 적어주셨습니다.
중생과 보살, 그리고 부처로 나뉘는 것이 영 불편해요.
효율적인 측면에선 이렇게 각자 전문분야를 맡아 사는 것이 좋겠죠.
중생은 구도자의 배를 채워주고, 가르침을 받습니다.
스님은 중생의 정신을 채워주고, 밥을 받습니다.
분명 괜찮은 품앗이 방식이지만, 저는 왠지 이 방식에 거리를 느껴요.

예전에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월든을 읽으며 생각했습니다.
‘아. 나도 언젠가 이렇게 모든 것을 놓는 삶을 살아보리라.’
전기도 수도도 없이 자연과 벗 삼아 사는 단순한 삶.
법정 스님의 오두막 생활기를 읽으니 그런 생각이 더욱 강렬하게 다가오는군요.
봇짐 하나 매고 떠도는 생활을 시작한 이래로 짐이 많이 줄었지만,
아직도 저에겐 필요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컴퓨터만 해도 그래요.
오랫동안 옆에 두고 편리하게 쓰는 게 익숙해져서 그런지.
제 생활에 필수품이라고 느껴집니다.
하지만 컴퓨터가 없다면?
없는 대로 살아가겠죠.
한 곳에 눌러살 작정을 하면 짐이 점점 많아집니다.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하며, 심지어 그것까지 필요해집니다.
이사라도 한번 하려면 난리가 나요.
버리기엔 아깝고, 들고 갈 수 없는 물건들에 아쉬움이 남죠.
우리가 삶에서 죽음으로 이사를 할 땐,
챙겨갈 수 있는 물건이 없습니다.
외적인 요소로 인생을 가득 채웠다면,
모두 버리고 가는 게 아쉬울 수밖에 없어요.

나메오 가는길 - 라오스

마음에 드는 인용구 - 법정스님의 오두막 편지

입 안에 말이 적고, 마음에 일이 적고, 뱃속에 밥이 적어야 한다. 이 세가지 적은 것이 있으면 신선도 될 수 있다.
- 옛 사람

사막을 건너려는 강물에게.
“네 자신을 증발시켜 바람에 네 몸을 맡겨라. 바람은 사막 저편에서 너를 비로 뿌려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는 다시 강물이 되어 바다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 수피즘의 우화

노승은 일찍이 행각하면서 죽 먹고 밥 먹는 두 때만 잡된 마음에 팔렸을 뿐 별달리 마음을 쓸 곳이 없었다. 만약 이와 같지 못하다면 출가란 매우 먼 일이 될 것이다.
- 조주

훌륭한 나그네는 어디로 갈 것인지도 모르고 또 어디서 왔는지도 모른다. 심지어 자신의 성이나 이름도 모른다는 것이다. 도를 구하는 사람은 정적 속에 살면서도 고독을 느끼는 일이 없고, 시끄러운 장바닥에 있으면서도 소란스러움을 모른다. 그는 또 말하기를 ‘나는 도를 깨달은 사람이 아니라 도를 사랑하는 사람이다.’라고 한다.
- 도융(屠隆)의 여행기 명료자유(冥寥子遊)

정치가란 시냇물이 없어도 다리를 놓겠다고 허풍을 떠는 자들이다.
- 니키타 세르게예비치 흐루시초프 (Nikita Sergeevich Khrushchyov)

구름은 희고
산은 푸르며
시냇물은 흐르고
바위는 서 있다.
꽃은 새소리에 피어나고
골짜기는 나무꾼의 노래에 메아리친다.
온갖 자연은 이렇듯 스스로 고요한데
사람의 마음만 공연히 소란스럽구나.
- 소창청기(小窓淸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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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시민의 불복종과 몇 편의 수필 모음.

저는 그의 글이 참 좋습니다.
솔직하고 유머가 풍부해요.
그가 추구하는 삶을 적은 몇 편의 글은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죠.
<월든>과 이번에 읽은 <시민의 불복종>은 그의 대표작입니다.
그러나 모든 책이 널리 알려진 건 아니에요.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의 일주일>이란 책은 초판 1천부 중 삼백 권도 안 팔렸다고 하네요. 팔리지 않은 책을 집으로 가지고 온 그는 저널에 다음과 같이 썼다고 합니다.
‘나는 900권이 조금 못 되는 장서를 가지고 있는데 그중 700권 이상의 책은 내가 직접 저술한 것이다.’
피식 웃음이 나옵니다.
제가 그 시대에 살았더라면 분명 한 권 사 보았을 텐데 아쉽네요.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글에는 생동감이 있습니다.
머리로 생각한 것을 손으로 적어내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경험한 것을 가슴으로 뿜어내기 때문이죠.
<시민의 불복종>과 <야생 사과> <돼지 잡아들이기>등의 수필을 엮은 이 책 또한 에너지가 넘칩니다.
이 좋은글을 우리글로 옮겨주신 강승영 번역가님. 고맙습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와의 교감

옳고 그름을 실질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다수가 아니라 양심인 그런 정부는 있을 수 없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기계로서, 자신의 육신을 바쳐 국가를 섬기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이 판단력이나 도덕 감각을 자율적으로 사용하는 일은 전혀 없으며 오히려 그들 스스로가 자신을 나무나 흙이나 돌과 같은 위치에 놓아버린다.

내가 만약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으로부터 부당하게 널빤지를 빼앗았다면 나는 비록 나 자신이 물에 빠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 널빤지를 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덕을 찬양하는 사람이 999명이라면 진짜 덕인은 한 사람뿐이다.

투표는 모두 일종의 도박이다. 장기나 주사위놀이와 같다. 단지 약간의 도덕적 색채를 띠었을 뿐이다. 도덕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옳으냐 그르냐 노름을 하는 것이다.

왜 정부는 항상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며, 코페르니쿠스와 루터를 파문하고, 조지 워싱턴과 프랭클린을 ‘반역자’라 부르는가?

부자는 언제나 그를 부자로 만들어준 기관에게 영합하게 마련이다. 단언하는 바이지만,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덕은 적다. 왜냐하면 돈이 사람과 그의 목적물 사이에 끼여들어 그를 위해 그것을 획득해 주기 때문이다.

돈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유일한 새로운 문제는, 그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어려우면서도 부질없는 문제 뿐이다. 이리하여 부자의 도덕적 기반이 발밑부터 송두리째 흔들리게 된다. 이른바 ‘수단’이란 것이 늘어갈수록 삶의 기회들은 줄어든다.

학교 교사는 목사의 생활비를 위해 세금을 내야 하는데, 왜 목사는 학교 교사를 위해 세금을 내지 않는지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름다운 처녀를 보면 나는 그녀의 장밋빛 볼에 관심을 갖지, 그녀가 주로 무슨 음식을 먹는가를 알아내려고 하지는 않는다.

자연을 거부하지 말라. 인간은 겨우 몇 가지 자연식품이 건강에 좋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뿐이다. 그러나 자연 전체가 우리 몸에 좋다는 것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 ‘자연’은 건강의 또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으며, 각 계절은 건강의 각기 다른 상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농부들이 접붙이기 위해 고르는 사과들은 그들이 지닌 어떤 발랄한 맛 때문이 아니라 대개는 맛이 순하다거나 크고 열매를 많이 맺는 특성 때문에 선택이 되며, 과일의 아름다움보다는 매끈하고 흠이 없는 점 때문에 선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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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으로 추대 받는 위대한 영혼. 간디의 자서전.

문인 타고르가 마하트마(위대한 영혼)라고 불렀던 정치인 간디.
이백 쪽 내외의 책을 주로 즐겨 보는 저에게 이 자서전은 부담스럽게 두껍습니다.
지루한 부분도 없진 않았지만, 대체로 재미있게 읽었어요.
이 책을 보면서 어떤 희망을 품어 보기도 했고, 좌절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고타마 싯타르타나 예수 그리스도 같은 삶을 산다면 이상적이겠지만,
지금의 현실로는 그게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간디라면?’
이 자서전은 모든 사람이 간디 정도의 삶을 살 수는 있겠다는 희망에 차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본받을 이가 나타나면,
좋은 점을 본받기보다는 ‘성인’이라는 부류로 분류해서 치워버리는군요.
‘저 인간은 사람이 아니야.’ 라면서 말이죠.
저는 간디가 ‘성인’으로 불리는 사실에 깊은 좌절감을 느낍니다.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구도자 간디.
이 한 사람이 쓴 자서전은 저의 관심분야에 대해 숙고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간디 동상

인상 깊은 글귀 - 간디 자서전

배움

간디에 의하면, 개인의 다양한 능력을 발달시키고 그의 인격을 도야하며 그를 사회의 건전한 성원이 되도록 훈련하는 일반교육은 다만 지성과 정서에 관한 교육이 아니고 전인간-몸과 마음과 혼-의 교육인, 몸과 마음과 정신을 다같이 가장 잘 발전시키는 교육은 지능의 사용에 국한되는 읽고 쓰기의 매개 수단을 통해서는 행해질 수 없고, 손과 머리와 마음을 동시에 사용케 하는 모종의 유용한 공작을 과학적으로 가르침으로써 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참된 우의란 혼과 혼의 하나됨인데 세상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것이다. 오직 같은 성격 사이에서만 우정은 가치있는 것이 될 수 있고 또 오래 갈 수 있다.

말을 믿을 수 없는 데 증명서를 가지고 있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우리의 생활 양식이 다른 것, 우리의 검소한 버릇, 근소한 소득으로 만족하는 우리의 성질, 건강과 위생의 원리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 주변을 꺠끗하고 산뜻하게 하기를 게을리하는 버릇, 우리의 인색한 성질로 집수리를 할 줄 모르는 것, 이 모든 것에다가 종교가 서로 다른 것까지 한데 합하여져서 인도인에 대한 적개심의 불길에 부채질을 해주었다.

오늘날까지 금화로 물건을 헤아리던 사람이 갑자기 잔돈에 지나지 않는 동전으로 계산할 수가 있을까? 마치 코끼리가 개미의 척도를 가지고 생각을 하려 한다면, 세상 없는 정성을 가지고 한다 해도 어떻게 할 길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국 사람이 인도인의 방식으로 생각하거나 법을 만드는 것은 도저히 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과 그가 하는 행위는 서로 별개의 것이다. 선한 행실은 칭찬을 받아야 하고 악한 행실은 비난을 받아야 하는 것이지만, 그 행실을 한 사람은 선하건 악하건, 언제나 그 경위대로 존경을 받든지 그렇지 않으면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제가 충분히 증험해 보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이 믿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진리를 흐리게 하는 일이다.

사람을 쉽게 믿는 것은 내가 실제로 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사업을 해 보자는 야심이 있어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 야심은 나 자신에보다도 내 동료들에게 걱정을 끼치는 일이 더 많았다.

우리는 이 썩어질 몸을 장식하고, 덧없이 지나 버리는 이 몇 분을 더 살기 위해 수많은 남의 생명을 희생 시키는걸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감각의 쾌락을 누리려는 동안에 우리는 결국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능력까지 잃어버리고 만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우리 눈앞에 스치고 지나가건만 소경보다도 더 그것을 보지 않으려 하고 있다.

선생은 제자에게서 몇 마일을 떨어져 있으면서도 그의 생활을 통해 그들의 정신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내가 만일 거짓말쟁이라면, 아이들더러 참되게 말하라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겁쟁이 선생은 결코 자기 제자를 용감하게 만들 수가 없고, 자제가 뭔지 모르는 사람은 결코 자기 제자에게 자제의 귀함을 가르칠 수 없을 것이다.

대중의 태도에는 아주 두드러진 두가지 차이가 있다는 것. 즉 흥분되는 일은 굉장히 좋아하고, 조용하고 건설적인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차이는 지금도 다름이 없다.

진리의 영을 얼굴와 얼굴을 맞대고 보려면 가장 하잘것 없는 미물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은 다음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향해 애타게 올라가는 사람은 생활의 어떠한 면도 등한히 할 수는 없다. 그것이, 나의 진리에 대한 헌신이 나를 정치로 끌고 들어간 이유다. 그러므로 나는 털끝 만큼도 주저함 없이, 그러면서도 겸소한 마음으로 말할 수 있다. 종교는 정치와는 상관이 없다는 사람들은 종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함을.

교활한 정욕을 정복하기란 내가 보기에는, 무력을 가지고 세계를 정복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인도에 돌아온 후도 언제나 내 속에 보이지 않게 정욕이 잠재해 있는 것을 경험하곤 한다.

단식 예찬

일반적으로 성욕을 억제하는 것은 단식을 아니하고는 불가능 하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그이와 얼굴을 맞대고 보기를 원하는 구도자에게는 양으로나 질로나 음식을 절제하는 것이 생각과 말을 절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절대로 필요하다.

과일식을 시작했지만 절제의 견지에서 볼 때는 과일식이나 곡물식이나 별 차이가 없었다. 내가 보면, 맛에 빠지기는 과일식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며, 버릇이 되면 과일식이 도리어 더 심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명일에 단식을 하거나 일식을 하는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참회나 혹은 그와 같은 것을 할 경우가 생기면 나는 그것을 기꺼이 단식의 목적에 이용했다.
그러나 또 몸을 힘써 바짝 말리면 말릴수록 음식은 더 맛이 있고, 식욕은 점점 더 왕성해 진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됐다. 단식은 절제의 무기가 될 수도 있지만 또 탐닉의 강력한 무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사람은 맛을 즐기기 위해 먹어서는 안되고 오직 몸을 지탱하기 위해서 먹어야 한다. 각 감각기관이 몸을 섬기고, 몸을 통해 혼을 섬길 때 그 특유의 맛은 없어지고 만다. 그리고 그때 가서야 자연히 의도하는 길대로 작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공공 사업

나는 첫 출발에서부터 공공사업은 빛을 지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른일은 다 그렇지 않을는지 몰라도 금전에 관해서만은 누구든 약속을 그대로 믿어서는 안된다. 나는 이때까지 자기 입으로 내겠다고 한 회비를 곧 내는 사람을 본 일이 없는데, 나탈 인도인들도 그 법칙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영구기금이란 그 속에 그 기관의 도덕적 타락의 씨가 들어 있다. 공공기관이라는 것은 그 뜻이 공중의 찬동과 공중에게서 나오는 기금으로 운영된다는 데 있다.
그런 기관이 공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게 될 때 기관 존립의 권리를 이미 버리는 것이다. 영구기금에 의해 유지되는 기관은 흔히 공중의 의견을 무시하는 일이 있고, 공중에 반대되는 처사를 하는 책임이 그것에 있는 수가 아주 많다.

봉사란 버섯처럼 돋아나는 것은 아니다. 첫째로 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하고, 다음은 경험이다.

우리나라는 너무 혹독한 가난과 기근 속에 빠져 있기 때문에 해마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을 거지로 만들어 버리므로 먹을 것을 얻기 위해 필사적인 경쟁을 하는 그들은 체면도 자존심도 돌아볼 줄을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자선가들은 그들에게 일거리를 주어 제 손으로 밥을 벌어 먹도록 하게 할 생각은 않고 동냥만 주고 있다.

옛날 인도 사상에서 나눈 인생의 네가지 목적
1. 재산 (Artha)
2. 사랑 (Kama)
3. 의무 또는 법 (Dharma)
4. 모크샤 (Moksha) - 세속과 정욕의 모든 구속과 유혹을 벗어 버리고 완전한 정신적 자유에 이른 경지.

인용구

감각의 대상을 골똘이 생각하면 집착이 생긴다.
집착에서 욕망이 일어나고 욕망은 불타올라 맹렬한 정욕이 되고 정욕은 무분별을 낳는다.
- 바가바드 기타(Bhagavad Gita)

당신도 알듯이 내 번역은 언제나 직역이 아니지요. 그 정신을 그려내면 그만이오.
나는 당신처럼 말쑥한 물건이 아니오. 최소한의 먹을 것, 최소한의 입을 것이면 되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내 책에서 나오는 얼마 안되는 돈과 친구들이 주는거면 넉넉해요.
- 나라얀 헴찬드라(Narayan Hemchandra)

우리가 사업을 경영하는 것은 박애심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익을 위해서 하지요. 우리는 주주들을 만족시켜야 합니다. 물가는 수요의 지배를 받습니다. 벵골 사람들은 자기네의 운동이 스와데시 천의 수요를 자극시켜서 필연적으로 그 값을 오르게 한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었습니다. 그들은 믿었습니다. 아주 완전히 믿었지요. 그래서 공장주들이 그렇게 까지 완전히 이기적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기네의 조국이 이렇게 어려운 때에 거기에 대해 배신행위를 하고 심지어는 외국 천을 스와데시 천이라고 속여서 팔 만큼 비애국적일 줄은 몰랐던 것입니다.
- 공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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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경고 메시지를 전하는 존 윈담의 단편 소설. 거미줄.

트리피드의 날(The Day of the Triffids)을 쓴 영국의 SF 작가 존 윈담.
그가 죽은 지 십 년 후에 출간된 단편 소설입니다.
그의 다른 글은 읽어본 적이 없지만,
짤막한 이 소설은 그가 내공이 쌓인 작가라는 걸 여실히 보여 주는군요.

Web

“ 태초부터 인간의 삶의 일부였던 악과 어리석음, 그로부터 해방된 공동체!”
“이 신선한 공동체는 지성과 이성을 기반으로 운영될 것입니다!”

주인공은 그 공동체의 초기 회원으로써, 공동체의 기반을 새우러 모험을 떠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연의 경고 메시지를 전해 듣게 돼요.
소설답게 재미난 건 물론이고, 사유거리를 던져줍니다.
언제부터 자연이 인간의 전유물이었나?
우리 또한 그의 일부인데, 환경을 파괴 하는 것은 스스로 파멸의 길로 걸어 가는 게 아닌가?
다른 이를 핍박해 빼앗은 것을, 남에게 팔아 배를 채우는 게 인간으로서 할 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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