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는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일이다.
주 중에는 밤에 툭탁대면 이웃에 시끄러울까 봐 마음껏 청소하기 어렵고,
그렇다고 주말에 날 잡아서 청소하자니 주말에는 좀 쉬고 싶다.
10분이면 배터리가 다 달아버리는 무선청소기를 돌리는 일 정도야 괜찮다.
하지만 걸레질하려면 걸레를 빨아 꼭 짜고는 구석구석 밀어야 하는데, 힘도 들고 시간도 잡아먹는다.
그래서 한참을 고민하던 녀석이 브라바 380t라는 걸레질하는 로봇 청소기다.
정가는 꽤 부담스러운 가격인데, 아마존에서 상품박스 손상으로 관세 내 가격으로 올라온 제품을 직구로 구매했다.
박스 안에는 로봇 청소기 본체, 충전기, 내비게이션, 물 걸레용 걸레판, 마른 걸레용 걸레판, 물걸레와 마른걸레 한 장씩, 그리고 설명서와 보증서 등이 들어있다.
내비게이션은 천장이 잘 보이는 곳에 두면 로봇이 공간을 탐색할 때 쓴다고 한다.
우선 시험 삼아 브라바 380t를 돌렸더니 먼지가 이만큼이나 나왔다.
그런데 이 걸레를 빨아서 말리는 게 귀찮다.
편하자고 로봇 청소기 샀는데 이런 번거로운 일을 하기는 싫다.
그래서 280*200 규격 청소용 부직포를 사서 끼워줬더니 청소 깨끗이 잘한다.
브라바 380t.
가격대비 만족스러운 성능을 보여준다.
가끔 추락하고 카펫 위로 올라오기도 하지만 대신 청소를 해주는데 이쯤이야 괜찮다.
매일매일 바닥에 광나게 청소하는 게 아니라,
걸레질을 분기별이나 월말에 한 번쯤 하던 사람에게는 정말 좋은 청소기다.
진공청소기가 아니라 그리 시끄럽지 않아서 집에 있으면서 돌려도 부담 없다.
그리고 집에 있는 인형들을 태워서 돌리면 SF 영화에 나오는 로봇을 보는 기분이 나서 재미있다.
브라바 380t에 올리는 인형은 둥글둥글하고 중심이 아래로 잡혀있는 인형이 좋다.
인형을 올려놓으면 구석에 들어가지 못하니, 잠깐 재미로만 올려보자.
하루 중 앉아서 생활하는 시간이 많아서인지 어깨와 등이 결리고, 편두통에 시달린다.
명망 높은 신경외과에서 비싼 주사를 맞아도 그때 뿐이고, 며칠 후면 또 아프다.
그런데 신기한 건 컴퓨터 앞에 앉지 않으면 이런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컴퓨터를 멀리해야 할까? 자세를 개선하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자세를 바꾸면 인생이 바뀐다.
이 책은 내 몸의 긴장을 자유롭게 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알렉산더 테크닉에 관한 책이다.
알렉산더 태크닉에 대해 상세한 내용은 나와 있지 않아서 아쉽지만,
지금껏 알고 있던 자세 상식을 바꾸어 놓기에는 충분했다.
알렉산더 테크닉을 조금 더 알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우선 이 책에 나온 이야기를 따라 긴장을 푸는 연습을 하고,
효과가 느껴진다면 조만간 더 깊이 알아봐야겠다.
자세를 바꾸면 인생이 바뀐다 - 책갈피
알렉산더의 발견 요약
습관적·무의식적으로 생체 매커니즘이 방해받을 수 있다.
전신의 협응과 균형 감각을 조율하는 '중추 컨트롤'이 존재한다.
사람들이 자신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게 된다면, 여러 기능에 불변의 효과를 주게 될 것이다.
'감각인식오류'가 존재한다.
몸은 서로 분리된 부분들이 집합을 이루어 기능하는 것이 아니다. 전체가 하나이며, 모든 부분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동일한 반응을 일으키는 자극을 자신도 모르게 계속 반복하게 되면 습관적인 행위가 된다. 이러한 습관적 반응은 나중에 정상으로 느껴지며, 자연스러운 것이 되고 만다.
지시어: 근육을 긴장하게 하는 습관을 바꾸려면, 즉각적으로 움직여 긴장을 더 심화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먼저 해 습관적인 행동들을 사라지게 해야 한다.
자제심 : 습관에 의한 자동적인 반응을 스스로 조절하는 것.
목적의식: 지시어와 자제심을 통해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를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는지 주의를 기울일 수 있으며, 결과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
마음과 몸 그리고 감정은 결코 분리된 것이 아니며, 우리의 행동 속에 모두가 하나가 되어 있다.
알렉산더 테크닉이란?
온몸에 자리 잡고 있는 긴장을 자각하고 내려놓는 방법
뼈와 관절에 스트레스를 가중시키는 것을 피하고, 보다 적절한 방법으로 몸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배우는 재교육
자기 자신을 더 잘 알게 되는 과정
어떤 상황 속에서 습관적·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닌 삶의 진정한 선택을 하는 방법
우리 자신이 어떻게 작동되도록 디자인된 것인지 이해하고, 몸의 자연스러운 기능을 방해하는 것을 멈추게 하는 방법
조화롭고 풍요로운 삶을 위해 일상생활 속에서 곧바로 적용할 수 있는 기술
자세 근육
몸을 바로 세우도록 디자인된 근육
중력에 저항하면서 자세를 유지하고 균형을 잡는 데 사용된다.
적색 근섬유가 주를 이룬다.
적색 근섬유는 '느린 수축'이라 불리는 근 수축 방식을 가진다.
피로 저항력이 있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피로해진다.
자세 반사 신경에 의해 움직이므로 의식적으로 작동시킬 필요가 없다.
운동 근육
동작을 취하기 위해 디자인된 근육
** 동작을 취하는 데 사용된다.
백색 근섬유가 주를 이룬다.
백색 근섬유는 '빠른 수축'이라 불리는 근 수축 방식을 가진다.
피로 저항력이 없어 빨리 지친다.
의식적인 마음에 의해 작동된다.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원주민들은 시간에 대한 개념이 없어 무슨 일을 끝내기 위해 서두르는 일이 없고, 어느 때고 하던 일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이든 항상 현재에 집중하며, 언제나 만족하고 행복해한다. 그들은 미래의 일을 미리 고민하지 않으며, 지난 일에 대해 후회하지도 않는다. 또 뭔가 일이 잘못되더라도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웃음을 터뜨리며 그 상황을 즐긴다. 그들은 매우 깨어 있으며, 자신의 주변에 대한 알아차림은 놀라울 정도다.
서두르는 것과 빠르게 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빠르고 정확하게 하면 별문제가 생기지 않지만, 서두르게 되면 많은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시간을 갖고 놀아라. 그것이 성공의 지름길이다.
시간을 갖고 생각하라. 그것이 힘의 원천이다.
시간을 갖고 놀아라. 그것이 영원한 젊음의 비결이다.
시간을 갖고 독서하라. 그것이 지식을 얻는 방법이다.
시간을 갖고 친구가 되어라. 그것이 행복으로 가는 길이다.
시간을 갖고 웃어라. 그것이 영혼의 음악이다.
시간을 갖고 사랑하고 사랑받아라.
- 아일랜드 고전
사람의 키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으므로 자신의 키에 맞춰 의자를 골라야 한다. 대략적으로 자신의 키의 3분의 1 정도 높이의 의자가 적당하다.
책상 높이는 자신의 키의 2분의 1 정도가 적당하다.
아이를 한번 보라. 무언가를 집어 올릴 때마다 어넺나 무릎과 고관절, 발목이 동시에 구부러지며, 척추는 항상 곧게 펴져 있다. 결코 수직이 아니다. 좀 더 자세히 보면 약 45도 앞으로 자연스럽게 기우는 것을 알 수 있다.
거울을 옆에 두고 서서 거울을 보지 말고 똑바로 섰다고 생각하고 자세를 취해 보라. 그런 다음 거울을 향해 고개를 돌려 자신의 느낌과 실제 모습을 대조해 보라. 그리고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라.
"이게 바르다고 느껴지는가?"
몸을 많이 돌리지 않고 볼 수 있도록 거울을 하나 더 놓고 관찰해 보는 것도 좋다.
이제는 발을 쳐다보지 말고 정면을 응시한 채 똑바로 서보라. 양발을 앞으로 향한 채 30센티미터 정도 벌린 후 평행이 되도록 나란히 놓아 보라. 자, 이제 자신의 발의 위치를 보라. 자신의 느낌과 실제 모습이 어떻게 다른지 확인해 보라. 이것이 바로 알렉산더 테크닉에서 말하고자 하는 감각인식오류의 실제 모습이다.
후두 - 환추 관절은 양쪽 귓구멍 사이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목이 자유롭다는 지시어를 생각할 때는 양쪽 귀사이를 생각해야 한다. 이 관절에 대해 잘못된 맵핑을 하고 있다면 목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어렵게 된다.
거울을 보면 팔이 몸통에 붙어 있는 곳이 어깨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피부와 근육 속으로는 흉골(stemum, 가슴뼈)까지 연결되어 있다. 위팔뼈(humenus, 상완골)는 견갑골(scapula)에 단지 붙어 있을 뿐, 실제적으로는 쇄골(clavicle)에 의해서 계속 연결되는 것이다. 쇄골이 흉골과 만나는 곳이 실제로 팔이 몸통과 이어지는 곳인 것이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고관절 위치를 가리켜 보라고 하면 대부분 골반 위쪽을 가리킨다. 그곳은 장골능(iliac crest)이라는 곳인데, 관절이 아니지만 사람들이 자주 구부리게 되는 부위다. 실제 관절의 위치는 훨씬 아래쪽인 생식기 가까이에 있다.
척추는 굽히는 움직임보다는 회전하고 원운동하는 움직임에 적합하게 디자인되어 있다. 다시 한 번 아이들이나 현대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나라의 사람들을 관찰해 보면 땅에 있는 무언가로 몸을 뻗을 때조차 척추가 편안하게 펴지면서 움직이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척추를 지나치게 앞뒤로 굽히는 것은 몸을 잘못 사용하는 대표적인 예로, 척추에 엄청난 압력을 가한다.
서 있을 때 우리의 체중은 발바닥의 세 포인트에 나누어 분산된다. 첫 번째 포인트는 발뒤꿈치에 있고, 두 번째는 엄지발가락 아래에 있으며, 세 번째는 새끼발까락 시작 부분에 있다. 만약 습관적으로 세 곳 중 두 곳이나 혹은 한 곳에 체중을 싣고 서게 되면 균형을 이루기 어려우며, 다른 상부 근육들이 긴장하면서 직립 상태를 유지하려 하게 된다.
바르게 서는 방법
양발을 30센티미터가량 벌리고 선다. 이것은 온몸이 안정적으로 지탱되는 느낌이 들게 한다.
주의 : 이 넓이는 안에서부터 측정된 거리다. 키가 큰 사람은 좀 더 벌리고, 작은 사람은 좀 더 좁히면 된다.
장시간 있을 경우에는 한쪽 다리를 15센티미터가량 뒤쪽에 놓고 60퍼센트 정도의 체중을 뒷발에 싣는다. 양발의 각도는 45도 정도로 한다. 이것은 한쪽 고관절로 체중이 쏠리는 것을 막아 주며, 온몸을 이루는 모든 구성 요소들이 서로 균형과 협응을 잘 이루도록 도와준다.
만약 골반을 앞으로 내미는 습관이 있다면 몸을 앞으로 기울이지 말고 부드럽게 등을 이완하며 바르게 펴준다(이때 지시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목이 자유로워진다. 머리가 앞과 위를 향한다. 척추가 길어지고 넓어진다. 다리와 척추가 분리된다. 어깨가 중심으로부터 멀어진다.) 이 동작은 서 있을 때 허리에 과도한 힘을 줘서 만곡을 만드는 습관을 없애 준다.
주의 : 지시어를 줄 때는 생각만으로 해야 한다. 실제로 움직이지 않도록 주의하라.
쉬기 위해 앉는 경우, 가장 필요한 것은 의자가 몸을 충분히 떠받쳐 주도록 하는 것이다. 어떠한 신체 부위도 압박받지 않고 긴장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필요에 따라 머리에 받칠 쿠션 정도는 사용해도 좋다.
일을 하기 위해 앉을 때는 쉴 때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을 취해야 한다. 책상이나 테이블을 앞에 두고 식사나 일을 할 경우, 두 발과 양쪽 좌골로 균형을 이루고 있어야 한다. 몸을 앞으로 기울을 때 특히 그 네 곳(양발, 양 좌골)이 확실히 지탱되어야 한다. 척추를 구부리면 고관절과 좌골에 있던 체중이 발바닥으로 전해질 수 없다. 어떤 활동을 하면서 앉아 있을 경우, 몸을 고정시켜 놓지 말고 균형을 잡아 가면서 고요히 흐름을 느끼고 있는 것이 좋다.
매일매일의 일상 동작에서 무릎, 발목, 고관절을 자연스럽게 구부리기만 한다면 자세는 어느 순간 개선되어 있을 것이다.
앉아 있다가 일어나기
양발을 약간 벌린다. 너무 앞으로 두지는 말고, 무릎이 발보다 조금 더 앞쪽에 있도록 한다.
일어나기 전에, 머리가 먼저 살짝 기울어지면서 앞과 위쪽으로 가도록 한다. 어깨가 이완되도록 한 다음, 다른 신체 부위들이 그 뒤를 따르도록 한다.
움직이는 동안 척추가 길어진다고 생각한다. 머리가 뒤로 젖혀지지 않도록 주의한다. 머리가 뒤로 젖혀지지 않도록 주의한다. 머리가 골반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는 것을 생각하면 도움이 된다.
고관절에서 경첩을 어닫듯이 움직여, 좌골과 고관절 부위에서만 앞으로 접혀지도록 한다. 허리가 구부러지지 않도록 한다.
다리 쪽에 무게가 점점 더 실릴수록 발바닥에 압력이 느껴진다. 자세 반사 신경이 반응하면서 순간적으로 아무런 노력을 가하지 않고 의자에서 일어난다.
의자에서 멀어질수록 체중이 뒤꿈치로 실리게 하고, 다리 근육을 긴장하지 말고 다리를 쭉 펴서 바닥을 밀어내며 일어난다.
자연스럽게 앉으러면 머리가 앞으로 움직이고(목이 앞으로 꺾이지 않음), 동시에 무릎, 발목, 고관절이 구부러져야 한다. 이렇게 하면 균형이 무너지지 않은 채 아래로 내려가게 된다. 그리고 균형과 이완을 위해 언제든 중간에 멈출 수 있게 된다. 좌골이 먼저 의자에 닿으면 자연스럽게 척추도 함께 구르듯 움직이고, 머리에 균형이 유지된 상태로 척추가 곧게 펴지도록 해야 한다.
<신경심리학 저널Journal of Neuropsychology>에 발표된 광 유예(Guang Yue)박사와 캘리 콜(Kelly Cole)박사의 연구에서, 한 그륩의 참가자들은 한달간 손가락 하나를 단련했고, 다른 그룹의 참가자들은 그 손가락을 단련하는 상상만 하도록 지시받았다. 그 결과, 실제로 신체를 단련한 그룹은 30퍼센트의 근력 증가가 나타났고, 상상만으로 단련한 그룹은 22퍼센틍의 근력 증가가 나타났다. 이는 생각의 힘이 육체를 바꿀 수 있음을 과학적으로 증명한다.
중추 컨트롤
나쁜 자세를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은 목 근육의 과도한 긴장이다. 이것은 중추 컨트롤을 방해하고 신체 전반의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다. 그러므로 목을 자유롭게 해줌으로써 목 부위의 긴장을 완화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며, 이로써 중추 컨트롤이 보다 효율적으로 작용할 수 있게 된다.
목이 자유로워지도록 하기
이 지시어의 주목적은 목 근육에 거의 항상 존재하는 과도한 긴장을 제거하는 것이다. 좋은 자세를 가지기 위해서는 머리가 척추 위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이것은 항상 제일 먼저 주어지는 지시어다.
머리가 위와 앞으로 향하도록 하기
이것은 목이 어느 방향으로 자유로워져야 하는지 설명한다. 만약 '위로'라는 지시어가 없이 목이 자유로워지는 것만 생각하면 머리가 아래로 떨어질 수 있다. 이 지시어는 머리가 정교하게 균형을 유지하도록 해주고, 몸의 다른 부분이 움직이기 위한 준비를 해준다. 이때 말하는 '앞'의 의미는 척추 위에서 머리가 앞으로 움직이는 것(긍정의 의미로 머리를 끄덕이려고 하는 것처럼)이지, 앞으로 수평 이동하는 것(TV를 보기 위해 얼굴을 내미는 것처럼)이 아니다. 머리가 위로 향한다는 것은 머리가 땅으로부터가 아닌 척추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말한다.
척추가 길어지고 넓어지도록 하기
척추가 길어지면 척추가 바르게 되고 재배열될 수 있으며, 몸의 잘못된 사용으로 인한 과도한 만곡을 줄일 수 있다. 척추가 길어지는 것은 등이 좁아지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으므로 이를 예방하기위해 척추가 넓어진다는 생각도 함께 해야 한다.
맨발로 달리는 경우, 바닥의 충격을 흡수하기 위해 발이 땅에 닿는 순서가 자연스럽게 바뀐다. 뒤끔치 대신 발의 볼 부분이 먼저 땅에 닿으면서 발의 아치를 충격 흡수 구조로 이용한다. 다음에 뒤꿈치가 일시적으로 내려가지만 바닥에까지 ㄷ도달하지 않는다. 그 전에 발의 볼 부분이 땅에 닿으면서 바닥을 박찬다.
세미 수파인 자세(The semi-supine position, 누워서 무릎을 세우고 있는 자세)
스트레스를 줄이고, 활력을 증가시키며, 다양한 종류의 통증을 감소시키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세미 수파인 자세를 정기적으로 행하면 척추를 정렬하고 전체적인 자세를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된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이 과정을 행하기 가장 좋은 시간은 아침이다. 척추를 압박하거나 몸을 긴장시키기 전에 자신의 몸 사용을 관찰하는 기회가 된다. 두 번째로 좋은 시간은 점심시간이나 오후 3,4 시쯤인데, 만약 그 시간에 직장이나 외부에 있다면 집에 돌아오자마자 하면 된다. 단, 식사를 많이 한 뒤에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아마 상당히 거북할 것이다.
세미 수파인 자세를 취하는 첫날에는 10분 동안 하고, 날마다 1분씩 단계적으로 시간을 늘려 20분까지 연장한다.
긴장을 푸는 방법을 익힘에 따라 요추 부위가 점차적으로 바닥에 편안히 이완될 것이다. 이렇게 되기까지 몇 주, 아니 몇 달이 걸릴 수 있으므로 스스로에게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허리 부위를 바닥으로 밀려고 해서는 안된다.
머리 아래에 책을 몇 권 놓고, 등을 대고 눕는다. 무릎을 구부리고 발다가은 골반 가까이에 평평하게 놓는다. 바닥은 카펫을 깔아 두거나 충분히 따뜻하게 해야 한다. 추위를 느끼거나 추운 곳에 누우면 긴장을 풀기가 훨씬 어렵기 때문이다. 필요하면 누워 있는 동안 담요를 덮어도 된다. 머리 밑에 책을 몇 권이나 놓을 것인지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하드커버보다는 잡지나 얇은 페이퍼백이 좋다. 책이 단단하게 느껴지면 충격을 완화할 수 있도록 책 위에 수건 같은 것을 놓아도 된다. 호흡과 침 삼키기가 불편해지면 안되므로 누워 있을 때 머리가 뒤로 젖혀지거나 앞으로 수그러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머리 밑에 책을 두는 이유는 머리가 뒤로 당겨져 척수를 압박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단순히 누워 있는 상황에도 여전히 머리를 뒤로 당길 수 있는 여지는 있다는 것을 유의하라.
발바닥은 바닥과 균일하게 접하고, 무릎은 천장을 향하고 있어야 한다. 발은 골반에 가까이 위치해야 하나, 불편할 정도로 가까울 필요는 없다. 만약 다리가 안쪽으로 오므려지거나 벌어지는 경우, 아래 지시 사항을 따르면 다리의 근육 긴장을 줄일 수 있다.
1. 다리가 안으로 기울여지면 발을 서로 더 가깝게 둔다.
2. 다리가 바깥쪽으로 벌어지면 발을 더 넓게 벌린다.
허리 부위는 바닥에 놓여 있어야 하나, 평평하게 하려고 인위적으로 노력할 필요는 없다. 무릎이 천장으로 향하도록 하는 이유는 요추 부위가 바닥 위에서 편안히 이완되도록 하기 위해서인데, 이렇게 되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자신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긴장을 단지 의식하라. 이때 눈을 반드시 뜨고 있어야 하는데, 이는 집중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몸의 대칭성을 보기 위해 몸의 좌측과 우측을 비교하되, 어떤 것도 바꾸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제 다음과 같은 지시어를 자신에게 주어라. 연습하는 중간중간에 반복해서 지시어를 주어야 한다.
* 내 목이 자유롭다.
* 내 머리가 앞과 위로 향한다.
* 내 척추가 길어지고 넓어진다.
* 내 다리와 척추가 서로 분리된다.
* 내 어깨가 중심으로부터 멀어진다.
* 내 무릎이 천장을 향해 구부러져 있다.
세미 수파인 자세의 효과
전반적인 자세를 개선한다.
추간판의 수액 흡수를 도와 키를 크게 한다.
과도한 척추 만곡을 감소시켜 척추를 바르게 해준다.
척추가 길어지게 해서 기립 자세를 더 잘 지지해 준다.
신체 전반의 근육 긴장을 풀어 준다.
늑간 근육(intercostal muscle)과 횡격막을 이완시켜 호흡을 개선한다.
근육의 이완으로 혈액 순환을 개선한다. 손발이 따뜻해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과긴장된 근육에 눌렸던 신경의 압박을 감소시킨다.
척추의 뼈와 관절의 퇴행을 방지하고, 잘못된 몸의 사용으로 인해 마모된 골격을 재생한다.
내부 장기가 정상적으로 가능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한다.
활력을 되찾고, 재충전시켜 준다.
육체적·정신적·감정적 스트레스와 긴장을 전반적으로 감소시켜준다.
이러한 효과는 셉미 수파인 자세를 꾸준히 연습하는 사람만이 거둘 수 있다. 하루에 적어도 10분 이상, 몇 주에 걸쳐 연습을 계속 해야 한다. 피치 못하게 빠지는 경우는 어쩔 수 없지만, 가능한 한 꾸준히 하는 것이 좋다. 처음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 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꾸준히 하다 보면 효과가 나타난다.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하되, 억지로 무언가를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하라.
산 세바스티안.
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 길을 걷기로 결정하고 가장 기대되었던 도시다.
지난 여름 이곳에서 보냈던 추억이 이번 여행의 기대감을 빵처럼 부풀렸다.
이곳에 다시 오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지난 여행 때는 오르지 않았던 우르굴 산을 아침 산책 삼아 올랐다.
이때는 요트 축제가 있는 기간이라 산 세바스티안에 사람이 아주 많았다.
사람들이 우르굴 산에 올라 팀 응원복을 입고 요트 경기를 응원했다.
다시 찾은 네스토르 바
여기 고기를 다시 맛보기를 얼마나 학수고대했던가?!
그러나 그때 우리를 친절하게 맞아주던 직원도 없었고,
요트 축제로 사람이 워낙 붐벼서인지 고기도 대충 구워 나왔다.
겉은 심하게 탔고, 속은 하나도 안 익었다.
고기 품질도 전만 못하다.
게다가 고기를 먹는 내내 바로 옆에서 쪼그려 앉은 사람들이 담배 연기를 내뿜는다.
네스토르 바가 산 세바스티안이라는 도시 추억의 반을 차지했는데, 이제는 여기 네스토르 바 때문에 산 세바스티안을 오지는 않을 것 같다.
산 세바스티안에 온다면 이 동네 축제 기간을 꼭 피해서 와야지.
어쩜 그때는 고기 맛이 돌아올지도 모르니까.
그래도 밤중에 돌아다닌 핀초(Pintxos) 투어는 좋았다.
특별히 바를 정해서 간 건 아니고, 골목마다 한 집씩 아무 곳이나 들어갔는데 다 맛있었다.
문어는 부드러운 식감이 일품이었고, 염소 치즈(Queso de cabra)의 풍성한 향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Gelateria Boulevard
이번 산 세바스티안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먹거리를 말하라면 이 아이스크림 집이다.
그냥 길거리 아이스크림 가게이고, 이 동네는 이 아이스크림 집이 아주 많다.
'뭐 그저 그런 아이스크림이겠지 그래도 더우니까 한 입 먹자.'
한 입 먹었는데, 입맛에 딱 맞는 아이스크림이다.
다른 맛 아이스크림은 그냥 그런데,
레몬과 코코넛 아이스크림은 정말 맛있었다.
단지 내가 원래 좋아하는 레몬 맛과 코코넛 맛에 다른 잡맛이 안 섞여서 그런걸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하루 두 번씩 꼬박 먹었다.
한 번에 세 가지 맛을 먹었는데, 다른 맛은 다 그냥 그런 아이스크림 맛이었다.
그래서 결국 리몬, 코코 + 아무거나로 메뉴가 굳혀졌다.
다음에 또 산 세바스티안에 가면 이 아이스크림을 먹어야겠다.
산 세바스티안은 해변도 참 좋은데, 이번에는 일광욕만 좀 하고 물에 들어가진 않았다.
산 세바스티안.
작은 동네인데 놀 거리도 많고, 맛집도 많다.
짧은 동선으로 많은 걸 즐기기 좋은 도시다.
지난번 산 세바스티안 여행 때 숙소는 중심에서 좀 떨어진 실켄 아마라 플라자 호텔이었다.
시설은 좋았지만, 중심가와 거리가 걷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운 거리여서 이번에는 구시가지 중심에 위치한 펜션 압 도미니를 숙소로 정했다.
구시가지 산 후안 거리에 있어서 밤에 핀초 바 투어를 다니기 좋은 위치다.
방은 깨끗하고, 화장실은 공용으로 사용했는데 공용 화장실을 쓰는 손님이 적어서, 사용에 무리 없었다.
방에는 웰컴 까바와 주전부리도 놓여있어서 환대받는 기분을 느꼈다.
작은 테라스도 있어서 해가 쨍할 때 테라스에 앉아 밖을 내다보며 까바 한잔하는 즐거움이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직원이 자리를 자주 비운다는 점이다.
체크인하려고 초인종을 몇 번 눌러도 문을 열어주지 않아서 전화하고 15분 이상 기다렸다.
체크아웃할 때는 실수로 카메라를 두고 나왔는데, 직원이 없어서 다시 숙소에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다행히 숙소 옆 방 아저씨가 아침 운동을 나오다가 문을 열어주셔서 짐을 챙겨 나왔다.
펜션 압 도미니 산 세바스티안.
그래도 접근성 하나는 끝내주게 좋고 시설도 만족스럽다.
지난 여름 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을 조금 걸었다.
오랜만에 도보여행이라 몸은 힘들었지만 기억에 많이 남는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 북쪽길을 걷는 첫 날.
파리에서 밤 기차를 타고 아침에 이룬에 도착했다.
온종일 걸어야 하니 기차역 근처 빵집에서 가볍게 아침을 먹고 걸음을 떼었다.
이룬 순례자 숙소에서 순례자 여권(Credential - 크레덴시알)을 받아 가려고 했으나, 오후 4시부터 문을 여는 관계로 일단 출발했다.
날씨도 좋고 경치도 좋다.
여행을 참 잘 왔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기분 좋게 걷는데 앞에 소가 한마리 보였다.
이 녀석은 좁은 길에서 통행료를 받으려는 듯 길을 딱 막고 서서 풍경을 감상한다.
조용히 지나가려고 했더니 씩씩거리며 뿔로 들이받으려고 한다.
잘못해서 소뿔에 치이기라도 하면 여행을 시작하자마자 끝내게 된다.
재수가 없다면 이번 여행뿐 아니라 이번 생도 같이 마감이다.
긴장을 늦추지 않고 조심스레 소 눈을 바라보며 빠르게 그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이 길을 지나는 동안 소를 여러 마리 만났지만 다른 소들은 그리 공격적이지 않았다.
바스크 지방에는 바스크 깃발이 자주 보인다.
애향심이 강한가 보다.
하긴 스페인에서 독립하려고 무장 투쟁을 했던 지방이니 그럴만도 하다.
파사이 도니바네.
작고 한적하고 아름다운 마을이다.
이곳 알베르게에서 크레덴시알을 받고 산 세바스티안을 향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니, 그만 걷고 싶은 마음도 생겼지만 그래도 산 세바스티안까지는 걸어보기로 했다.
산 세바스티안이 5km 남짓 남았을 때 힘이 다 빠져버렸다.
도저히 못 걷겠다 싶을 때 나타난 휴식처.
열두 지파(http://www.twelvetribes.org)에서 운영하는 식당에서 간단하게 요기를 했다.
마테차에 오렌지를 섞은듯한 음료가 참 맛있었다.
뱃속에 음식이 들어가니까 산 세바스티안까지 걸을 힘이 생겼다.
덕분에 어두워지기 전에 마을에 도착했다.
길게 늘어선 읽어보고 싶은 책 목록에서 그 우선순위를 정하는 일이 쉽지 않다. 마음 같아서는 다 읽고 싶지만, 책만 읽고 사는 삶은 아니기에 더 신중하게 책을 고르곤 한다.
그러나 때로는 이렇게 전혀 계획에 없던 책을 집어 드는 것도 좋다.
계획 따라 산다면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며, 때론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행운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지적 생활의 즐거움.
이 책을 전혀 알지 못했으며, 그저 지적 생활을 풍성하게 즐기지 못하는 자로서 대리 만족을 바라며 집어 들었다.
책은 적당한 책 두께와 가벼운 무게도 그 결정에 한몫했다.
P.G.해머튼.
그가 쓰는 단어 하나 하나에 힘이 실려있으며, 적절한 비유와 인용이 책을 읽는 즐거움을 더해주었다.
영국에 사는 H.D.소로를 만난 기분이다.
이 둘은 삶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졌다는 점에서 닮았다.
비슷한 시대를 살았으며, 글도 재미있게 잘쓴다.
책에서 이 말이 제일 마음속 깊이 들어왔다.
'매일같이 열심히 공부한다고 해서 지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지적인 삶과는 거리가 먼 지식노동에 회의감을 느껴 교양으로부터 멀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지식을 활용하는 기술만 늘어나는 것입니다. 지성과 교양의 궁극적 목표인 개인의 완성과 성취감, 행복은 사라지고 오직 지식이 재물로 변환되는 물질적 성과에 급급하게 되어 지식인임에도 지성인이 되지 못하는 사람도 우리 주변에는 많습니다.'
실제로 내 삶에서 지적 생활보다는 지식노동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흥미 있는 무언가를 깊이 탐구하는 시간보다는, 지금 당장 써먹을 만한 것을 익히는데 더 많은 시간을 쓴다. 이것이 지식노동자로서 제공해야 하는 노동의 의무이긴 하지만, 깊은 탐구가 결여된 지식은 본질에 접근하기 어렵다.
지적 생활의 즐거움 - 책갈피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름에 2주일 넘게 휴가를 즐기며 1년 간의 건강을 축적해두려고 계획을 세우지만, 그보다는 한 주간의 건강유지를 위해 2시간의 산책과 운동이 훨씬 더 효과적입니다.
지적 생활은 결국 신경조직에서 행해지는 활동입니다. 신경조직이 건강하게 유지되려면 운동은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는 몸을 움직여야 됩니다. 육체를 단련하는 일련의 과정들을 우리가 참아내고 수용할 수 있다면 그 효능은 지금껏 발견된 그 어떤 진정제보다 강력하게 작용합니다.
지적 생활은 육식동물의 생태와 닮은 점이 많습니다. 맹수는 간격을 두고 사냥에 나섭니다. 눈앞에 먹잇감이 뛰어다닌다고 해서 무조건 쫓지는 않습니다. 휴식을 취해야 될 때는 먹으라고 고기를 던져줘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휴식이야말로 지친 두 다리에 생기를 불어넣고, 힘줄을 끊는 데 사용한 턱 근육을 이완시켜주며, 다시금 사냥의 목적, 즉 굶주림이라는 욕망을 발생시킨다는 것을 맹수는 알고 있습니다. 휴식을 통해 맹수는 전투력을 유지합니다.
칸트는 새벽 다섯 시에 차와 담배 한 대로 아침식사를 마친 후에 강의준비와 집필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여덟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일했습니다. 일이 끝난 오후 1시에 단골식당에 가거나, 꼭 만나야 되는 사람들과 점심을 먹었습니다. 이후로는 음식을 일절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칸트는 의식적으로 두뇌를 사용해야 하는 일들, 예를 들어 독서라든가, 사색, 집필, 고민 등은 반드시 잠들기 15분 전에 끝마쳤습니다. 그에 따르면 잠들기 전에 머리에 휴식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머리가 휴식하지 못하면 제대로 잠들지 못한다는 주장입니다. 잠을 자도 숙면이 아니라고 합니다. 비단 칸트뿐 아니라 우리도 흔히 경험하는 이야이기입니다. 오늘의 지적 생활은 어젯밤 숙면했느냐와 직결됩니다.
식이요법은 다른 게 아닙니다. 채소를 다량 섭취하고, 고기를 피하고, 물을 많이 마시는 건 아무런 소용도 없습니다. 진정한 식이요법은 생활개선입니다. 나에게 맞는 생활습관을 찾아내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감이 단언하건대 지적 생활에서 요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지적 생활에 종이와 인쇄, 펜이 차지하는 비중 그 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선의 지적 생활은 무엇을 먹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요리는 지적 생활의 기초를 이루는 일종의 과학입니다. 우리 목적에 적합한 음식을 만들고, 적당량을 섭취하는 일련의 습관은 우리가 익혀야 될 과학 중의 과학이며, 인류를 현재와 같은 형태로 만들어낸 어머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와인 애호가는 날카롭지만 쉽게 흥분합니다. 맥주 애호가는 둔중하지만 그 둔중함 속에 평화가 있습니다. 충실하고 다스리기 쉬우며, 금방 화내는 법이 없고, 폭력에 호소하지 않는 침착함이 있습니다.
담배를 지나치게 많이 피우는 사람은 쉽게 불안감을 느낍니다. 그 불안감을 담배로 진정시키는 습성이 몸에 배어버린 탓입니다. 적당한 흡연은 지력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나친 흡연은 사람의 의지를 나약하게 만듭니다. 중독입니다. 종류에 상관없이 중독은 인간의 의지를 공략합니다. 의지가 있는 자는 무엇에도 중독되는 법이 없습니다.자신의 의지에 기대지 못하는 사람들이 뭔가에 중독됩니다. 지나친 흡연자의 특성은 의지부족입니다. 그 증거로 그들은 실천하기 전에 말이 많습니다. 끝없이 이야기합니다. 노력보다는 입으로 해결하려는 태도가 역력합니다.
인간에게는 두 종류의 생활이 있습니다. 동물적 생활과 지적 생활입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이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동물적 생활과 지적 생활을 적당히 융합해 더욱 건강하게 생활하라고 한다면 이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가 됩니다. 우리는 늑대도 아니고 여우도 아닙니다. 사람입니다. 그런데 늑대와 여우처럼 환경에 적응해나가라고 하는 건 우리를 지금 이 자리로 끌어올려준 지적인 강박증에서 벗어나라는 이야기입니다. 똑똑해지는 동시에 보다 강해지라는 요구는 받아들이기 쉬운 조건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은 기나긴 시간의 연속입니다. 지금 손해인 듯 보이는 운동이 한평생을 두고봤을 때 크나큰 이익이 되는 것입니다. 지적 생활은 건강이 오랫동안 유지되어야만 가능합니다. 건강도 실력입니다. 건강이 뒷받침되지 않는 지적 노동은 죽음과 직결됩니다. 신체를 건강하게 유지하고자 운동이라는 희생을 지불하는 것은 최상의 투자인 것입니다.
지적 생활에서 신문의 최대 결점은 항상 색다른 것만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2200년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지난밤에 찰스 다윈이 어디를 다녀왔는지는 그리 중요한 사건이 아닙니다. 언제 발견했는가는 사건의 핵심이 아닙니다. 그 같은 진실에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더욱 중요합니다. 헌데 신문은 이를 채워주지 못합니다. 색다른 사사리을 신문이 강조할수록 사건의 올바른 관계는 잘못 전달됩니다. 랜턴은 빛의 콘트라스트로 배경을 어둠 속에 가라앉혔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곳밖에 비추지 못합니다.
신문은 문명화된 세계에서 그날그날 가족끼리 주고받는 대화와 비슷합니다. 신문이 있기에 우리는 매일 서로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고, 불길한 고독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지적 생활에는 따로 계급이 없습니다. 지적 생활에도 급이 있다는 생각은 편협입니다.
지적 생활을 꾸준히 추구하려는 정신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똑똑한 반항아일지라도 자기 세계를 구축하지 못합니다. 같은 이유에서 전 세계에서 시험성적이 제일 좋은 사람이더라도 부여되는 지적 활동에 끌려가는 자는 결국 스스로를 잃고 맙니다.
훈련을 시작하는 근본적인 동기는 소망입니다. 타고난 능력뿐 아니라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지식욕, 이를 밑천 삼아 마음껏 지적 활동에 나서보고 싶다는 강력한 소망이 젊은이를 지적 훈련으로 인도합니다. 훈련을 쌓을수록 늘어나는 지식의 총량에 즐거워하고, 그 즐거움이 비로소 자신감이 되어 나를 세상으로 인도합니다.
작가라는 직업만큼 자기훈련에 나약해지는 분류는 없을 겁니다. 문학은 매우 보편적이어서 장벽도 없고, 자격증도 필요 없습니다. 음악과 미술처럼 소질에 덧붙여 이를 개발하고 만개시키는 일련의 교육과정이 수반되지 않습니다. 문학은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예술장르입니다. 수십 년 책을 읽고 문학 언저리에서 재능을 갈고 닦은 사람이 글을 써서 책을 내고 작가가 되듯, 수십 년간 시장에서 좌판을 깔고 채소를 팔던 장사꾼이 오늘 당장 글을 써서 책을 내면 작가가 됩니다.
아서 헬프스. 그의 글에는 한마디로 부적절한 말꼬리가 없습니다. 간결한 표현, 기억에 남을 만한 개성적인 비유, 더 이상 합당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 정확한 언어구사 능력, 이 모든 것들은 그가 앞세우는 사상의 가치를 떠나 젊은 시절 어떤 지적 훈련을 경험했는지 짐작케 해주는 대목입니다.
생트 뵈브.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조사를 완벽하게 끝마쳤다는 확신이 서지 않는 한, 뵈브는 함부로 펜을 들지 않습니다. 자료를 수집하고, 그것들을 배열하고 분류해서 숨겨진 상호관계를 발견하는데 뵈브는 일가견이 있었습니다.
산해진미의 재료가 갖춰졌더라도 적당한 양을 순서에 맞게 사용하지 못한다면 죽보다도 못한 음식이 나옵니다.
지적 활동, 특히 글을 쓴다는 건 준비된 자료와 나의 생각을 하나로 융합해 새로운 무엇인가를 창출해내는 과정입니다. 작품에 통일성이 이어져야 하며, 현실과 이상은 적절한 균형을 이뤄야 합니다. 그런데 지적 훈련이 부족한 작가는 지식은 부족하고 사상은 지리멸렬합니다.
"영감과 평소의 노력은 형제다. 자연을 구성하는 수많은 대립적 존재들이 그러하듯이 영감과 인위적인 로겨 사이에는 배척도, 배반도 찾아볼 길이 없다. 공복과 소화와 수면이 그랬던 것처럼 영감은 평소 생각했던 데서 찾아온다. 나는 그것이 부끄럽지 않다. 오히려 최대한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일 해야 될 일을 고민하는 것은 훈련이다. 내일의 나를 기대하는 것은 노력이다. 그것이 영감의 원천이다." - 샤를 보들레르
지적 훈련이 중요하기는 해도 한 가지 유념해야 될 사항이 있습니다. 우리들 인간의 정신은 즐겨 수용하는 부분이 있고, 반대로 인내 없이는 수용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는 점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좋고 싫음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이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좋고 싫다는 감정은 타고난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내적인 욕망을 따라가는 데 우리는 필연적으로 거부감을 느낍니다. 정신의 거부반응입니다. 특별히 선천적으로 정신이 무능력해서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몸에 밴 일상이라는 습관, 나날의 고민들에 짓눌려 거부감을 느끼게 되었을 뿐입니다. 이런 종류의 거부반응에는 주의해야 합니다. 만약 이런 기분에 휩싸였다면 자기 반성과 충분한 검토가 필요합니다.
"자기 힘을 함부로 낭비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은 없다. 그런 행위는 정열을 방해하는 짓이다. 10년만 그렇게 살아보라 의지는 찾아볼 수가 없고, 생각하는 것마다 시금떨떨한 뒷맛이 따라다닌다. 마음속에 감추고 있던 근성도 시들어버린다. 좌절은 덤이다. 젊은이는 이를 깨닫지 못한다. 무엇인가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구실만 믿고 마음 가는대로 행동한다. 이런 경험이 쌓여 젊은이는 인생을 배우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보게 되었을 때, 정력은 쇠잔하고 열정은 사라졌으며, 행동하는 법은 까맣게 잊어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서른 살의 일개 노동자, 단순한 호사가를 자처하는 자기 모습에 실망하게 될 것이다. 이도 아니라면 부모가 물려준 재산을 탕진한 채 돌아오지 않는 청춘을 그리워하는 패배자가 될 것이다." - 임폴리트 텐
세상엔 수없이 많은 요리가 있지만, 음식을 만드는 방법만 놓고 본다면 결국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재료끼리 주고받는 맛의 뒤섞임을 알고 있을 것, 둘째는 재료에 따른 화력의 사용법이라고 합니다.
그분에게 명성을 안겨준 요리는 '갸또 드 푸아(Gateau de Foie)'라는 이름의 음식입니다. 이 메뉴는 뛰어난 풍미로 유명합니다. 맛의 중심이 되는 주재료는 닭고기입니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닭은 간(肝)'입니다. 두 번째 핵심재료는 파슬리입니다. '갸또 드 푸아'는 닭의 간에 파슬리의 풍미를 더하는 것이 기술이며, 파슬리를 생략하거나, 파슬리 대신 다른 잎채소를 쓰면 특유의 풍미가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 파슬리를 지나치게 많이 쓰면 풍미가 짙어지기는 커녕 입도 못 댈 만큼 쓴맛이 난다는 것입니다.
주의할 점은 인간은 자신과 관련이 없는 것들에 간혹 의문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의문으로 그쳐야 되는데 의문이 확신이 될 때까지 추구하다보면 정작 관심을 가져야 될 것들에 소홀해지기도 합니다.
선천적으로 자신과 맞지 않는 분야에 관심을 돌리는 것은 쓸데없는 낭비입니다. 이는 뿔을 찾으러 떠났다가 귀를 잃어버린다는 유대인 속담에 나오는 어리석은 낙타를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는 지식과의 대면에서 옛날 사람들이 겪었던 흥분을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의 지적 수준은 과거보다 확장되었을지 몰라도 지적 감수성은 과거에 비해 분명 퇴화해버렸습니다.
이 시대의 청년들이 방황하는 이유는 지나치게 많이 배워서입니다. 얕은 깊이로 너무 많은 학문을 거쳤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지적 유산은 그리 풍부하지 못합니다. 현대인이 지적 생활을 계획하면서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피할까, 고민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고뇌는 쓸데없습니다. 우리는 본능으로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 무엇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 길로 망설임 없이 떠나면 되는 것입니다.
조상들은 하나를 공부했고, 여기에 정통해질 때까지 최선을 다했습니다. 우리는 여섯 가지를 공부하고, 그중 단 한 분야에도 정통하지 못하는 실패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조상들은 배움을 실천에 옮겨 자기만의 사상을 갖추려고 노력했다면, 우리는 배우는 과정에 집착하여 '배웠다'는 과거형을 자랑삼고 있습니다.
요즘 시인들은 문학상을 받기 위해 시를 씁니다. 상을 받기 위해 만들어진 시에는 열광이 없습니다. 그런 시는 안전을 추구합니다. 안전한 시어, 안전한 시상, 안전한 시제, 안전한 묘사뿐입니다. 그 시를 읽고 수상자를 결정하는 권한을 지닌 문단의 어른들에게 잘 보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규범을 벗어나지 않는 무난한 시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해할 수 있어야 되므로 독창성은 피해야 합니다.
교사는 단지 전문기관을 수료한 졸업생일 뿐입니다. 가르치는 과목에 무지합니다. 그들에게 배운 어린 학생들이 혼란을 겪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리스어를 가르치는 교사는 그리스어뿐 아니라 그리스 문화, 역사, 철학에 정통해야 합니다.
"메모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해두세요. 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쓰는 단계가 되면 메모를 보지 마세요. 기억에 남아 있는 걸 끄집어내야 합니다. 메모는 과연 이 장면이 내 머릿속에 남을 만큼 인상적인지를 시험하는 단계에 불과해요. 당신이 메모한 것이 정말 중요한 가치가 있다면 그걸 꺼내보지 않더라도 필요할 때 기억날 테니까요. 그러니 잊어버렸다고 아쉬워해서는 안 됩니다. 기억할 가치가 없었기 때문에 잊어버린 거라고 생각하면 편해집니다. 잊어버린 게 많다는 건 그만큼 지워야 할 것들을 미리 삭제한 것이에요. 수고를 덜게 되어 다행이라고 여기십시오."
좋은 기억력이란 많은 것을 기억하는 게 아닙니다. 선택 기억이든, 합리적 기억이든 본질은 '연계'입니다. 관련이 있는 것들 사이에서 개인의 연상력이 작용하고, 머릿속에 하나의 질서가 새롭게 생성되는 창의성이 핵심입니다. 지성의 올바른 작용과 조화는 기억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기억력은 연마할수록 확장됩니다. 제대로 된 연마법을 익힌다면 누구든지 남보다 뛰어난 기억력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기억력은 그런 의미에서 일종의 지적 근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간을 절약하는 가장 유용한 방법은 뭔가를 배우거나 연구하는 등의 지적 활동에 임할 때 의지를 갖고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을 완전히 나의 것으로 만들겠다, 나라는 존재로 가득 채우겠다, 라는 강한 기개를 드러내야 합니다. 그런 날들이 차곡차곡 쌓이다보면 어느 순간 도저히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할 것 같은 장벽에 부딪히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진실한 마음으로 자기를 돌아봐야 합니다. 과연 나는 지금보다 더 성장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에 확신이 든다면 좀더 매진합니다. 성장할 수 있다는 확신은 들지 않더라도 그 무엇보다 내가 이 분야를 연구하고 공부하는 데 기쁨을 느끼고 있다면, 그래서 도저히 포기할 수 없다는 마음이 생긴다면 마찬가지로 좀더 매진합니다.
반대로 이 한계가 넘을 수 없는 장벽처럼 보일 때 깨끗이 인정하고 돌아섭니다. 어떤 지식과 기술에 익숙해질수록 시점이라는 것이 보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점이란 습득한 지식과 기술이 일상에서 자연스레 발휘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도달하기까지 많은 장벽들이 있습니다. 시간도 적잖게 필요합니다. 흥미를 갖고 배우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꽤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는 수준에 도달하기까지 인내만 있다면 누구든지 가능합니다. 그러나 습득한 지식과 기술이 나의 일생을 좌우하는 데 이르기 위해서는 시간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시간과 더불어 재능과 열의가 필요합니다. 그간 내가 쌓아올린 시간에 어느 정도로 열정과 재능을 담아냈는가가 중요합니다.
누구에게나 불완전하게 습득한 지식이 몇 가지 있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실제로는 도움이 되지 않는 지식과 기술입니다. 예를 들어 제대로 된 대화가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몇 개 나라의 외국어를 조금은 할 줄 알며, 기초가 습득되어 있지 못한 과학 지식도 알고 있습니다. 또 타인도 나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변변찮은 기술도 있습니다. 이처럼 불완전한 습득에도 적잖은 시간이 소모됩니다. 헛되이 사라진 시간들입니다. 배우려는 노력만으로도 정신은 일정 수준의 연마가 가능합니다. 따라서 이 시간들을 무조건 헛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최소한 정신의 연마는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낭비로 몰아가는 시각도 부적절합니다.
그러나 결과물, 즉 습득된 지식과 기술의 편차를 놓고 말한다면 극히 낮은 수준입니다. 이 같은 불완전한 정신노동이 현대사회에서는 꽤나 유용한 활동으로 장려되고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현재의 시간을 철저하게 절약하고 싶다면 지금 몰두하고 있는 일들을 리스트로 작성해보는 건 어떨까요. 각각의 일에 정직하게 불완전한 정도를 기입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그 일들에 어느 만큼 집중하고 있는지, 또 그 일들이 당신의 생활에서 얼마나 큰 의미를 차지하고 있는지, 앞으로 지속적인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을 때 그 일에서 기대할 수 있는 성과가 어떤 것인지 차근차근 정리해보기를 권합니다. 이렇게 하면 몇 가지 지적 활동 중에서 실현 가능한 것, 다시 말해서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분야가 보입니다. 그 분야에 집중하십시오. 나머지 활동은 비록 흥미가 있고 개인적으로 소중하더라도 내려놓습니다. 단념입니다. 단념하는 대신 귀중한 시간이 주어집니다. 단념하지 않고서는 시간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지적 활동에 앞서 이 같은 기초지식의 한계설정을 등한시하고 있습니다. 나는 꽃을 좋아하니까 당장 정원으로 뛰어나가 꽃을 심겠다는 사람은 있어도, 나는 꽃을 좋아하니까 우리 집 정원에 꽃을 심기 전에 식물학 표본 등을 공부해 우리 집 정원 토양에 적합한 꽃을 어떻게 키워야 되는지 조사해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전자의 활동은 육체노동, 혹은 치미생활이며 후자는 지식이 동반되는 지적 생활입니다.
서로 보충하는 연구를 동시에 진행하는 것도 효과적인 시간절약입니다. 풍경을 그리는 화가에게 자신이 일하고 있는 지방의 식물을 안다는 건 매우 큰 도움이 됩니다. 왜냐하면 식물에 관한 지식이 있으면 모든 종류의 식물을 가능한 한 정확하고 세밀하게 기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풍경화가가 만약에 과학을 연구하려 한다면 그림에는 전혀 무관한 화학이나 수학을 공부하는것보다는 그림을 그린다는 지적 활동에 도움을 주는 식물학을 공부하는 편이 좋습니다. 전문적으로 하고 있는 연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지적 활동은 쉽게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인내는 우리가 가진 최고의 재능이자 최선의 기능입니다. 물러서는 대신, 후회하는 대신 그 자리에 꿈쩍 않고 서서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당신에게 부족한 것이 시간인지, 재능인지, 아니면 자신을 기다리지 못하는 불신인지 헤아려보십시오. 정답은 당신 안에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인생은 짧고 시간은 화살보다 빠르므로 현재라는 시간은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건 당연한 소리입니다. 그러나 좀 더 개인의 구체적인 생활 속으로 침잠해들어간다면 일상의 내면에서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되는지, 또 무엇부터 시작해야 되는지를 결정하는 권한은 우리에게 있으며, 격언의 가르침을 듣고 깨우쳐 이를 선택하려면 우리에겐 보편적인 지혜를 말하는 격언과 달리 특별하고 개인적인 지혜가 준비되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현대인에겐 시간이 지연되는 것을 참지 못하는 나쁜 습성이 있습니다. 기다림과 미뤄짐을 무조건 손해로 여깁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지연되었기에, 미뤄졌기에 위험을 피하게 되는 상황이 종종 벌어집니다. 그런 경험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런 행운은 그저 행운일 뿐입니다. 어쩌다 보니 재수가 좋아 한 번쯤 이런 일도 있구나, 하고 넘어가버립니다. 보편적인 나타남은 일시적인 행운이 아닙니다. 실제를 갖춘 지혜입니다. 우리는 늦어짐의 지혜에 대해 생각해봐야 되는 것입니다.
책은 좋은 지적 도구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전업 작가이거나, 정말 책을 좋아해서 인생에 독서 외에는 의미 있는 활동이 없다고 굳게 믿는 사람이 아니라면 굳이 독서라는 지적 활동에 얽매여 반드시 많은 책을 읽어야 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대학교의 방식을 참고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대학교는 최고의 지식교육기관이지만 그 실상을 살펴보면 그리 많은 책을 광범위하게 읽도록 강요하지 않습니다. 전공에 특화된 소수의 책을 완벽하게 섭렵하라고 요구합니다.
지적 생활은 시간을 먹이로 삼습니다. 따라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지적 생활의 핵심입니다. 탐욕스런 인간의 본능은 시간에 대해서도 비슷한 행위를 나타내려고 노력합니다. 우리는 휴식이라는 이유로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할 때가 아주 많습니다. 그 시간들을 절약하지 않고서는 지적 생활에 필요한 기본 토대가 마련되지 않습니다.
남보다 오래 공부한다고 해서 그들보다 더 나은 성적을 받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단지 시간을 들인다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시간을 들이지 않으면 남보다 나은 성적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마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시간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약속해주지 않지만, 또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약속해줍니다.
기억의 형성에는 두 가지 조건잉 씨습니다. 첫째, 감정적 충격입니다. 선명한 감정적 충격이 뇌리와 마음에 깊게 새겨져 기억할 의사가 없음에도 저절로 기억되는 경우입니다. 두 번째는 반복입니다. 시간을 들여 반복적으로 주입시킨 기억입니다.
지적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대여섯 개의 다른 분야에 관심ㄴ을 갖고 있습니다. 이에 적잖은 시간을 소요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대여섯 개의 분야 중에 제대로 만족스런 성과를 얻게 되는 것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시간 절약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것만으로 능률은 향상됩니다. 그러나 시간을 절약한다는 것은 고무줄을 늘이는 것과는 다릅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가죽끈을 늘이는 것과 비슷합니다. 즉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시간을 절약할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이 한 시간에 어느 정도나 일할 수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어리석음에는 어리석음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걸 잊은 채 살아가는 사람과 뭔가를 찾아내 기억하며 살아가는 사람의 미래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시간의 다른 이름은 기억입니다. 젊은 날 우리는 자신의 가능성을 과대평가한 대가로 오늘은 비참해졌고 , 내일을 두렵게 만든 잘못을 저지른 바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겠지요. 희망이 없어 보이지만, 희망이 없다고 여겨지는 삶이기에 우리는 희망을 찾고 싶다는 열망을 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오늘이 기억해야 될 현명한 꿈이 아닐는지요.
환자와 건강한 사람의 차이가 뭘까요? 환자는 침대에 누워 있고, 건강한 사람은 자신의 두 발로 걸어다니고 있는 걸까요? 맞는 이야기에요. 그렇다면 환자와 건강한 사람의 차이는 '걷다'가 되겠지요. 환자는 걷지 못하고 건강한 사람은 걷고 있다, 이말인 즉 계속 걸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곧 환자라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자신의 길을 중단한 사람이 곧 환자라는 이야기입니다. 시간이 없다, 돈이 없다는 이유로 잠시라도 그 걸음을 멈추었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지금 아파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 나이팅게일
중단된 독서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습니다. 당신이 중단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전깃줄을 다시 이어붙이면 전류는 다시 통하지만, 사람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적인 상상력이 끊어진 뒤로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끊어진 자리에서 재생되는 지적 감동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찢어진 명화를 다시 붙인들 과거의 명작이 되지 안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이 부족하므로 여유가 생겼을 때 띄엄띄엄 책을 읽고 필요한 만큼의 지적 생활을 이어나가겠다는 산술적 계산으로는 당신이 기대하는 지적인 삶은 건설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돈은 지성의 토양과 같습니다. 토양이 충분하고 물을 넘치게 흘려주면 싹은 저절로 피어납니다. 그 이점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게 슬퍼질 따름입니다. 토양이 메말라 모래와 같은 곳에 씨를 뿌려봐야 싹이 틀 리 없습니다. 사상도 현실의 일부입니다. 자본이 다스리는 현실 사회에서는 돈이라는 토양을 거부하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지적 생활도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매일같이 열심히 공부한다고 해서 지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지적인 삶과는 거리가 먼 지식노동에 회의감을 느껴 교양으로부터 멀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지식을 활용하는 기술만 늘어나는 것입니다. 지성과 교양의 궁극적 목표인 개인의 완성과 성취감, 행복은 사라지고 오직 지식이 재물로 변환되는 물질적 성과에 급급하게 되어 지식인임에도 지성인이 되지 못하는 사람도 우리 주변에는 많습니다.
과거의 나는 기회의 중요성을 믿었습니다. 기회가 주어져야 노력이 가능한 것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헌데 이 나이게 될 때까지 살아보니 정말로 간절한 것은 시간과 건강입니다. 시간과 건강이 허락하는 한, 기회는 쉬지 않고 찾아옵니다. 우리를 찾아오지 않더라도 내가 찾애닐 수 있습니다.
"율법은 확실히 무거운 짐이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게나. 전쟁터에 나간 군인들에게 총과 탄약은 생명보다 값진 것이네. 아무리 무거워도 총을 버리고 전쟁터에 나가진 않을 게야. 배낭이 쓸데없이 큰 것 같아도 그 안에는 모포며, 식량이며, 물과 약품들로 가득하네. 이 또한 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것들이지. 내가 만약 군인이라면 그것들이 무거워도 함부로 버리지는 않을 걸세." - 어느 늙은 랍비 랍비
인생은 정직해져야 합니다. 누구보다도 나 자신에게 정직해져야 합니다. 현재 나는 본래의 내가 가진 능력보다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그 평가에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생활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식인들은 나는 그것을 모른다, 라고 말하기 보다는 그것은 애초부터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라고 말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인종입니다. 이런 변명으로 자신들의 신분이 유지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의 비루한 처지가 설명된다며 득의양양해합니다.
고통과 즐거움은 같은 길에 놓여 있습니다. 기쁨의 끝에 고통이 있고, 고통 끝에 기쁨이 있습니다. 당신을 괴롭히려고 운명이 시련을 주는 건 아닙니다.
확신하십시오. 진정한 생명은 당신의 슬픔으로 심어진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 열매가 당신 소유가 되지 않을지라도 당신은 충분히 행복했다는 것을.
목숨이 붙은 것들은 언젠가 떠나야 합니다. 그것이 나를 부끄럽게 합니다. 언젠가는 떠나야 할 이 삶에 나는 왜 그리도 미련을 갖고 살아가는지, 생각할수록 부끄럽습니다. 언젠가는 나를 떠나게 될 그 무엇에 왜 그리도 초조해하는지, 뒤돌아볼수록 부끄럽기만합니다. 가구 하나, 책 한 권도 나의 것이 아닙니다. 이것들도 제 나름대로 목숨을 갖춘 존재들입니다. 문짝이 썩고, 책갈피의 수명이 다해지면 나를 떠날 것입니다. 나의 그리움과 애증 따위엔 동정을 배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나는 이것들이 나의 것이라며, 내가 허락하지 않는 한 제 마음대로 나를 떠나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하며 살아왔던 것은 아닌지요. 그 편협한 애증이 나를 부끄럽게 만듭니다.
두려움은 믿음이 약해졌다는 신호입니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믿음밖에 없습니다. 인생이 두려운 까닭은 나 자신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고, 사람이 두려운 까닭은 그를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을 믿기만 한다면 인생은 두려울 이유가 없습니다. 상대방을 믿어주기만 한다면 그의 말과 행동이 나를 괴롭히지 않습니다.
건강은 두말할 것도 없이 큰 축복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남보다 오래 살고 싶다는, 즉 그들보다 빨리 죽고 싶지 않다는 미혹된 마음으로 건강한 삶을 추구한다면 머지않아 그토록 아끼고 애달프게 여기는 건강을 잃게 될 것입니다. 건강은 육체의 강건함만으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정신과 감성이 올바를 때 건강도 유지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인간을 괴롭히는 질병 중 태반이 피폐된 정신과 감성에서 싹트고 있습니다. 육체적인 건강에 유념하느라 정신과 감성을 상실한다면 가장 두려운 결과, 즉 건강한 몸으로 속절없이 사라져야 하는 참담한 운명과 맞닥뜨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으며, 무슨 이유로 인생이 고단해졌는지도 묻지 않고 살아갑니다. 왜 그런 일을 할 수 없는지 원인을 궁금해하지도 않고, 불가능한 일에 매달려 아까운 세월만 허비하고 있습니다.
"돌진하라!"
이것은 명령이었습니다. 나의 사회적 위치와 눈앞의 과제를 모두 뛰어넘는 무소불위의 권력이었습니다. 그 명령이 손가락질함는 곳엔 항상 내가 있었습니다. 내가 돌진해야 할 상대는, 넘어뜨려야 할 적은 항상 나 자신이었습니다.
나를 비굴하게 만드는 적도 나였고, 나를 허약하게 만드는 적도 나였으며, 나를 무기력하게 만든 적도 언제나 나 자신이었습니다. 인생은 나 자신과의 승부였습니다. 승자는 항상 나였고, 패자도 항상 나였습니다. 나는 인생의 모든 고비에서 승리와 패배를 동시에 맛봐야 했습니다. 그 반복적인 경험에 익숙해지면서 나는 승리를 기뻐하지 않게 되었고,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철학의 학문적 특성은 보편적 세계관의 표출입니다. 제아무리 위대한 사상가의 철학도 출발은 개인적 세계관의 수립입니다. 이 개인적인 세계관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을 때, 우리는 그의 이름을 위대한 사상가의 반열에 올려놓습니다.
철학이 권위를 덧입게 되면 그것은 더 이상 철학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상적 폭력이며, 군림이고, 구속입니다. 철학은 지극히 개인적인 자기표현입니다.
위대한 사상이 위대한 철학자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위대한 생애만이 그를 위대한 철학자로 만들어줍니다. 요즘 등장하고 있는 사상가들은 철학적인 생에보다 철학의 결실에 더 매진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철학을 멀리하는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인간은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인간은 자유를 쟁취해야만 합니다. 인간은 자유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명예와 호화로운 저터개이 당신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이 공허하고 따분하게 생각된다면 당신의 삶이 억눌려 있다는 증거입니다. 당신에게 자유가 필요하다는 증거입니다. 당신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애꿎은 사람들에게 분노하고 실망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실 당신 삶에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나이듦이 고통시러운 까닭은 어떻게 늙어야 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한 번도 늙어본 적이 없으므로 그 과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모릅니다. 그 무지가 노년의 생에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곤 합니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지혜가 무엇이냐고 한다면, 어떻게 늙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인간의 최후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지혜는 없습니다. 이 지혜는 젊었을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고 어렵습니다.
노인답게 자연스럽고 현명해진다는 것은 러렵기만 합니다. 아름다운 노년은 서쪽 하늘을 물들이는 노을입니다. 노을이 아름답기 위해서는 새벽부터 대지를 달궈야 합니다. 아름다운 노년은 결국 아름다운 청춘을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주어진 인생에 최선을 다했다는 뜻입니다.
당신이 어떤 직업을 통해 행복해지고 싶다면 다음 세 가지를 유념해야 합니다. 첫째, 그 일에 필요한 능력을 갖출 것, 둘째, 지나치게 많이 일하려고 하지 말 것, 셋째, 그 일을 사랑한다고 당신 자신을 속이지 말 것.